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5일 손정훈 북한이탈주민비전네트워크 대표가 공개적으로 ‘국적 포기’를 선언했다. 다시 북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여생을 북에 남은 노모 곁에서 보내고 싶다는 것이 손 대표가 밝힌 첫 번째 이유다. 최근 건강 악화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는 자궁암에 걸린 탈북 여성을 돕다가 브로커 비용까지 떠안게 되면서 집은 물론 세간까지 모조리 차압당한 것으로 알려져 생활고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 나라는 오기도 힘들고 와서도 생활하기 힘든 나라”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코리안드림 현실은 냉혹
그의 발언에 대해 김형덕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 소장은 “탈북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김 소장 역시 1994년 북한을 탈출해 중국, 홍콩, 베트남 등지를 떠돌다 천신만고 끝에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다. 96년 그 역시 남한을 탈출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기에 탈북자들의 재입북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일 같지 않다.
“탈남을 결심한 손 대표가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더군요.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살았다면 재입북을 꿈꿨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손 대표와의 길고 긴 통화 이후 탈북자 출신의 지인들에게도 물어봤다고 한다.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있느냐는 그의 질문에 지인들 대답은 모두 ‘예스(Yes)’였다고 한다. 실제로 최근 북한이 탈북 후 재입북한 사람들을 ‘남한 실상을 알리는’ 선전용으로 이용한 사례만도 10여 차례가 넘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수까지 합치면 지금까지 100여 명은 족히 넘으리라는 게 김 소장의 추론이다.
“과거 많은 한국 사람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들 중 미국에 정착해 잘 사는 사람은 제가 알기로 1%도 채 되지 않습니다. 일단 언어가 다르고,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생각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죠. 미국까지 건너가 막노동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미국에선 막노동도 비자가 있어야 할 수 있다고 하니, 결국 그마저도 못 하고 되돌아오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탈북자들도 마찬가지예요. 모두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하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죠.”
김 소장은 스스로를 탈북자 중에서도 굉장히 운이 좋은 경우라고 했다. 그는 남한에 정착한 후 연세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탈북자 최초로 국회의원 정책비서관으로 활동했다. 재학 당시 동아리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도 했다. 이후 대기업 기획팀을 거쳐 2008년 공인회계사가 된 부인과 함께 탈북자 최초로 2년간 미국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김 소장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다른 탈북자들에 비해 남과 북이 탈북자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빨리 깨달은 것부터가 다행”이라고 털어놓았다. “북한에서 재입북자를 선전용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남한 역시 탈북자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뿐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는 것.
북한에서 연좌제 덫에 걸려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가던 김 소장에게 남한 사회로의 망명은 곧 기회와 자유를 의미했다. 하지만 막상 남한에 와보니 북한에서의 출신성분이 탈북자의 지위를 규정짓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연좌제로 작용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일자리 하나 얻기가 쉽지 않고, 그나마 일자리를 구해도 자본주의 사회의 조직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 겉돌기 십상인 게 그들의 현실이었다는 것.
김 소장은 “북한에서 소위 잘나가던 사람은 남한에 와서도 여기저기 불러주는 곳도 많고 이런저런 기회를 잡기가 그나마 쉬웠지만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나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사람은 사회부적응자, 신용불량자가 되기 일쑤”라면서 “이런 이유로 남한에 넘어오면서 자신의 학력과 이력, 배경 등을 위조하는 사례도 공공연히 발생한다”고 말한다.
“지금 시대에 이데올로기 때문에 북한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제 또래인 30~40대만 해도 그런 건 관심도 없습니다. 먹고살기 힘들고 어려우니까 살려고 내려오는 거죠. 그런데 막상 와보면 사는 게 막막하긴 매한가지거든요. 게다가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심지어 피붙이와 평생 연락 한 번 주고받기 어려운 처지가 되니까 다시 가고 싶어지는 겁니다. 정부 정책이요? 물론 문제는 있습니다. 하지만 탈북자 자체를 정부가 책임질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남한 사람들도 일일이 책임지지 못하는 게 현실인데 탈북자들을 어떻게 다 책임집니까.”
국보법 위반? 구시대적 발상
김 소장은 “재입북 희망자들은 그냥 북한으로 보내주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한 번 돌아간 이상 또다시 받아주는 일은 없어야겠지만, 살아보니 안 되겠다는 사람들을 굳이 말릴 이유가 있느냐는 것. 국가보안법 위반 조항에 대해서도 코웃음을 쳤다.
“국가 안보에 위협이 돼야 국가보안법 위반이지 남한 사회에 적응조차 못하고 넘어가는 사람이 무슨 위협이 되겠습니까. 지금 북한은 남한과 어느 부분에서도 경쟁이 되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뒤떨어져 있습니다. 그런 후진국을 상대로 국가보안법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구시대적인 발상 아니겠습니까.”
