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해제 MB5년]<10>‘원 포인트’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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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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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찾은 정운찬 “朴대표에 세종시-대권 빅딜 제안하시죠”

정운찬 국무총리(왼쪽)와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오른쪽)가 2010년 1월 21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충청향우회 중앙회 정기총회 및 신년교례회에 참석해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정종택 충청향우회 총재(가운데)의 권유로 억지로 손을 잡았지만 정운찬의 세종시 수정 드라이브에 반대해 온 이회창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가득하다. 동아일보DB
정운찬 국무총리(왼쪽)와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오른쪽)가 2010년 1월 21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충청향우회 중앙회 정기총회 및 신년교례회에 참석해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정종택 충청향우회 총재(가운데)의 권유로 억지로 손을 잡았지만 정운찬의 세종시 수정 드라이브에 반대해 온 이회창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가득하다. 동아일보DB
“어디 있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좀 찾아서 정 실장에게 모시고 가.”

2009년 9월 1일 밤. 곽승준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MB)의 전화를 받는다. 좀 급한 목소리였다. 곽승준은 ‘본업’인 미래기획 외에 핵심 측근으로서 MB의 ‘하명 임무’도 종종 수행했다. MB는 보스이기 전에 부친(곽삼영 전 고려산업개발 회장)의 현대건설 직장 상사. 학생 시절엔 ‘이명박 아저씨’가 “공부 열심히 하라”며 용돈도 줬다.

곽승준은 수소문 끝에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음식점에 있던 정운찬을 찾아 자기 승용차에 태웠다. 곽승준은 그 전에도 몇 차례 정운찬을 만나 ‘MB가 함께 일하고 싶어한다’는 뜻을 전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정정길 대통령실장 관저까지는 30여 분. 이 자리에서 ‘차기 국무총리를 맡아 달라’는 MB의 메시지가 전달됐다. 사실 MB는 한승수 총리 후임으로 충남지사를 지낸 심대평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목표는 하나. 심대평을 활용해 충청권 민심을 돌려 세종시 계획을 수정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심대평 카드가 무산되면서 고민 끝에 같은 충청권 출신인 정운찬을 골랐다. 세종시 수정에다 2009년부터 내세운 ‘친서민 중도실용’ 노선에도 적합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정정길은 관저에서 정운찬에게 세종시와 4대강 사업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정운찬은 ‘세종시 계획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취지로 답했고, 곧 정정길은 MB의 뜻이라며 총리직을 공식 제안했다. 정운찬은 이틀 뒤인 9월 3일 MB와 만난 뒤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였던 정운찬은 그날 오후 자신이 맡고 있던 ‘경제학연습2’의 마지막 강의를 하러 학교를 찾았다. 떠나기 전 박형준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등 청와대 참모들을 만났다.

정운찬=“학교 가면 기자들이 와 있을 텐데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참모들=“사진 찍고 질문 한두 개 받으시죠.”

청와대 참모들의 조언대로 정운찬은 마지막 수업 후 기자회견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종시에 대한 질문이 나왔고 정운찬은 그냥 편하게 정정길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행정복합도시는 경제학자인 내 눈에 효율적 계획은 아니다. 원점으로 돌리기는 어렵겠지만 원안대로 다 한다고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정운찬의 회견을 TV로 지켜보던 청와대는 ‘정운찬, 세종시 수정안 추진’이라는 속보가 뜨자 아연실색했다. 은밀하고 긴 호흡으로 추진해도 될까 말까한 사안인데, 정운찬이 너무 일찍 터뜨린 것이다. 일종의 천기누설이었다. 당시 특임장관인 주호영 새누리당 의원의 회고. “세종시 수정이 정운찬의 핵심 미션 중 하나였던 건 맞다. 그런데 이를 너무 일찍 공개하면서 일이 꼬이게 됐다. 무엇보다 정운찬 자신을 ‘세종시 총리’로 가두어버린 결과로 이어졌다.”

