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를 늘려 달라’는 청와대와 정부의 시그널이 이어지고 있지만 돈을 풀어야 할 기업들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4대 그룹의 상반기(1∼6월) 투자는 올해 연간 목표의 35%에 그쳤다.
새 정부 출범 직후인 4월 4일 30대 그룹 사장단이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만나 전년보다 7.7% 증가한 149조 원을 올해 설비 및 연구개발(R&D)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것과는 상당한 온도차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기업들은 새 정부 출범을 축하하는 뜻에서 신규 채용도 12만8000명으로 전년 채용 대비 1.5% 늘리기로 했다. 그러나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30대 그룹을 조사한 결과 4개 그룹은 올해 고용을 당초 계획보다 줄이겠다고 밝혔다.
○ “불황에 정책 불확실성 겹쳐”
국내 대기업 투자는 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정무적 판단’이 개입되는 일이 많다.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새 정부 출범 초기에는 투자 계획을 늘려 잡는 게 일반적이다. 증권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때도 집권 첫해 상반기 30대 그룹 계열사의 투자 공시 건수는 집권 중반기인 3년차 때보다 많았다.
하지만 올 상반기는 다르다. 극심한 불황이 계속되는 데다 경제민주화와 경제 활성화 사이에서 경제정책의 불확실성이 커지다 보니 기업들이 투자 계획을 이행하는 시점을 놓친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4월 발표는 새 정부에 대한 기대를 담아 연초에 세운 계획을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라며 “정부만 믿고 투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경기 등을 고려해 어쩔 수 없이 투자를 줄이는 곳이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5월 초 부랴부랴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열어 투자를 독려했지만 실제 규제 완화까지로 이어진 것은 거의 없다. 지주회사의 증손(曾孫)회사에 대한 최소 지분 보유 규제를 풀려 했지만 국회가 반대하는 바람에 SK그룹 등은 2조30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보류하고 있다. 서비스업 규제 완화가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이 분야의 대규모 프로젝트들도 아직 캐비닛 속에 머물고 있다.
총수 부재 상태인 SK, CJ, 한화그룹의 대규모 투자가 사실상 올 스톱 상태인 점도 투자 부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 재계 vs 정부 기 싸움 양상
대기업들이 투자를 늦추면서 정부와 재계가 기 싸움을 하는 모습도 엿보인다. 정부가 규제 완화 등 ‘당근’을 내놓으며 투자를 독려하지만 기업들은 경제민주화 법안에 대해 정부가 확실히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투자 곳간’을 열지 않겠다고 버티는 구도다.
재계는 최소 수조 원의 추가비용을 불러오는 통상임금 범위 확대나 매출액의 5%까지 벌금을 물리는 환경규제 등이 투자를 위축시키는 대표적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정부가 투자를 독려하면서도 이런 문제에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자 “경제를 살리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모르겠다”는 비판도 공공연히 내놓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업어 주는 것은 고사하고 (규제로) 발목이나 잡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꼬집었다.
특히 기업인들은 규제 정책을 주도하는 관료 그룹을 겨냥해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언론사 논설실장 및 해설위원실장들과의 오찬에서 “경제민주화 주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돼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한 것을 두고도 “의미를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왔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대기업을 타깃으로 한 경제민주화 입법은 일단락됐는지 몰라도 하반기(7∼12월)에는 통상임금, 근로시간 단축, 상법 개정안 등 기업에 부담을 지우는 각종 법안이 대기하고 있는데 이런 법안들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건지, 그건 경제민주화 법안이 아니라고 보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창조경제’ 기조에 발맞춰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으려 했던 기업들 사이에서는 힘을 잃어가는 창조경제에 대한 실망도 확산되고 있다. 전경련은 최근 “창조경제의 필요성에는 국민의 60%가 공감하지만 정책이 모호해 창조경제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며 미래창조과학부를 비판하는 자료를 냈다.
오정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규제 움직임에 큰 부담을 느끼는 기업으로선 투자 확대는 언감생심”이라며 “고용률을 높이려는 정책을 관료나 정치권이 제대로 받쳐주지 못하니 대통령의 말이 구두선(口頭禪)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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