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실종 원인 규명을 놓고 여야가 ‘강대강’ 대결 구도를 이어가고 있다. 새누리당은 ‘사초(史草) 실종’ 책임자로 문재인 민주당 의원을 조준해 검찰 고발에 나섰고, 민주당은 특검을 통한 진실규명으로 맞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의 진실을 향해 접근하던 정치권이 이번에는 ‘사초 증발’ 사태를 두고 또다시 난타전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사초 관리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했지만, 정치권은 여전히 ‘네 탓’ 공방만 한다는 비판이 높다. 여전히 정쟁만 한다는 얘기다.
김익한(53)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장(한국국가기록연구원장)은 “국가기록물 관리에 대한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검증할 수 있는 체계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이번 기회에 국가기록물을 관리하는 위원회를 만들어 정치적 중립성과 전문성을 확보해야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참여정부 때 기록관리 태스크포스(TF) 자문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과 현재의 대통령기록관 시스템을 갖추는 데 큰 구실을 했다. 김 원장을 만나 현재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실종 사태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 ‘회의록 증발’ 사태를 어떻게 보나.
“이번 일로 국민은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첫째는 대통령 퇴임 후 국가기록원에 이관될 자료를 점검해야 하지만 국가기록원은 점검할 권한도 능력도 없다는 점, 그리고 국가정보원(국정원)이 국가 핵심 기밀을 관리하지만 어떤 비밀기록을 어떻게 생산 및 관리하는지도 모르고, 이를 관리감독해야 할 국가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국가기록원이 정치적 중립성과 전문성을 갖고 스스로 검증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검증체계가 없으면 언제든 이런 일은 다시 생기게 마련이다.”
▼ 감사원이 있지 않나.
“전문가를 동원해도 이런 일이 생겼다. 매년 감사원이 감사하더라도 전문적 감사는 쉽지 않다. 이번에 문제를 확인한 만큼 비밀자료를 다루는 청와대와 국정원, 국가기록원 3곳에 대한 체계적인 검증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 검증 시스템이라면….
“박근혜 대통령이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한다. 한국 정치 상황과 남북관계 특수성을 고려해 정치적 중립성과 전문성을 확보하는 수준으로 국가기록 관리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 현재 국가기록원은 그렇지 못하다는 건가.
“정치권이 억측에 의한 정쟁을 벌였지 않나. 봉인 훼손, 기밀자료에 대한 무단 접속 등 국가기록원 보안이 뚫렸다는 전제로 논쟁을 했다. 이는 국가기록원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박경국) 국가기록원장도 기자들 질문에 선문답하면서 국가기록원 수장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먼저 정치적 중립성과 관련해 위원회가 필요하다. 국가인권위원회처럼 입법, 사법, 행정의 균형지점, 이걸 가지고 갈 수 있는 일종의 3부(三府) 독립위원회 형식의 국가기록정보관리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이 위원회가 국가기록원과 대통령기록관, 국정원의 기록을 검증하는 거다. 좀 더 발전하면 정보 공개를 실행하는 부서도 있어야 한다. 국정원도 매년 위원회 감사를 받아야 한다. 기밀정보를 해제하고 개방하는 것도 이 위원회가 담당하면 된다. 현재처럼 1급 상당의 행정공무원이 국가기록원 수장이라는 게 말이 되나. 국가기록원 수장이라면 사회적, 학문적으로 존경받고 정치적 신뢰성을 담보할 수준의 인사여야 한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장은 정무직이지만 정치인 출신은 없다. 기록정보 관리 분야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이 맡는다. 만약 정치적으로 편향된 사람이 앉으면 정치적, 국민적 지탄을 받는다.”
▼ 전문성은 어떻게 확보하나.
“일각에서는 (참여정부 문서관리 시스템) ‘이지원(e-知園)’을 재구동하지 못하는 국가기록원을 답답하게 본다. 이지원 시스템은 삼성 SDS가 만들었다. 기록원이 이지원 시스템을 인수할 때 제조사 정도의 전문성만 있었더라면 이틀이면 구동할 수 있다. 기록정보 관리는 콘텐츠 관리 측면이 강하다. 이번에 검색에 실패한 이유도 콘텐츠 관리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 기록관리 TF 자문위원장으로서 국가기록물 관리 뼈대를 세우지 않았나. 그때….