특히 세종시와 충청권이란 중원(中原)을 발판으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려던 한나라당 내 친박(친박근혜)들의 반발이 거셌다. 친박의 눈에는 누가 봐도 정운찬을 활용한 MB의 ‘박근혜 흔들기’였다. 하지만 어차피 알려진 거, 청와대도 세종시 수정안 추진을 부인할 생각이 없었다. 친박들 사이에선 MB가 세종시 수정을 고리로 정운찬을 박근혜 대항마로 키우려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총리 내정 발표 전 이동관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이 기자들에게 총리 후보들 중엔 대선 후보감이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도 친박들을 자극했다.

사실 친박들의 의구심이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MB가 오래전부터 정운찬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건 여권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실제로 MB는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2002년부터 정운찬에게 최소 5차례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2006년 오세훈 대신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라고 한 것을 시작으로 2007년 대선 경선에선 선거대책위원회에 합류하라고 제안했다. 대통령 당선 후엔 2008년 대통령직인수위 멤버로 합류하라고, 18대 총선에선 한나라당 간판으로 출마하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비교적 빨리 극복하며 지지율을 회복한 MB는 세종시 문제에 자신이 있었다. 정운찬을 전면에 내세워 충청권 민심을 돌리면 박근혜도 어쩔 수 없이 세종시 수정에 찬성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런 MB는 정운찬 주호영 박형준 등을 수시로 충청권으로 보내 여론전을 펴고, 동시에 세종시에 대기업 투자를 추진했다. 대기업 접촉은 박재완 대통령국정기획수석비서관이 주로 맡았다. 특히 삼성이 관건이었다. 박재완은 학생 시절 하숙을 같이 했던 장충기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을 채널 삼아 삼성의 대대적인 투자를 이끌어내려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박근혜도 세종시 문제만큼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2009년 10월 23일엔 정부의 세종시 수정 추진에 반대 의사를 공식 표명하며 MB에 정면 대응키로 한다. 박근혜의 ‘세종시 원안 사수 투쟁’이 충청권 여론에 미치는 영향은 청와대의 예상보다 컸다. MB가 그해 11월 27일 TV로 생중계된 ‘국민과의 대화’에서 세종시 원안 파기를 사과하면서까지 수정 의사를 밝혔지만 박근혜가 가세한 충청권 민심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한 MB 정부는 충청권 민심을 사기 위해 이례적으로 심리전까지 벌였다. 주호영이 이끄는 특임장관실은 연세대 황상민 심리학과 교수에게 세종시 문제에 대한 충청권의 민심을 분석해 달라고 의뢰했다. 황 교수 연구팀은 충청권 성인 남녀 60명을 심층 조사한 끝에 세종시 문제에 대해 이들이 ‘몰락한 양반 심리’를 갖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집안이 몰락해 변변한 살림은 없지만 자존심 하나는 세다. 그런데 집 앞에 MB가 ‘세종시 수정안’이라는 선물을 놓고 갔다. 하지만 양반 체면에 이를 냉큼 받을 수는 없는 법. 대신 누군가 선물을 집 안으로 밀어 넣어주길 내심 기대하고 있다는 게 황 교수팀의 분석 결과였다.

이에 고무된 청와대는 해를 넘겨도 세종시 수정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2010년 1월에 나온 게 정부 부처를 대거 옮기는 대신 삼성그룹의 2조500억 원을 비롯해 모두 4조5000억 원 규모의 기업 투자를 유치하겠다는 내용의 세종시 수정안이었다. 그러나 충청권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정운찬을 앞세워→경제적 유인책으로 충청권 민심을 움직이면→박근혜도 흔들리고→자연스레 세종시 수정을 추진할 수 있다는 청와대의 시나리오가 통째로 흔들린 것이다.

2012년 1월 4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인 신년인사회’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김황식 총리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왼쪽의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복잡한 표정으로 박 위원장을 쳐다보고 있다. 동아일보DB
2012년 1월 4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인 신년인사회’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김황식 총리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왼쪽의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복잡한 표정으로 박 위원장을 쳐다보고 있다. 동아일보DB
MB와 청와대 참모들은 결국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려면 박근혜를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현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처음에도 그런 얘기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2010년 1월 말. MB는 집무실로 참모 몇 명을 불렀다.

