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3일 오후, 이상득(SD) 새누리당 의원은 정정길 대통령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정정길은 동생(이명박 대통령·MB)과 사적으로는 오랜 친구 사이였다. SD도 그런 정정길을 평소 편하게 대했다. 그런데 이날 SD의 목소리에는 노기(怒氣)까지 서려 있었다.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인 이동관이 이날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새 국무총리 후보자로 발표하기 직전 기자들에게 ‘일반론’임을 전제로 “(총리를 지내면) 대선후보 중 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 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SD가 우려한 것은 친박(친박근혜)들의 반응이었다. 친박의 시선으로는 MB가 정운찬을 활용해 ‘박근혜 흔들기’에 나선 모양새였다. 실제로 당시 MB 주변에선 차기 대선 구도에 대한 여러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SD의 이 같은 반응은 당시 친이(친이명박)계 내에서는 이례적이었다. 정정길은 이동관에게 SD의 반응을 전해주며 “오해를 풀어라”고 했고 그 자리에 있던 정인철 대통령기획관리비서관도 거들었다. 그러나 이동관은 그러지 않았다.
여하튼 MB는 2008년 성공적으로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면서 국정 운영의 자신감을 되찾고 있었다. 이 기세를 몰아 박근혜를 설득(또는 제압)해 세종시 수정안도 관철할 태세였다. 그런데 SD는 왜 그랬을까?
2009년 2월 21일 부산 서면 롯데호텔. SD는 김무성 허태열 서병수 등 친박계 의원들과 조찬 회동을 했다. 안경률 김정훈 등 친이계 의원들도 함께했다. SD 측은 이례적으로 언론에 회동 일정을 흘렸다. 그만큼 이 장면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SD는 식사 전 김무성 등에게 “당 밖에서는 ‘친이’다 ‘친박’이다 하며 걱정을 많이 하지만 내부적으론 다양한 견해가 있을 뿐 갈등의 소지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김무성에게 “원내대표 선거에 나서 봐라”고 제안했다.
당시 김무성이 기자들에게 한 얘기. “SD가 요즘 달라졌다. 그동안 우리 친박에 대해 반감이 많았는데, 사실 원래는 친박들 씨를 말려 죽이려고 했던 것 아니냐….” SD가 박근혜와 비밀 회동을 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박근혜가 명예훼손 혐의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며 반박하자 정정 보도를 내기는 했지만….
아무튼 김무성 원내대표 카드는 박근혜가 단칼에 거부하면서 없던 일이 됐지만 SD는 이후로도 친이계 내에서 유달리 박근혜와 친박계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2010년 6월 박근혜의 반대로 세종시 수정안이 무산된 이후 SD의 관심은 본격화됐다. 그러던 9월 초 어느 날. SD의 ‘정치적 양아들’로 통했던 한나라당 사무총장 원희룡에게 친박 핵심 인사 A씨가 이런 말을 전한다. 박근혜의 복심(腹心)으로 분류될 만한 사람이었다.
A=“지금 대선후보 중 MB 퇴임 후 MB와 SD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박근혜 (전) 대표뿐입니다.”
원희룡=“무슨 말씀이신지….”
A=“그럼 이렇게 말씀드릴까요. MB가 박 대표의 대선 행보를 방해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박 대표가 대선에서 진다고 해도 야당 대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당 대표’ 박근혜가 MB와 SD를 청문회에 세우지 말란 법도 없지 않습니까.”
MB 임기 후 문제까지 거론하며 잘 지내보자는 제안이었다. SD가 진작부터 박근혜에 공을 들인 것도 바로 이런 포인트를 염두에 두었다는 게 주변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SD는 비슷한 시기 경북지역 언론인들과의 모임에서 이런 말을 한다.
“한나라당에 가장 중요한 건 정권 재창출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전) 대표는 한나라당의 자산이다.”
이 정도면 박근혜로의 정권 재창출 필요성을 선언한 셈이다.