김 소장은 독일 통일 당시 동독을 탈출한 사람들을 예로 들며 “우리나라 역시 탈북자 문제를 단순히 탈북자만의 문제로 볼 게 아니라 통일 연장선상에서 고민하고 정책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독일 분단 당시 수백만 명에 달하는 동독인이 서독으로 이주했지만 그중 10% 정도는 다시 동독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남북과 달리 비교적 왕래가 자유롭고 교류가 활발한 데다 서독의 동독 탈출자 프로그램이 꽤나 구체적이고 실질적이었음에도 동서독의 문화 및 가치관의 차이가 그들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억압이 오히려 단절과 반발심만 쌓아 통일의 초석이 될 수 있는 탈북자들을 사지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오래전부터 국내 남북문제 전문가들은 독일의 탈동독자 지원 사례를 남한에도 접목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2009년 ‘서독의 동독 이탈주민 정착지원을 통해 본 북한 이탈주민 지원 방안’을 주제로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가 개최한 포럼에서 박정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서독이 동서독 통일을 이루기까지 동독 이탈주민에게 연령, 성, 직종별로 세분화한 맞춤형 지원 프로그램을 운용한 점, 특히 서독 정부가 동서독 통합을 염두에 두고 장기적 차원에서 인적자원 개발에 집중한 점, 여성과 청소년 등 대상별로 특성화한 지원의 필요성을 깨닫고 대상별 지원 체계를 구축한 점을 참고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박상영 셋넷학교 교장이 말하는 탈북자 실상▼ 정착금 탕진 후 막노동판 전전…먹고사는 방법 너무 몰라
“어? 이 친구 우리 학교에 있던 허○○ 아냐?”
지난달 재입북을 시도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광주시에서 붙잡힌 허모 씨 기사를 접한 탈북청소년 교육공동체 셋넷학교 교사들은 기사 내용을 보자마자 그가 학교에 한 달가량 머물던 허모 씨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고 한다. 박상영 셋넷학교 교장(사진)에게 허씨에 대해 물어보는 경찰 전화가 몇 차례나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긴 일이었다.
“경찰이 이것저것 묻기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물어봐도 그럴 일이 있다고만 할 뿐 딱히 대답해주진 않더군요. 허씨 같은 경우엔 이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한 달여 만에 도망치듯 나가버려 그 뒤로 소식만 가끔 주고받는 정도였어요. 기사에 난 것처럼 정착금을 탕진하고 막노동을 하며 근근이 살았던 것으로 알아요. 본인이 자초한 일이죠.”
박 교장이 아는 허씨의 행적은 이랬다. 탈북자가 대부분 그렇듯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허씨는 남한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정착금을 순식간에 탕진하고 1500만 원짜리 자동차까지 할부로 구매했으나 차 값을 다 갚지 못했다. 탈북 여성과 결혼도 했지만 결혼생활 역시 순탄치 못했다고 한다.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는 게 박 교장의 생각이다. 박 교장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을 갚을 길 없어 막막해하는 허씨가 안타까워 셋넷학교가 있는 원주에 일자리를 알아봐주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직장에 적응하는 것 역시 쉽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취업 일주일 만에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의 소식을 들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지방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하면서 지낸다고 했다. 그가 다시 월북을 시도하리라는 사실을 박 교장도 알고 있었을까.
“아니요. 13년 동안 탈북자 대안학교를 운영하지만 다시 북한으로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어요. 하지만 탈북자끼리는 그런 이야기를 충분히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가깝게 지내도 저는 남한 사람이니까 저한테 못 하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죠.” 박 교장은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것은 과도한 사회정착금이나 북한 이탈주민의 사회정착을 지원하는 통일부 소속기관 ‘하나원’에서 이뤄지는 설교에 가까운 특강 프로그램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남한 사람이 크게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탈북자들이 자본주의를 남한에서 처음 접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탈북자들은 이미 중국에서 일차로 문화적 쇼크를 받은 상태입니다. 그들 대부분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바로 넘어오는 게 아니거든요. 먹고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중국에 가면 방도가 있다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먼저 중국으로 넘어가는 게 가장 일반적이죠. 그곳에서 선교사나 브로커 등을 만나 몇 달 동안 체류하다 넘어오게 되는 겁니다.”
박 교장이 만난 탈북자는 대부분 남한에 오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으리으리한 이층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게 될 거란 환상을 품고 남한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하나원에서도 그들의 환상은 깨지지 않는다. 하나원의 교육 프로그램 자체가 남한의 체제우위를 홍보하는 데 집중돼 있다 보니 그들이 실질적으로 남한 사회에서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착금을 줄이더라도 그들이 남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하나하나 가르치는 것이 먼저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들이 정착금을 그렇게 쉽게 날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거든요. 대출받아 이것저것 구매해놓고도 그걸 왜 갚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기에, 남한 사회에서 신용불량자는 북한의 사상범과 같다고 이야기해줬더니 어렴풋이 이해하는 정도랄까요. 게다가 딱히 열심히 하거나 경쟁하지 않아도 적당히만 하면 똑같이 배급받는 사회에 살던 사람들이 남한 사람의 노력이란 걸 상상이나 해봤겠습니까.
지금까지 제가 본 탈북자 가운데 100명 넘는 인원이 특례입학으로 서울의 유수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졸업자는 6명뿐입니다. 아무도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서, 기초가 없고 실력이 없어서 적응하지 못했다고 생각지 않더군요. 남한 아이들이 10년 넘는 세월 동안 주말도 없이 밤낮으로 피 터지게 공부해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학교를 그렇게 쉽게 들어갔으니, 오히려 그들은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기회조차 박탈당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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