北침투 임무 해병대 출신 노영길 씨의 30년 묵은 이야기
“북파공작 하면 HID만 기억… 812부대 존재 알린다오”
“그만해요, 그만! 여보, 나예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아내가 소리를 지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내의 목을 조르고 있다. 깜짝 놀라 손을 떼는데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다. 잠결에라도 누군가 몸을 건드리면 그를 제압하려고 즉시 목을 조르게 된다. 30여 년 전 “잡히면 죽는다”고 훈련받았던 기억이 퇴색했을 법도 한데 몸은 조금도 잊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결혼 후 아내와 각방을 썼지만 깜빡하고 함께 잠든 날이면 여지없다.
노영길 씨(53)는 서울의 법인택시 운전사다. 이렇게 잠을 설친 날은 운전대를 잡는 순간에도 그 시절의 기억이 선명히 떠오른다. 그는 젊은 시절 해병대 440기, 해병 812부대 일명 ‘망치부대’ 소속이었다. 하지만 그는 보통 해병대가 아니었다. 망치부대원 26명은 ‘귀신’이 아니라 ‘빨갱이’를 잡으려고 훈련받은 ‘인간 병기’였다.
‘모조리 죽여라!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을 잘라 모두 봉투에 넣는다, 실시!”
31년 전인 1982년 3월 노 씨는 첫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훈련에 투입됐다. 전해 11월 사병으로 입대해 신병 훈련을 마치고 해병대 1사단에 배치된 직후였다. ‘해병대 특수수색훈련’이었지만 처음부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내무반에 들어서자마자 손톱 등을 잘라 봉투에 담으라는데, 일반적인 수색훈련은 아닌 것 같더군요. 나중에 알았지만 작전 중 사망 시 가족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훈련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일주일 가까이 굶은 뒤 대원들은 화장터에 투입됐다. 교관들은 피 흔적이 있는 뼛조각을 건넸다. 일종의 담력훈련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설마 사람의 뼈는 아니었겠죠. 당시에는 사람 뼈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헛구역질을 하고, 치를 떨었지만 다들 뼛조각을 씹어 먹었습니다.”
극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하수구나 오물통 속에 수 시간을 빠져 있기도 했다.
야간에 중무장을 하고 6, 7명이 한조가 되어 100kg에 가까운 고무보트를 들고 산과 계곡을 뛰었다. 시간당 10km 이상을 달려야 했다. 일반 육군의 행군 시간은 1시간에 4km다. 한 번에 12km 바다수영을 시키고 중간에 낙오되는 사람은 모두 자대로 복귀시켰다.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는 훈련을 받으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도 몰랐다.
5개월 뒤 망치부대가 주둔한 백령도로 떠나며 노 씨는 알게 됐다. 백령도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섬인 월내도가 직선거리로 12km라는 것을. 1968년 청와대를 기습한 김신조가 소속된 북한의 대남 침투부대 ‘124군 부대’가 30kg 무장을 하고 시간당 10km 급속행군을 하는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노 씨와 동기생 25명이 전출된 망치부대는 해병대 별동부대였다. 1981년 8월 12일 북한 미그기가 백령도 상공을 침범하고 돌아간 이후 북한 시설물에 타격을 주기 위해 꾸려졌다.
노 씨는 대학에서 유도를 전공했다는 이유로 뽑혔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훈련을 받고 해병대 최전방인 백령도까지 갔다”며 “육군보다 복무기간이 짧아 선택했던 해병대가 이후 30년 인생을 결정지을지 꿈에도 몰랐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들이 훈련받은 교육장에는 ‘모조리 죽여라,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고’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목숨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부대에 배치받은 뒤 훈련은 실전이 됐다. 가장 무서운 시간은 오전 4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부대원들은 오후 8시에 완전 무장을 하고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까지 ‘코만도5’라고 불리는 고무보트를 타고 나섰다. 거기서부터 북한 월내도 200m 앞까지는 헤엄친다. 밤 12시를 넘기고 새벽이 되어도 바다에 잠긴 채 적 초병의 동태를 살폈다. 그래도 여기까진 두렵지 않았다. 오전 4시, 부대로 복귀하는 순간에 비하면.
‘우리 존재조차 모르는 일반 해병대원들에게 발각이라도 되면….’ 조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인사격 당해 맞는 ‘개죽음’은 참을 수 없었다.
망치부대는 백령도 장촌항 인근에 있었다. 망치처럼 때리고 바로 거둔다고 망치부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군의 공식 편제에 없었던 부대인 데다 공식적인 부대장도 없었다.
