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국방위, 당국간 고위급회담 제의 “비핵화는 유훈… 美 핵위협도 종식을”
백악관 “말 아닌 행동 보고 판단할것”
일본 중국 한국을 돌고 돌아 북한의 대화 타깃은 결국 다시 미국이었다. 북한은 16일 미국에 북-미 당국 간 고위급회담 개최를 전격 제안했다. 11일 남북 당국회담이 무산된 지 닷새 만이다.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은 이날 중대담화를 통해 “조선반도(한반도)의 긴장국면을 해소하고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이룩하기 위해 조미(북-미) 당국 사이에 고위급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국방위는 북-미 회담의 의제와 관련해 “군사적 긴장상태의 완화 문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문제, 미국이 내놓은 ‘핵 없는 세계 건설’ 문제를 포함해 쌍방이 원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폭넓고 진지하게 협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회담 장소와 시일에 대해서는 “미국이 편리한 대로 정하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방위는 이날 북-미 회담을 제안하면서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우리 수령님(김일성 주석)과 우리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이며 우리 당과 국가와 천만군민이 반드시 실현하여야 할 정책적 과제”라고 밝혔다. 북한이 비핵화가 김일성과 김정일의 유훈이라고 대외적으로 발표한 것은 김정은 체제의 공식 출범(지난해 4월) 이후 처음이다.
그러나 국방위는 “우리의 비핵화는 남조선을 포함한 조선반도 전역의 비핵화이며 우리에 대한 미국의 핵위협을 완전히 종식시킬 것을 목표로 내세운 가장 철저한 비핵화”라고 주장했다. 이어 “핵보유국으로서의 우리의 당당한 지위는 한반도 비핵화가 실현되고 외부의 핵위협이 완전히 종식될 때까지 추호의 흔들림 없이 유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이 주장하는 ‘비핵화’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토대 위에서 미국과의 ‘핵 군축 회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힌다. 국방위가 미국을 향해 “전제조건을 내세운 대화와 접촉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북한만의 비핵화’로 의제를 국한하면 안 된다는 취지다.
미국은 이에 대해 북한이 비핵화를 준수하겠다는 행동을 먼저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케이틀린 헤이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이날 “미국은 대화를 선호하며, 북한과 대화 라인을 열어놓고 있다”면서도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에 다다를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협상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러려면 북한이 유엔 결의안 등 국제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 우리는 북한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북-미 간 대화나 협상이 진행되려면 북한이 진정성 있는 행동을 먼저 보여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해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 北, 日→中→韓→美 ‘릴레이 노크’… 核 명분쌓기용 찔러보기 ▼
북한은 미국에 고위급회담을 제안하면서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의 중단 등 국제사회가 요구해온 의무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 ‘비핵화 유훈’으로 포장한 북한의 다목적 포석
북한은 오히려 미국에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미국과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담보하는 데 진실과 관심이 있다면 전제조건을 내세우지 말라”는 식의 훈계조로 일관했다. 최소한 지난해 2·29합의 때의 조건을 충족해야 북한과 대화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 있다는 미국의 기본 입장을 정면으로 무시한 것이다. 2·29합의는 미국이 북한에 24만 t 규모의 영양(식량) 지원을 하고 이에 호응해 북한은 △장거리로켓 발사와 핵실험의 모라토리엄(유예) △영변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중단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복귀 등 비핵화 사전조치를 한다는 내용이다.
미국은 자국 내 대북 강경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도출했던 2·29합의가 같은 해 4월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로 어이없이 깨진 이후 어느 때보다 북한에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미국 측 6자회담 대표인 글린 데이비스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14일(현지 시간) 경남대와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워싱턴에서 공동 주최한 ‘제4차 워싱턴포럼’에서 “미국은 실질적인 문제인 북한 핵 프로그램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를 원한다”며 북-미 대화의 의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했다.
북한이 12일 예정됐던 남북 당국회담을 하루 전날 무산시킨 뒤 16일 미국에 대화를 제의한 것을 두고 ‘통미봉남(通美封南)’ 시도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한중 정상회담(27일)을 앞둔 시점이라는 점에서 한미중의 3각 협력을 흔들려는 의도라는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북-미 대화에 앞서 남북 대화를 하라는 것이 미국이 북한에 해온 요구였다”며 “북한이 남북 대화를 건너뛰고 미국을 상대하려는 것은 현재 한미 간의 긴밀한 공조 속에서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북한이 이날 지난해 4월 개정헌법에 핵보유국임을 천명한 이후 1년 넘게 꺼내지 않던 ‘유훈’ 언급을 다시 꺼내 든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그러나 북한은 그 조건으로 “미국의 핵위협부터 종식하라”고 요구했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밝힌 ‘핵 없는 세계 건설’까지 거론하며 미국을 압박했다. 특히 “우리의 핵 보유는 조선반도(한반도) 비핵화 실현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기존의 궤변도 되풀이했다.
의제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핵 문제보다 평화체제 이슈를 앞세웠다. 결국 핵개발 관련 의제는 군축 및 비확산 회담의 성격으로 논의하면서 평화체제 협상에 집중해 체제 보장을 받아내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셈이다.
○ 노골적 대화공세의 종착점은 어디?
북한은 북-미 회담 제의를 거부당하더라도 최근 보여 온 일련의 대화공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북한이 위협과 도발 이후 대화공세를 펼 것이라는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다”며 “이런 대화공세는 당분간 더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 북한은 최근 ‘도발과 위협 후 대화’라는 기존 패턴을 반복하며 고립 국면에서 탈피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북한은 지난달 일본 이지마 이사오(飯島勳) 내각관방참여(총리 자문역)의 방북을 받아들였다. 이후 북한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특사 자격으로 중국에 파견해 “주변국들과 대화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6일 한국 정부에도 포괄적인 의제들을 백화점식으로 나열하며 남북 당국 간 회담을 전격 제의했다. 북한은 조만간 러시아에도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등을 특사로 보내 북-러시아 고위급회담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김정은의 특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이 밖에 30일부터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도 외교적 대화공세를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자리에서 남북 외교장관 회담이 성사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그러나 정부 일각에서는 “북한이 ‘대화를 위한 대화’를 제안한 뒤 성사되지 않으면 ‘우리의 대화 시도가 거부당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다시 도발과 위협 국면으로 전환할 가능성은 언제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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