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해제 MB5년]<20>정두언의 경기고 71회 동기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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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조원동이 제일 유능”, 강만수 “누가 그래? 최중경으로 해”

최중경(왼쪽 사진 오른쪽)은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포진한 ‘정두언의 경기고 71회 동기들’ 중 한 명이었지만 경기 인맥이라기보다는 ‘강만수맨’이었다. MB 정권에서는 강만수 윤증현 최중경 등 모피아(MOFIA·옛 재무부 관료) 출신들이 경제정책을 장악했다. 정두언과 친했던 조원동(오른쪽 사진 오른쪽)은 경제기획원(EPB) 출신.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현오석 경제부총리를 정점으로 EPB 출신들이 득세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최중경(왼쪽 사진 오른쪽)은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포진한 ‘정두언의 경기고 71회 동기들’ 중 한 명이었지만 경기 인맥이라기보다는 ‘강만수맨’이었다. MB 정권에서는 강만수 윤증현 최중경 등 모피아(MOFIA·옛 재무부 관료) 출신들이 경제정책을 장악했다. 정두언과 친했던 조원동(오른쪽 사진 오른쪽)은 경제기획원(EPB) 출신.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현오석 경제부총리를 정점으로 EPB 출신들이 득세하고 있다. 동아일보DB
《 MB 핵심 측근. “백악관 안에서는 남에게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 벽에 붙어 다녀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MB 정권 초기 정두언 정도의 위치면 '벌판의 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경기고 동기들을 대거 인수위원회에 집어넣고… 너무 순진했다.” (2013년 5월. 동아일보 인터뷰) 》

강만수=“정 의원, 최중경을 왜 조원동으로 바꿨어?”
정두언=“과천에 물어보니까 조원동이가 제일 유능하다고 하던데요.”
강만수=“(발끈하며) 누가 그래? 당장 최중경으로 다시 바꿔 놔!”
정두언=“원장님은 조원동이를 왜 그렇게 미워하세요?”
강만수=“그러는 정 의원은 (다 같은 고등학교 동기들인데) 최중경이를 왜 그렇게 미워하는 거야?”

2007년 12월 말. 이명박(MB)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강만수 경제1분과 간사는 당선자 보좌역인 정두언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언성을 높였다. 경제부처들이 모여 있는 정부과천청사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벌써 소문이 파다했다. “강만수의 최중경까지 조원동으로 바꿔 놓은 걸 보면 역시 정두언이 무소불위의 실세는 실세인 모양!”

공무원들의 눈과 귀가 온통 인수위원회 인선에 쏠려 있을 때였다. 인수위원장이나 기획, 정무, 외교안보통일, 법무행정, 경제1, 경제2, 사회교육문화 같은 분과별 간사야 정치적으로 임명하는 자리이지만 ‘전문위원’은 각 부처 공무원들의 몫이나 마찬가지였다. 말이 전문위원이지 새 정부에서의 전도(前途)를 보장받는 ‘보증 수표’로 인식됐다.

강만수와 정두언은 MB가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부터 함께 호흡을 맞춘 ‘동지’였다. 시기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정두언은 정무부시장을 했고, 강만수는 서울시정개발원장으로 MB 곁을 지켰다. 1945년생인 강만수는 열두 살이나 아래인 정두언을 아꼈고, 정두언은 강만수를 ‘원장님’이라고 깍듯이 대했다. 선거대책위원회에서도 정두언이 전략기획총괄팀장, 강만수가 정책조정실장을 맡았다. 전략은 정두언이, 정책은 강만수가 책임지는 구도였다. 선거 전략과 정책, 사실상 선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MB가 당선된 직후 인수위 구성에 착수한 정두언이 강만수에게 “실제로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이 책임지고 정권을 운영해야 합니다. 원장님이 대통령비서실장을 맡으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운을 뗀 것도 그런 관계 때문이다. 그러나 강만수는 입도 열지 못하게 했다. “정 의원, (비서실장은) 말도 꺼내지 마. 내가 이 나이(62)에 (대통령 모신다고) 새벽부터 빡빡 기어야 되겠어? 그런 얘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 마!” MB는 서울시장 때도 새벽 4시에 일어나 7시면 청사에 출근했다.

재무 관료 출신인 강만수의 희망은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를 합쳐 새로 출범시킨 조직이다. 이를테면 과거 MOF(Ministry of Finance·재무부)와 EPB(Economic Planning Board·경제기획원)를 합쳐놓은 것 같은 조직의 수장(首長), 바로 경제 사령탑을 맡는 것이었다.

걸림돌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명박 후보의 경제 공약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고, 정두언은 물론이고 SD(이상득)도 그를 믿었다. SD가 국회 재무위원으로 활약할 때 강만수는 정부에서 파견된 재무위 수석전문위원이었다. ‘킹만수’라는 소리가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연히 경제1분과 간사를 맡아 새 정부의 경제팀을 짜면서 최중경부터 불렀다. 강만수가 재무부 이재국장을 할 때 최중경은 그 밑에서 사무관을 했다. 외환위기도 함께 겪었다. 관가에서는 두 사람을 ‘한 몸’처럼 바라봤다. 세계은행(World Bank) 상임이사로 워싱턴에 파견돼 있던 최중경은 강만수의 전화를 받자마자 웃으면서 “준비 다 해 놨습니다. 어른이 저 말고 달리 부를 사람이 없잖아요?”라며 달려왔다. 최중경은 강만수를 ‘어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과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정두언이 최중경을 조원동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사실 정두언 최중경 조원동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이던 경기고 71회 동기동창이다. 경기고는 72회가 마지막 시험 세대이고, 그 다음부터는 평준화됐다.

