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완 국정기획수석비서관은 눈물을 흘렸다. “대과(大過)를 남기고 떠나게 돼 죄송하다. 역사의 죄인이다.”
2010년 7월 16일, 박재완을 비롯한 이명박(MB) 대통령실의 2기 참모들은 그렇게 떠나갔다. ‘대과’는 보름여 전 국회 본회의에서 최종 사망 선고를 받은 세종시 수정안이었다. 정식 안건 명칭은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 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 전부 개정안’. 법안 이름만큼이나 길고, 복잡다단했던 세종시 수정안 파동이었다. 자리(국정기획수석)도 그랬지만, 세종시 수정안에 관한 한 박재완은 정운찬 국무총리 못지않게 ‘전사(戰士)’를 자임했었다.
MB도 잠자리에 들었다가 한밤중에 혼자 일어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는 참모들에게 세종시 원안 수정을 ‘대통령의 양심’에 관한 문제라고 토로했다. 당시 메시지 기획관을 맡고 있던 김두우는 “대통령을 모시는 동안 그런 표현을 사용하며 고민을 토로한 건 세종시 수정안 파동 때뿐이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임기는 반환점을 돌고 있었다. 먼저 정정길 대통령실장 체제의 청와대 참모들을 교체했다. 신임 임태희 실장을 불렀다.
MB=“정무수석은 누가 좋겠어?”
임태희=“정진석 의원이 어떻습니까?”
MB=“정진석은 박근혜 (전) 대표와 가까운 것 아냐?”
임태희=“지금으로선 정진석이 제일 낫습니다. 충청도 출신(충남 공주)이고, 세종시 수정안에도 반대표를 던져 앞으로 친박(친박근혜) 의원들을 접촉하는 데도 적임입니다.”
MB=“박근혜 대표와 상의해봐.”
임태희=“지금 당정청(黨政靑)이 서로 어려운 건 박근혜 대표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정권재창출을 위해서는 두 분이 협력하셔야 합니다. (대통령의) 의중을 그쪽에 전해줘야 합니다. 그런 얘기를 박 대표에게 전해도 되겠습니까?”
MB=“그렇게 해.”
세종시 수정안 파동을 전후해 친이(친이명박)와 친박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친이 내부에서는 갈라서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
임태희는 곧바로 박근혜를 찾아갔다.
임태희=“대통령께서 정무수석 자리에 누굴 앉힐지 고심하고 계십니다. 대표님께서 적임자를 한 명 천거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박근혜=“그건 대통령의 고유권한이지 않습니까?”
임태희=“(박근혜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곧바로) 정진석 의원이 어떻겠습니까?”
박근혜=“정 의원님이 (수락)하시겠어요?”
임태희=“지금으로선 당내 문제를 수습할 수 있는 적임자입니다. 설득을 해서라도 맡아 달라고 하겠습니다.”
박근혜=“그러면 저야 좋죠….”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MB는 7월 13일 정책실장(백용호) 사회통합수석(박인주) 대변인(김희정)과 함께 정진석을 정무수석비서관으로 내정한다.
며칠 뒤 정무수석 내정자로 MB를 면담하는 날, 정진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내 임무가 뭐냐”고 물었다. MB로부터 내심 기대하는 대답이 있었고, 다짐을 받고 싶은 얘기도 있었다.
정진석=“이 시점에서 저에게 정무수석 자리를 맡기는 뜻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MB=“당신은 아버지(정석모 전 민정당 사무총장·내무장관) 때부터 정치를 봐왔잖아. 그리고 지금 3선이고…. 정권재창출이 중요해서 당신한테 맡아 달라고 한 거야.”
정진석=“그럼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표를 던진 사람입니다만, 지금 당내 사정이 너무 복잡합니다. 당이 쪼개질 수 있습니다. 이건 실제 상황입니다. 박근혜 대표를 만나야 합니다. 세종시 문제를 둘러싼 갈등도 두 분이 만나서 해결해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MB=“….”
