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1시 반경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 1층 로비. 외교부 관계자들에게 한일문제에 대한 조언을 해주기 위해 들어서던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85)이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우연히 마주쳤다. 최 원장은 반갑게 인사를 건넨 뒤 불쑥 A4용지 5장을 윤 장관에게 건네며 “꼭 한번 읽어보라”고 당부했다. 윤 장관은 “잘 알겠다”고 대답했다.
최 원장은 이 장면을 목격한 기자에게 “최근 과거사에 대한 왜곡과 망언을 일삼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마땅히 부끄러워할 내용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한일 문제의 대표적 권위자인 최 원장은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베를 보면 (나치의) 히틀러가 떠오른다”며 아베 총리의 역사 왜곡을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다.
최 원장이 윤 장관에게 전한 글은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총리 재임 시절인 1958년 일제 식민통치를 사죄하기 위해 한국에 특사로 보낸 야쓰기 가즈오(矢次一夫)의 방한 기자회견 전문이었다. 야쓰기는 일본 정부 최초의 사과(謝過) 사절이었다.
야쓰기는 그해 5월 21일 회견에서 “기시 총리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한국에 범했던 과오를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총리는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진정으로 노력해 왔다. 이런 노력을 앞으로도 계속하겠다는 기시 총리의 결심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당시 가장 주목받은 건 회견 마지막 대목이었다.
“기시 총리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우연히도 동향(同鄕)인 까닭에 그의 선배인 이토가 저지른 과오를 씻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제의 조선 침략을 주도한 장본인으로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피격돼 사망했다.
최 원장이 건넨 글엔 주일·주미 대사를 지낸 고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의 회고도 함께 담겼다. 김 전 장관은 야쓰기 방한 당시 외무부 차관이었다. 이 회고에 따르면 야쓰기가 이 대통령을 만나 한 얘기는 더 극적이다. 야쓰기는 1958년 5월 19일 이 대통령에게 기시의 친서를 전하면서 “일본의 한국 합병은 과오였다. 기시 총리와 동향인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을 침략하고 한국민을 불행하게 한 것은 커다란 잘못이기 때문에 반성한다”고 말했다.
야쓰기는 이 대통령을 만나기 전 한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일본인들은 (사죄할 때) 도게자(土下座·땅에 꿇어앉아 납작 엎드려 절하는 것)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게 좋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럴 필요까지 없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그는 머리를 90도까지 숙이고 있다가 이 대통령이 가까이 와서야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고 김 전 장관은 회고했다.
최 원장은 기시가 야쓰기를 통해 고향(야마구치 현) 선배인 이토 히로부미의 잘못을 사죄하고 반성한 것에 특히 주목했다. “일본 정부 차원의 공적 사죄와 함께 개인 차원의 사적 사죄까지 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기시 자신도 A급 전범 용의자였다가 3년간 수형생활을 한 뒤 불기소 석방돼 정계에 복귀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최 원장은 “오늘날의 한국인, 일본인 모두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아베 총리는 외할아버지가 (야쓰기 회견문을 통해 밝힌) 한국에 사죄하고자 한 정신을 반역하지 말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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