비슷한 시기 단행된 청와대 참모 인선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MB는 세종시 수정안 부결 직후인 2010년 7월 신임 대통령실장에 임태희를,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에는 정진석을 임명한다. 임태희와 정진석은 각각 친이계, 친박계로 분류되지만 동시에 SD계로도 분류되는 사람들이다. 사실상 SD계가 청와대 핵심을 장악하며 박근혜와 SD, 더 나아가 MB와 박근혜의 관계 개선에 나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SD가 ‘친박’을 자처하고 나선 데는 물론 ‘대안 부재론’이 결정적이었다. 동시에 SD와 박근혜의 TK(대구·경북)라는 지역적 끈, 기업인 출신인 SD의 ‘사업적 기질’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게 주변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SD는 2004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후폭풍과 ‘대선자금 차떼기 사건’으로 한나라당이 휘청거릴 때 박근혜와 ‘찰떡 콤비’를 이뤄 천막당사 신화를 만들어 낸 적이 있다. 당시 ‘남원정’(남경필 원희룡 정병국) 등 당내 소장파가 최병렬 대표를 끌어내리고 박근혜를 새 대표로 추대할 때 당 사무총장이던 SD가 천막당사 프로젝트를 주도한 것. SD는 서울시장이던 MB를 설득해 서울시와 천막당사 용지로 사용할 땅 임차 계약을 하고, 사무실로 쓸 컨테이너도 주도적으로 마련했다. 당시 천막당사 이전을 실무 지휘한 B 씨의 회고. “SD가 박근혜 대표의 지시를 받자마자 순식간에 일 처리를 마무리해 박 대표가 꽤 흡족해했다. 천막당사 용지가 여의도공원 내에서도 요지라 임차료가 비쌌는데 금액 문제도 SD가 조율하고 나섰다.”
기업인 출신으로 꼼꼼한 스타일도 영향을 미쳤다. 2004년 여름, 한나라당 사무처는 코오롱에 당 유니폼 제작을 의뢰했다. SD가 코오롱 사장을 지낸 만큼 좀 싸게 맞출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코오롱이 제안한 단가는 한 벌에 5만8000원. 이를 보고받은 SD는 “유니폼 점퍼 하나가 뭐 이리 비싸나”라고 역정을 내더니 동대문시장 내 가내수공업 공장에 한 벌에 1만9000원씩 제작을 맡기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통적 TK 정서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한다. MB-SD 형제의 핵심 측근인 C 씨의 증언. “SD는 MB 당선 직후부터 ‘다음 대통령은 박근혜’라고 생각했다. 바뀐 일이 거의 없다. ‘TK의 정권 재창출’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PK로의 정권 재창출에 대해서는 미묘한 거부감이 있었다.”
정두언 박형준 등 여권 내 소장파 그룹에서 2010년 8월 정운찬 국무총리의 후임으로 경남지사를 지낸 김태호를 강하게 천거한 데 대해서 SD가 불만을 토로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태호의 등장으로 차기 대선 구도가 흔들릴 수 있는 점을 눈여겨본 것이다. MB가 청문회에서 상처를 입은 김태호를 계속 쓸지 고민할 때, SD와 가까운 정진석이 김태호 카드를 버리자고 강하게 설득한 것도 이와 무관치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박근혜와 SD는 이런 ‘연대’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거나 내세우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확인된 둘만의 공식 회동도 없었다. 연대가 공공연히 알려지면 2012년 대선에서 야당이 내세웠던 ‘이명박근혜’ 정권 심판론의 근거만 제공하는 꼴이 될 게 자명한 일이었다. 2009년에 이어 2011년 4월 18일에도 SD가 서울 삼성동에서 박근혜와 전격 회동했다는 기사가 보도됐으나, 박근혜의 대변인 격이었던 이정현(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이례적으로 보도자료까지 내고 회동 사실을 다시 한 번 전면 부인했다.
이는 SD 쪽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물이 차면 배가 뜨는 법. MB는 어느덧 ‘박근혜 불가피론’으로 기울고 있었다.
2011년 1월 초. 신년 구상을 하던 MB가 곽승준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장 등 핵심 측근 몇 명을 청와대로 불렀다.
참모들=“일할 수 있는 시간은 올해가 사실상 마지막입니다.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MB=“그래. 그리고 무엇보다 정권 재창출이 중요하다. 지금 상황에선 다음은 박(근혜) (전) 대표밖에 없는 것 아니냐….”
SD가 2010년 9월에 했다는 말과 표현도 크게 다르지 않다.
SD의 선견지명 때문이었을까. 이후 MB-SD 형제와 박근혜는 더이상 크게 삐걱대지는 않았다. MB는 1987년 민주화 이후 탈당하지 않은 채 임기를 마무리한 첫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정작 SD는 저축은행으로부터 거액의 로비자금을 받은 혐의로 2012년 7월 전격 구속되는 추락을 맛봐야 했다. 2013년 1월 동생이 단행한 마지막 특별사면에서도 제외됐다.
어쩌면 SD의 ‘친박 행보’는, 정치를 잘 몰랐던 동생을 위해 형님이 짊어진 짐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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