MB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분당(分黨) 위기까지 거론되는 당내 상황을 수습하고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서는 박근혜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안다. 하지만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았다. 정진석은 “박 대표에 대한 MB의 거부감은 진짜 컸다. 폐쇄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강했다”고 기억했다. 그래서 단둘이 만나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선뜻 답을 주지 못한 것이다.
정진석은 그래도 틈만 나면 박근혜를 만나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던 어느 날, MB로부터 사인이 왔다. “어떻게 하면 돼?”
정진석은 콜롬비아 대통령 취임식 특사안(案)을 준비했다. 박근혜는 2008년 1월에는 이명박 당선인의 특사로 중국을 다녀왔고, 2009년 9월엔 대통령 특사로 유럽연합(EU)과 헝가리, 덴마크를 순방하고 돌아와 MB를 만난 적이 있었다. 콜롬비아 특사단의 출국일은 8월 6, 7일경으로 잡혔다.
정진석이 은밀하게 추진하던 ‘박근혜 콜롬비아 특사안’은 그즈음 동아일보 취재팀에 포착됐다. 그러나 정진석은 “동아일보 보도는 오보”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공교롭게 박근혜도 “8월엔 어머니 제사도 있고 해서 못 나간다”고 난색을 표했다. 현재 국회 사무총장으로 재직 중인 정진석은 “그 당시 박 대표의 일정 때문에 결국 콜롬비아 특사안이 무산되긴 했지만 동아일보 특종을 ‘오보’라고 부인한 건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8월 19일 박근혜로부터 갑자기 전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이틀 뒤 전격적으로 MB와 박근혜의 회동이 성사된다. 정진석은 국무회의 때 자주 만나는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현 새누리당 원내대표), 유정복 농림수산식품부 장관(현 안전행정부 장관)에게도 함구했다. 유정복은 두 번이나 박근혜의 비서실장을 지낸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그래도 정진석은 박근혜와 직접 연락을 주고받았다. 박근혜의 ‘보안 의식’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MB와 박근혜의 ‘8·21 회동’은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뿐 아니라 한나라당의 정권재창출 가도(街道)에서 분수령으로 칠 만한 사건이었다.
정진석은 MB에게 건의해 회동 결과 발표도 박근혜 쪽에서 하도록 했다. 발표는 역시 ‘대변인’ 역할을 해온 이정현 의원(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의 몫이었다. 정진석은 이정현의 발표를 모니터링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는 오늘 청와대에서 단독 오찬회동을 갖고 한나라당의 정권재창출을 위해 협력하기로….”
이정현의 발표문 첫 줄을 듣는 순간 정진석은 아차 싶었다. 급히 이정현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건 안 된다. ‘이명박 정부의 성공과 정권재창출을 위해 협력한다’고 해야지 정권재창출만 얘기하고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위해 협력한다는 말을 빼버리면 대통령은 뭐가 되느냐?”
발표문은 현장에서 즉각 수정됐지만, 이튿날 조간신문의 헤드라인은 일제히 ‘MB-박근혜 정권재창출 함께 노력’으로 뽑혔다. 핵심은 역시 그것이었다. 물론 친박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의원총회에서 MB를 칭송했고, 연말 예산국회도 협력모드로 임했다.
협력모드는 이듬해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2011년 초, 이정현은 정진석에게 ‘민원 아닌 민원’을 넣는다. “박 대표가 외국 나간 지 2년이 다 돼간다. 기자들도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정진석은 한편으론 특사 구상을 하면서, 또 한편으론 MB의 기분이 좋을 때를 기다렸다. 박근혜를 꼭 만나야 할 ‘이유’가 딱히 없으니 기분 좋을 때 얘기를 꺼내자는 심산이었다.
기회가 왔다. MB는 3월 6일 임태희 대통령실장, 정진석 정무수석, 홍상표 홍보수석, 김인종 경호처장을 대동하고 수원 아주대병원을 찾아 석해균 선장을 병문안했다. MB는 ‘아덴 만의 영웅’인 석 선장의 귀국 작전을 직접 지휘하다시피 했었다. 대통령 주치의를 청와대로 불러 아덴 만 현지에서 석 선장의 총상 치료를 지켜보던 이국종 아주대 응급의학과 교수와 통화하게 한 뒤 ‘귀국 후 치료’ 결정을 내린 것도 MB였다.