“사실 그때(참여정부 시절)가 국가기록물 관리의 르네상스였다. 지금의 여당(새누리당)조차 기록정보 관리 분야는 인정했다. 그런데 예산이나 조직, 기능 면에서 이명박 정부 이후 전혀 진전이 없었다. 한국 기록정보 관리 차원에서는 슬픈 일이다. 우리가 기록정보 관리 부분을 세팅할 때 국정원이 굉장히 두려워했다.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국정원이 국가기록 관리에 대해선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니 최근 국정원이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는 일을 하지 않았나.”
회의록 못 찾아낸 세 가지 이유
▼ 국정원이 두려워했다는 얘기는 무슨 의미인가.
“비밀자료 관리 방식과 관련해 국정원의 기록 독점체계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국정원의 비밀자료도 점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는 1년에 한 번씩 국정원 비밀자료를 감시하려고 했다. 상당한 수준의 컨센서스(의견 일치)도 이뤘다.”
▼ 상당한 수준의 컨센서스라면?
“디테일하게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명박 정부 들어 이런 논의가 전면 중단돼 원점으로 돌아갔다. 박근혜 정부는 전 정부와 조금 다르다고 본다. 사회적 문제가 발생한 만큼 국가기록 관리체제를 전면 점검하고,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과학화가 필요하다.”
▼ ‘사초 증발’ 사건은 국정원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본을 공개하자 진본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시작했다가 드러난 것 아닌가. 회의록 2부를 만들어 보관한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
“2부 보관 논란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 배석한) 조명균 전 대통령안보정책비서관의 발언으로 시작된 거 아닌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토대로 추측한 거다. 지정기록물이 되면 후임 대통령이 못 보니까 1부를 국정원에 따로 보관하도록 했다는 해석도 나오는데, 이는 법률을 잘못 이해한 거다. 대통령기록물은 청와대가 유일본 한 부를 가져야 한다. 후임 대통령이 참고하려고 한 부를 더 만들었다면 대통령기록물로 지정하지 말고 1급 비밀로 설정해 국가기록원이 보관했어야 한다(대통령기록물은 퇴임 6개월 전부터 대통령비서실이 분류작업을 거쳐 지정기록물로 지정한 문건을 국가기록원에 넘긴다). 국정원 사본은 파기하고. 그럼 후임자가 충분히 볼 수 있다. 현행법상 방법이 있는데 양쪽 모두 보관토록 한 것은 우스꽝스럽다. 노 전 대통령 지시라기보다 남북정상회담 핵심 인사들이 그렇게 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의 결정은 오류였다 .”
▼ 노 전 대통령이 이지원 시스템에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삭제하라고 지시했다는 보도도 있다.
“당시 청와대의 기록물 이관은 아주 철저하게 이뤄졌다. 국가기록원 직원들이 청와대로 파견을 나갔고, 청와대 측이 이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지원 시스템을 이전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이지원 서버에 있는 원본 하드디스크를 전부 이관했다. 현재 대통령기록관의 지정기록물 서고에 있다. 참여정부 때 이지원 시스템은 업무의 70~80%에 쓰였고, 인사관리와 예산회계는 다른 시스템을 사용했다. 대통령기록관리 시스템(PAMS) 등도 성격상 녹음테이프로 만들었으며, 일정관리 역시 별도 시스템을 썼다. 이지원과 다른 18개 시스템이 있었는데, 이 역시 스토리지(하드디스크)를 통째 이관했다. 음성 녹음테이프는 테이프스캐너를 구매해 청와대가 음성파일로 전환한 뒤 페이퍼와 CD로 만들었다. 그 양이 엄청나다.”
▼ 그럼 왜 못 찾았을까.
“가능성은 3가지다. 첫째, PAMS에 업로드하지 않았거나 다른 곳에 업로드했을 수 있다. 페이퍼나 CD에 담겼을 개연성도 있다. 열람 기간을 연장해 이것도 다 찾아보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정쟁으로 스톱됐다. 둘째, 이지원 시스템에서 대통령기록관으로 이전할 때 오류가 발생했을 수 있다. 이는 이지원 시스템을 구동해야 찾을 수 있는데, 열람 기간 내 구동이 안 됐다. 국가기록원의 무능과 정치적 부담 때문이라고 본다. 민간전문가들이 참여했지만 여야 열람위원끼리 싸우는 바람에 효과적으로 검색할 수도 없었다. 전문가가 사흘간 찾았다지만, 내가 볼 땐 전문가들이 일한 시간은 반나절 정도였다. 셋째, 회의록 제목을 암호로 썼을 수도 있다. 내용과 무관한 제목일 경우 검색되지 않기 때문에 본문 파일을 검색해야 하는데, 본문이 암호화돼 있어 현 시스템으론 찾을 수 없다. 본문에는 암호가 걸려 있다.”
