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해 북한군 총정치국장이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특사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했다고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22일 보도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으로 정권을 물려받은 이후 김정은의 첫 특사로 군부 최측근 인사를 임명한 것이다. 이달 7일 한미 정상회담이 개최됐고 6월 미-중, 한중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이다. 북한의 이번 특사 파견이 긴장 국면의 한반도정세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주기 위한 전략적 선택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22일 오전 특별기편으로 베이징(北京)에 도착한 특사단은 국빈관인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왕자루이(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만났다고 관영 신화(新華)통신이 보도했다. 통신은 최룡해의 직함을 노동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라고 밝혔다. '중국 공산당 대(對) 북한 노동당'의 교류임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의 한 소식통은 "특사단이 중국에 오래 체류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북한 특사단의 방중 목적에 대해서는 북-중 양국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다. 우선 지난해 12월 시작된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 올 2월 3차 핵실험 등 도발과 이에 따른 대북제재로 소원해진 북-중 관계를 복원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또 6월 7일 미중 정상회담, 같은 달 중하순 한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어 북한이 선제적 외교행보에 나선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최명해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김정은이 아직 중국을 방문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북한이 정상급 대화채널에 버금가는 인물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비중 있는 최측근을 발탁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중국에 머무는 동안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할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면담이 성사될지 여부가 1차 관심대상이다.
특사단에 이영길 총참모부 작전국장과 김수길 중장 등 군부인사도 포함된 것으로 미뤄 군 관련 의제가 주요하게 다뤄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7월 27일 6·25전쟁 휴전일(북한은 전승기념절로 기념) 60주년을 맞아 양국 관계를 돈독히 하는 논의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최룡해는 김정은 집권 이후 진행된 북-중 인사교류 가운데 최고위 군부인사다. '김정은의 특사'라는 공식 타이틀도 부여받았다.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도 지난해 8월 중국을 방문했지만 특사자격은 부여되지 않았다. 그는 '조(북)중 공동지도위원회 대표단' 단장 자격이었다. 한국 정부 당국자는 "장성택이나 김양건 노동당 비서는 '돈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이지 정상급 외교를 하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과거 김정일 방중 선례에 비춰볼 때 중국은 최룡해 같은 정상급 특사에게 대규모 경제지원 선물을 들려서 보낼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북-미 관계에서도 군부 특사 카드를 활용한 바 있다. 2000년 10월 조명록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김정일 특사 자격으로 미국에 파견한 것이다. 조명록은 군복 차림으로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김정일의 친서를 전달했으며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과 회담한 뒤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발표했다.
●북한, 일본과 교섭 시작 후 중국으로 확대
북한 전체 대외무역액의 90%(한국 제외)가 중국을 통해 이뤄진다. 생명선인 원유는 거의 전적으로 중국에 의존한다.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미국도 북-미 대화에 흥미를 잃은 상황에서 북한이 기댈 곳은 중국밖에 없다. 이달 중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특사인 이지마 이사오(飯島勳) 특명 담당 내각관방 참여(총리자문역)가 전격 방북했지만 북한이 일본을 통해 현재의 교착국면을 타개하기는 시간도 부족하고 역부족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국제사회의 관심은 그 동안 중국의 경고에 귀를 닫고 있던 북한이 특사 방문을 계기로 대외기조에 변화를 줄 것이냐는 점이다. 중국은 지난해 11월 시진핑-리커창(李克强) 체제 출범 직후 리젠궈(李建國) 전인대 부위원장을 북한에 보내 도발중단을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은 장거리미사일 발사, 3차 핵실험을 예정대로 단행됐고 이후 중국은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지 말라"(시 주석), "한반도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것은 돌로 제 발등을 찍는 것"(리 총리) 등 최고 지도자가 직접 북한을 공개 비판했다. 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 제재결의 적극 이행 지시 △통관절차 대폭 강화 △조선무역은행에 대한 미국의 단독 제재에 참가 등으로 대북 압박 수위를 이례적으로 높여왔다. 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국제고립이 가중되는 북한으로서는 더 이상 중국과 관계가 악화되도록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 북한과 논의결과 토대로 한미와 협의 나설 듯
이번 특사 파견이 북한의 요청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북-중 양국의 대화분위기를 진단하는 한 요소가 된다. 그동안 북-중 양국은 누가 먼저 특사를 파견할 것인지를 두고 기싸움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북한의 이번 특사는 태도변화의 신호탄 아니냐는 기대 섞인 전망이 나오는 것이다. 시진핑 주석이 북-중 논의 결과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전하고 이를 다시 한미, 한중 양국이 논의하는 식의 선순환 협의가 이어질 수 있다.
전성훈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최룡해의 방중을 계기로 한반도가 사실상의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라며 "북-중, 미-중, 한중 간 양자 논의가 사실상 4자의 형식으로 맞물리게 되는 만큼 향후 남북미중의 4자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 개성공단 정상화를 비롯한 남북관계 개선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이 중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일본과의 관계도 개선한다면 한국의 대북 지렛대는 그만큼 약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일본 정부는 22일 북한에 일본인 납북자 문제 해결을 통해 양국간 수교를 도모하자는 내용의 담화까지 발표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후루야 게이지(古屋圭司) 공안위원장 겸 납치문제담당상은 제2차 북일 정상회담(2004년) 9주년인 이날 담화에서 "북한이 납치 피해자 전원의 귀환을 실현하고 북-일 관계 재구축을 향한 역사적 대국적 견지의 올바른 결단을 할 것을 강력히 기대한다"고 밝혔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이날 '납치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 가운데 지난해 11월 중단된 북한과의 정부간 회담도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당연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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