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최모 씨(26·여)는 지난해 1월 친한 탈북자 황모 씨(31·여)에게서 솔깃한 얘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수천만 원의 대출을 받은 뒤 벨기에로 망명하면 돈을 갚지 않아도 되는 데다 난민지원금까지 받으며 편히 살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한국에서의 대출은 페이퍼컴퍼니 직원인 것처럼 서류를 꾸미면 은행에서 쉽게 돈을 빌려준다고 했다.
당시 피부마사지숍에서 피부관리사 일을 하며 고된 일상을 보내던 최 씨는 목돈을 챙겨 유럽에서 새로운 삶을 찾기로 결심했다.
최 씨는 황 씨를 통해 탈북자이면서 A상사라는 회사의 대표인 박모 씨(32)를 소개받았다. A상사는 박 씨가 사기대출 알선업자인 이모 씨(44)를 통해 2011년 12월 만든 서류상의 회사였다. 두 사람은 이 회사에 탈북자들이 취업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 은행에서 대출을 받게 해주고 신용카드도 발급받게 해줬다.
최 씨도 월급 140만 원을 받는 A상사 직원으로 신분세탁이 됐다. 재직증명서와 허위 근로소득 원천징수확인서도 받았다. 최 씨는 이 서류를 들고 한 은행에서 1700만 원을 빌려 대출금의 30%인 500여만 원을 수수료로 이 씨에게 건넸다. 또 이들 가짜 서류로 신용카드를 여러 장 발급받아 2500만 원가량을 헤프게 썼다.
최 씨는 지난해 4월 관광비자로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파리 샤를드골 국제공항엔 현지 브로커 B 씨가 나와 있었다. 최 씨는 B 씨에게 300만 원의 알선료를 건네고 벨기에행 열차를 탔다. 벨기에에 도착해선 B 씨로부터 이민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는 면접 기술을 배웠다. 그러고는 벨기에 이민국에서 가짜 이름을 대며 “북한에서 온 난민”이라고 망명 신고를 했다.
벨기에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으려면 세 차례에 걸친 면접을 통과해야 했다. 최 씨는 1차 면접을 한 뒤 두려워졌다. 면접을 모두 통과할지도 불확실한 데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최 씨는 지난해 7월 귀국했다.
이 같은 사실은 최 씨가 2월 자신의 거주지 관할인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담당 형사와 다른 일로 상담을 하다 털어놓으면서 드러났다.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위조 서류로 대출을 받고 망명을 시도한 혐의(사기)로 최 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2011년 12월부터 탈북자 대출 사기 망명을 주도한 A상사 대표 박 씨는 부인과 함께 지난해 5월 벨기에로 망명했다. 경찰은 이들을 인터폴을 통해 지명 수배했다고 5일 밝혔다. 또한 위조 서류를 만들어 불법대출을 알선한 혐의(사문서 위조 등)로 이 씨를 구속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 씨와 박 씨 일당이 6개월여에 걸쳐 불법대출과 해외 망명을 알선한 탈북자가 2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며 “인터폴과 공조해 이들의 현황을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순간의 유혹에 끌려 거액을 빌린 뒤 망명한 탈북자들이 자칫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국제 미아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이 제3국으로 망명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적응하지 못하는 탈북자들 사이에서 ‘한국 탈출’이 유행처럼 번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탈북자는 말조차 통하지 않는 외국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2003년 탈북한 C 씨(54)는 2007년 8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C 씨 가족은 탈북 후 바로 영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꾸며 난민 자격을 인정받아 탈북자들이 모여 사는 런던 인근 뉴몰던에 정착했다. C 씨 가족은 브로커가 “영국은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사람들에게 매달 800파운드(137여만 원) 상당의 생활비를 제공하고 의료와 교육을 무상 지원한다”고 해 기대에 들떠 영국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브로커는 영국이 일정 기간마다 난민자격 재심사를 해 정규직 일자리를 얻어 일정한 소득이 생기는 난민은 자격을 소멸시켜 지원금을 끊는다는 사실은 얘기해주지 않았다. 난민이 영주권을 얻으려면 10년 이상 거주해야 한다는 사실도 숨겼다. 결국 C 씨 가족은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한 채 청소 접시닦이 등 허드렛일을 전전하다 4년 만에 한국으로 쓸쓸히 돌아왔다. C 씨는 동아일보 기자에게 “아무리 지원금이 좋다 해도 말이 통하는 한국이 최고라는 걸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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