▼ 그럼 어떻게 푸나.
“15년이 지난 다음 일반기록으로 전환될 때 복구할 수 있다. 지정기록 서버에 복호화(decoding) 키를 꽂으면 된다. 그럼 ‘풀겠습니까’ ‘풀린 파일을 복사하겠습니까’ 하고 묻는다. 본문은 암호를 풀어 다른 서버로 복사한 뒤 서치 엔진을 돌리면 찾을 수 있다.”
▼ 복호화는 왜 안 했을까.
“지정기록 파일을 복호화해도 별도 서버 저장장치에 저장하는 것이 법적으로 위법성 소지가 있다. 이번에 복호화 파일을 가지고 본문 검색을 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쉽지 않은 문제다.”
▼ 회담록 폐기 지시 주장은 어떻게 보나.
“대통령기록관에서도 시스템 불법 삭제가 있었다면 로그 상태를 확인하면 된다. 과학적으로 수사하면 밝혀질 일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특검으로 풀어야 한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7월 24일 조명균 전 비서관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 문서관리 시스템인 이지원에서 정상회담 회의록을 삭제했다”는 취지로 검찰에 진술했다는 언론 보도와 관련해 “기억으론 그런 확정적 진술을 한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무단 접속은 매니저만 확인 가능
▼ 왜 그런가.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을 수사한 검찰은 올해 초 국정원 회의록을 일반 공공기록물로 해석했다. 이는 검찰 자체가 편향성을 가졌다는 의미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국정원이 작성했더라도 공공기록물이 아닌 대통령기록물로 관리했어야 한다. 대통령기록물 요건은 대통령의 직무 수행과 관련해 만들어진 기록인 동시에, 기록물을 생산하고 접수한 주체가 대통령이나 대통령 보좌 및 자문가다.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국정행위에 대한 보좌행위를 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는 대통령기록물의 요건에 해당한다.”
그건 그렇고, 홍영표 민주당 의원은 3월 노무현재단 사료팀이 노 전 대통령 기록을 열람하려고 방문했을 때 특수서고 입구 봉인지가 뜯겨 있었고, 2010년 3월과 2011년 8월 두 차례 무단 접속(로그인)한 기록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의 불법 접근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국가기록원 측은 “시스템 구동 여부 및 항온·항습 점검차 접속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 봉인 훼손과 무단 접속 주장은 어떻게 보나.
“무단 접속을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직원 제보다. 한 번 훑어보고 우연히 발견할 문제는 아니다. 시스템 매니저만 접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접근 로그인이 아닐 가능성이 90% 이상이라고 본다. 이명박 정부의 직원이 노무현재단 관계자에게 그것을 보여줬을까. 그런데 대통령기록물이라고 해도 관리 차원에서는 접근할 수 있다. 떳떳이 밝히면 된다. 박경국 원장은 기자들의 질문에 ‘항온·항습 점검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게 또 논란이 되지 않았나. 이 문제는 박 원장이 직접 대응할 게 아니라, 데이터를 가지고 연도별 접근 횟수와 목적을 떳떳이 밝혀야 했다. 대통령기록물에 접근했다는 것은 지정기록이 존재하는 하드디스크 공간에 소프트웨어가 작동해 데이터를 열어보거나 복사 또는 삭제했다는 뜻인데, 이때는 소프트웨어가 작동하니까 계속 데이터가 생성된다. 전원을 켰다가 껐다고 해서 데이터가 남는 건 아니다. 로그인 기록이 항온·항습 점검 때문에 남았다고 말한 것은 동문서답이다.”
▼ ‘사초 증발’을 경험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을 텐데.
“대화록 실종 기사는 이제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수사로 밝히면 된다. 나의 발언이 조심스러운 이유도 또 다른 정쟁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제대로 된 시스템을 만드는 기회가 돼야 한다. 반성하고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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