일주일에 2, 3차례 망치부대원들은 월내도의 북한 초병과 시설물 상황을 살폈다. 노 씨는 “북한군 진지에서 우리 존재를 어떻게 알았는지 간혹 ‘망치 동무들 내일 아침에도 모가지가 붙어 있는지 확인 잘 하시라요’라고 대남 방송을 하기도 했다”며 “섬뜩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보급은 언제나 최고급이었다. 1982년 갓 개발된 K-1 기관단총을 지급받았다. 야간투시경이 모든 ‘투입’에 따라다녔다.
다만 목숨은 부대원들의 것이 아니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월내도 안으로 침투해야 했다. 지급된 실탄 200발, 발각되면 살기 위해 남쪽으로 헤엄치라는 지침 외에 안전장치는 없었다. 혹시라도 잡힐 경우에 대비해 개인당 2발씩 수류탄이 지급됐다. 옷 고리에 안전핀을 묶어 둔 수류탄은 언제든 자폭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 씨는 1982년과 1983년에 4개월씩 총 8개월을 망치부대에서 복무했다. 원칙적으로 4개월 이상 연속근무는 금지돼 있었다. 나머지 기간은 포항의 해병대 1사단에 돌아가 자대 생활을 했다. 1984년 전역한 그는 건설회사에 다녔다.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보상을 이야기한다”
노 씨가 택시 손님들에게 망치부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5년 전부터다. 한때는 그저 잊으려 했던 그 시절을 이제 살리려는 것은 보상받지 못한 젊음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정부를 향해 ‘존재가치’를 인정받으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북파공작원이라고 하면 HID로 불리는 육군첩보부대만 알고 있다”며 “30년 전 해병대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지만 우리는 완전히 잊혀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살아 있는 망치부대원들을 만나 증언을 들었다. 살육과 살상을 위한 ‘무기’로 훈련받은 대원들은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실전 상황처럼 훈련을 받다 보니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다. 제주도에 사는 한 대원은 노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백치’ 상태다.
“제일 억울한 건 우리가 징집됐다는 겁니다. 2003년 보상받은 북파공작원(HID)들은 자원이라도 했죠. 아무것도 모른 채 훈련받고 적지까지 수시로 드나들어, 그 긴장과 공포 때문에 삶이 망가진 사람도 많은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죠.”
망치부대원들은 최근 국가를 상대로 보상 요청에 나섰다. 무소속 김형태 의원과 민주통합당 김광진 의원이 이들을 구제하자는 내용의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각각 발의했다.
망치부대원들에 따르면 812부대는 1982년 3월 창설돼 1984년 10월 말까지 운용됐다. 작전 지역에 직접 투입된 요원이 198명, 훈련 과정을 이수한 요원이 300명에 이른다. 월내도 말고도 연평도에서 북한 용매도, 대수압도로 투입된 요원도 있다. 군 복무 중이나 전역 후 우울증이나 정신질환 등으로 사망한 사람은 10명, 현재 병을 앓고 있는 환자는 3명이다.
국방부는 이들에 대한 보상에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부대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실제 ‘대북 침투’ 활동을 했다는 증빙 자료가 없다고 했다. 서세원 국방부 특수임무처리자 TF팀장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 신청 기간이 지났을 뿐만 아니라 812부대원들이 NLL을 넘어 작전에 들어간 기록이 없다”며 “단지 고된 훈련을 했다고 보상자에 포함시키는 것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의 입법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만약 이분들이 정말 NLL을 넘었다면 그건 특수임무가 맞고 국가가 보상을 해 줘야 하는 사안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김형태 의원은 “기존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이 지나치게 소극적인 게 문제”라며 “망치부대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까지 적극적으로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용원 해병대812요원 명예추진위원은 “국방부는 북파 사실이 인정된 해병대 대북첩보부대(MIU)에 대해서도 끝까지 북파 사실을 부인한 바 있다”며 “국방부가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인 자료를 모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15일에는 국회에서 공청회도 열렸다. 이 자리에서 당시 해병 6여단장으로 백령도에 주둔했던 차수정 예비역 소장은 “망치부대는 실제로 북한 침투 훈련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직접 명령체계에 있지는 않았지만 훈련지원 총책임자로서 당시 상황을 일기로 꼼꼼히 기록했다. 차 소장은 “당시 일기를 보면 ‘북한 침투’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해병 수뇌부들은 “그런 부대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고 존재도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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