“안 되겠다. 박(근혜) 대표를 누가 좀 직접 만나야겠다.”

MB는 핵심 참모 B 씨를 박근혜에게 직접 보냈다.

B 씨=“대표님. 대통령님께서 세종시 문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박근혜=“세종시 문제라면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때보다 싸늘한 답변이었다. 더 말을 이어가기도 어려웠다. B 씨는 박근혜에게 “세종시 문제가 아니라도 좋으니 양측의 핫라인이라도 만들자”고 요청했고,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표 시절 자신의 비서실장을 지낸 유정복(현 안전행정부 장관)을 대리인으로 지명했다. 하지만 이 핫라인도 개설 후 제대로 작동할 기회조차 없었다.

B 씨로부터 박근혜와의 면담 보고를 받은 MB는 불쾌했다. MB는 그 직후 이런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2010년 2월 9일 충청북도의 업무보고를 받던 중 “잘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치고 다시 싸운다. 강도가 왔는데도 너 죽고 나 죽자 하면 둘 다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박근혜는 다음 날 기자들에게 “집 안에 있는 한 사람이 마음이 변해가지고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반박했다. 듣기에 따라선 대선 공약인 세종시 원안을 파기한 MB가 강도라는 논리였다. 이에 흥분한 이동관은 기자들 앞에서 평소 붙여주던 ‘(전)대표’라는 호칭을 뗀 채 “박근혜 의원은 최소한 대통령에 대한 기본 예의를 지켜야 한다”며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보다 못한 정운찬이 MB를 찾아갔다.

정운찬=“친박 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하시면 돌아서지 않겠습니까?”

MB=“나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은 안 합니다, 못 합니다.”

정운찬=“박근혜 대표를 직접 만나서 도와달라고 하시죠.”

MB=“아니, 저렇게 반대하는데 어떻게 도와달라고 해요.”

정운찬=“(세종시 수정안 도와주면) 차기 대통령 되는 데 도와준다고 하시면 어떻습니까?”

MB는 이 말을 듣고 꽤 ‘심각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운찬 본인은 여전히 이 대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다”며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다만 주변에선 MB가 정운찬에게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거나 그를 심하게 질책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당시 청와대 참모 C 씨. “MB가 정운찬을 총리로 고른 것은 세종시 수정 외에 차기 대선 구도도 감안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정운찬이 MB에게 ‘박근혜에게 차기를 도와주겠다고 해라’고 했으니 나 같아도 심경이 복잡했을 것이다.”

결국 정운찬을 앞세워 세종시 원안 수정을 추진하려던 MB의 계획은 결과적으로 ‘헛다리 짚는 격’이 되고 말았다. 정운찬은 그해 6·2지방선거에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동시 실시하자고 주장했지만 정부 내에서도 소수론에 그쳤다. 정운찬도 막판에는 주변에 “국민투표를 했다가 충청권만 고립되면 내가 매향노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고 토로하며 고집을 접었다.

박근혜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 세종시 수정안은 2010년 6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예상대로 부결됐다. 정운찬은 이날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근혜가 수정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정운찬의 증언.

“사실 (정치인으로서) 박근혜 대표의 양심을 믿었다. 설마 수정안 표결할 때 반대할까 생각했다. 나중에 보니 내가 순진했다. (표결에 들어가기 전 MB와) 타협이 이뤄질 거로 생각했다….”

고심 끝에 MB와 한 배를 탔던 정운찬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세종시 총리’라는 실패한 꼬리표만 단 채 그해 8월 11일 총리직에서 물러나며 급속히 MB와 멀어져갔다. 그런 정운찬은 2012년 대선에선 문재인을 지지했다.

떠나간 정운찬 대신 MB에겐 레임덕의 그림자가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한나라당도 ‘친박 당’으로 변신해가기 시작했다. MB는 이후 세종시를 한 번도 찾지 않다가 퇴임 직전인 2013년 1월 15일 세종시를 쓱 둘러보고 왔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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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박근혜#정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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