정두언은 조원동과 친했다. 둘은 대학입시 재수생활도 같이했다. 강만수가 물었을 때 최중경의 대답도 그랬다.

강만수=“정두언 의원이 왜 자네를 싫어하는 거야?”

최중경=“제가 정두언이라도 조원동을 택할 겁니다. 실력 문제가 아니라 둘이 원래 친합니다.”

정두언과 조원동의 관계를 들은 강만수는 안 되겠다 싶어서 MB를 만나 최중경을 쓰겠다고 아예 ‘쐐기’를 박았다.

결국 조원동은 총괄간사인 맹형규 의원이 좌장을 맡고 있던 기획조정분과로 전속됐다. 경제 관료가 국무총리실로 파견되는 것이나 비슷했다. 최중경에게 밀려난, 아니 강만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조원동은 MB 정부 5년 동안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차관급), 한국조세연구원장으로 ‘변방’만 돌았다. 반면 최중경은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강만수 기재부 장관 밑에서 차관을 지내다 잠시 주필리핀 대사로 ‘바깥바람’을 쐰 뒤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지식경제부 장관으로 화려한 경력을 꽃피운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4자 성어는 바로 조원동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 아닐까. MB 정부에서 외곽만 돌던 조원동이 결국 그 덕에 박근혜 청와대의 초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

인수위에는 최중경, 조원동 말고도 정두언의 경기고 71회 동기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기획조정분과엔 조원동과 김준경 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현 KDI 원장), 외교통일안보분과엔 이용준 전 북핵외교기획단장(현 주말레이시아 대사), 법무행정분과 법령정비팀장엔 정선태 서울고검 검사(나중에 법제처장), 경제1분과엔 최중경, 경제2분과엔 윤수영 산업자원부 국장(현 한국무역정보통신 사장), 사회교육문화분과엔 이선용 전 환경부 공보관(현 법무법인 율촌 고문)이 자리를 잡았다. 모두 KS(경기고·서울대)였다. 얼핏 보면 정두언의 경기 71회가 인수위를 완전히 장악한 것처럼 보였다. 또 인수위는 아니지만 기획예산처 재정운용실장엔 나중에 대통령실 경제수석과 정책실장을 역임하는 김대기까지 버티고 있었다.

정두언과 함께 인수위 구성을 비롯해 ‘집권 계획서’ 초안을 만들었던 김원용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의 증언. “정두언이 한상률 국세청장에게 ‘MB 관련 자료’를 내놓으라고 하다가 그 얘기가 MB 귀에 들어가면서 결정적으로 코너에 몰렸다. SD와 박영준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정두언에게) 연타를 먹였다. MB한테 ‘인수위가 온통 정두언 판’이라고 보고한 것이다. 하지만 쓸 만한 사람들을 모으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일부러 ‘정두언 사람’을 모은 건 아니었다.”

미운털이 박히면 모든 게 밉게 보이기 마련이다. MB는 정두언과 김원용이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정두언을 의심했다. “야, 내가 인사동에 밥 먹으러 갔는데 사람들이 ‘인수위는 다 정두언 사람이라며?’라고 말하고 다니더라.”(본보 4월 13일자 비밀해제 ‘정두언의 실종-상’ 참조)

김원용과 정두언은 할 말이 없었다.

다시 김원용의 설명. “지금 복기해 보면 정두언이나 나나 당시 ‘(권력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리고 정두언의 마음은 인수위 구성이나 조각(組閣)보다 4월 총선에 반쯤 가 있었다. 그냥 아는 사람 좀 집어넣고 빨리 끝내려고 했다. 내가 인수위원 명단을 최종 정리하긴 했지만 나도 방학이라 미국 존스홉킨스대에 있던 둘째아들 만나러 갈 생각이 더 급했다. 초대 내각 멤버들을 추천하기 위해 네이버로 사람들을 검색하다 ‘우리가 이렇게 아마추어처럼 해도 되는 거냐?’고 서로 물어볼 정도였다. 장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김원용, 정두언만 그렇게 생각했을 뿐 세인의 관심은 ‘정두언의 경기고 71회 동기들’에 모아졌다. 심지어 최중경조차도 최근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내가 생각해도 좀 심했다”고 회고했다.

정두언이 중도하차하면서 동기들에게도 후폭풍이 불었다. KDI에서 잔뼈가 굵은 김준경과 환경부 공보관·금강관리청장을 끝으로 정부를 떠났던 이선용은 MB 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경제2비서관, 환경비서관으로 새 출발의 기회를 잡았으나 채 반년을 넘기지 못했다. 김준경은 박근혜 정부 들어 KDI 원장을 맡게 됐으니 조원동과 같은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경기고 71회는 또 다른 ‘이색 기록’도 남겼다. 최중경(2010년 4월∼2011년 2월), 김대기(2011년 2월∼2013년 2월), 조원동(2013년 2월∼) 세 사람이 정권이 바뀌어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의 바통을 물려주고 물려받은 것이다. 세상은 역시 돌고 돈다.

김창혁 선임기자 chang@donga.com

#정두언#이명박정부#경기고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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