병문안을 마친 MB는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남산숯불갈비나 가지!” 대선 때 참모들과 자주 들렀던 곳이었다. 마이크로버스의 대통령 뒷자리에 앉아 있던 정진석은 ‘이때다’ 싶었다.
정진석=“박근혜 대표와 회동하신 지도 오래됐는데 다시 한번 만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MB=“그러지 뭐. (방법을) 한번 알아봐.”
정진석=“특사 형식이 좋겠습니다.”
MB=“그럼 외교안보수석하고 상의해봐.”
마침 유럽엔 수교 50주년이 되는 나라들이 꽤 있었다. 정진석은 외교통상부에 “여왕이 있는 나라도 포함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포르투갈, 그리스와 함께 베아트릭스 여왕이 있는 네덜란드가 박근혜의 유럽 순방국에 포함됐다.
그런데 박근혜의 유럽 순방 일정이 논의되고 있던 3월 말, MB와 박근혜 사이엔 또 하나의 전선(戰線)이 형성된다. 동남권 신공항 문제였다. 동남권 신공항 건설은 MB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정부가 신공항 건설 백지화 방침을 발표하자 박근혜는 3월 31일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민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라며 말 그대로 ‘돌직구’를 날렸다.
다음 날인 4월 1일엔 MB의 대국민 기자회견이 잡혀 있었다. MB는 회견문 독회를 위한 참모회의에 이동관 언론특보와 박형준 사회특보까지 불렀다. 이동관은 이 자리에서 박근혜의 대구 발언에 대해 “대구 방문 시점이나 발언 내용이 누가 봐도 대통령을 비난한 것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임태희는 “박 대표 쪽에서 대구 방문을 앞두고 사전에 대통령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가 있었고 대구 발언 직후에도 대통령을 겨냥한 발언이 아니라는 취지의 해명을 해왔다”고 보고했다. 이동관은 “물론 우리도 판을 깨서는 안 되고 정권재창출을 해야 한다. 하지만 뽕잎 떨어지면 가을 오는 것을 알아야 하듯 상황 파악을 잘해야 한다”고 거듭 불만을 표시했다.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던 MB도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 날 MB는 기자회견장에서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에 대해 “신공항을 공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지역주민들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하지만 10조∼20조 원을 투자해서 매년 적자를 본다면 어려움이 있다. 책임은 모두 저에게 있다”고 사과했다. 기자들이 박근혜의 비판에 대한 생각을 묻자 MB는 “박 대표와의 관계를 너무 그렇게 보실 필요가 없다. 선의로 보는 게 좋다. 지역구인 고향에 내려가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을 이해한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것도 아마 이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MB의 대답은 부드러웠다. 진심이었을까?
당시 대통령실 기획관리실장을 맡고 있던 김두우는 이렇게 말했다. “그게 본심이었겠느냐? 갈등을 더 촉발시켜서는 안 되니까 ‘(박 대표가) 대선 생각해서 그런다는 걸 안다’고 한 수 위로 대답한 것일 뿐이지….”
하긴 이동관인들 MB의 그런 속내를 몰랐겠는가. 참모들은 각자 역할이 있는 법이다. 이동관마저 면전에서 “판을 깨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면 MB는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전선은 확대되지 않았고, 박근혜는 4월 말 예정대로 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박근혜의 유럽 순방은 거의 ‘대통령급’이었다. 동행취재를 신청한 신문 방송사도 24개사나 됐다. 2009년 9월 EU 방문 때는 겨우 2개사가 따라갔을 뿐이었는데….
이제 한나라당은 명실상부한 ‘박근혜 당’이었다.
MB는 유럽 순방을 마친 박근혜와 오찬 회동을 한 직후 정진석 정무수석, 홍상표 홍보수석을 각각 김효재, 김두우로 교체한다. 박근혜에게는 “정무수석을 교체하더라도 앞으로 연락할 일이 있으면 정진석을 통해 하겠다”라고 미리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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