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모산 국정사 대처스님’의 비밀 ● 어항 속 금붕어 생활 즐기는 ‘관저귀신’ ● 외부 회식은 없다, 외부 사람도 안 만난다 ● 동기 김오랑 죽음에 항의, 하나회 비판 ● 노무현, 박근혜와의 기싸움
2011년 8월 18일자 ‘국민일보’는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이 내곡동 관저 대신 국가안보전략연구소가 입주한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 부근의 한 빌딩 1개 층을 개조해 관저로 쓰고 있다. 일반인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건물을 국정원장 관저로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도했다. 결론부터 밝히면 이 보도는 극히 일부분만 사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정원장 관저는 국정원 뒤편의 대모산 자락에 있다.
도곡동 건물은 국정원이 안가로 사용하다 외국 정보기관장이 방한하면 숙소로 제공하는 곳이었다. 외국 정보기관장의 숙소를 호텔에 잡으면 경호상 여러 가지 문제로 불편하다. 국가원수라면 일반인을 통제하며 경호할 수 있지만, 정보기관장은 한국에서의 동선(動線) 자체가 비밀이기에 호텔을 통제하는 경호를 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선진국 정보기관도 외국 VIP를 위한 숙소를 운영한다.
국정원장은 대통령을 제외한 그 누구를 만나도 ‘갑(甲)’이 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역대 국정원장은 대개 사람 만나는 것을 즐겼다. 외부에서 만나면 거대한 경호조직이 따라붙으니 ‘폼’도 날 것이다. 그런데 원세훈 전 원장은 노무현 정부의 초대 국정원장인 고영구 씨, 현 국정원장인 남재준 씨와 더불어 ‘3대 관저귀신’으로 불렸다. 세 사람은 낯을 가리는 탓인지 국정원 밖 나들이를 거의 하지 않고 관저 생활을 고집했다.
그런데 40여 일간 관저를 수리할 일이 생겨 원 원장은 사저(私邸)로 옮겨갔다. 사저는 주택가에 있는데, 국정원장이 보는 눈이 많은 사저에서 출퇴근하면 경호상 허점을 노출할 수 있다. 그래서 가끔씩 숙소를 옮겼는데, 그때 도곡동 건물을 세 번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곳이 국정원장 관저라는 보도는 정확하지 않다. 국정원은 언론이 걱정해줄 정도로 이목이 쏠리는 곳에 원장 관저를 만들지 않는다.
‘사실’에 이어 ‘판단’도 공개
국무총리를 가리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권력서열’로 따지면 2인자는 국정원장이다. 그 이유로는 국정원장이 대통령 다음으로 삼엄한 무장 경호를 받는 것을 꼽을 수 있다.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이 탄 차 뒤에는 한두 대의 경찰 차량이나 헌병 차량이 수행한다. 국정원장 못지않은 힘을 가진 대통령비서실장은 그마저 없어 운전기사가 경호원 노릇까지 할 판이다. 국정원장 차는 무장을 숨긴 국정원 요원이 여러 대의 차량에 분승해 전후로 호위한다. 국정원장이 내릴 곳에는 ‘맨 인 블랙’이 먼저 나타나 사전 통제를 한다.
국정원장 관저도 무장 경호를 받는데 그 수준이 청와대 다음이다. 국무총리나 국방장관, 합참의장, 경찰청장 관저는 주택가에 있지만 국정원장 관저는 청와대처럼 ‘사람 사는 모습은 TV로나 봐야 하는’ 인적이 드문 곳에 있다. 대통령은 관저(‘사저’로 부르는 경우도 많다)로 사람들을 불러들여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정원장은 ‘음지의 2인자’라 사람도 못 부르고 대통령의 부름에 대기해야 한다는 구속을 받는다. 한 국정원 관계자가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려줬다.
“국정원 뒤에 ‘국정사(國情寺)’라는 절이 있다. 그 절 주지스님의 법호는 ‘유발(有髮)’이고, 법명은 ‘대처(帶妻)’다. 절은 상당히 크지만 스님은 오랫동안 지내온 보살 한 분하고만 산다. 주지가 바뀌면 보살도 함께 바뀌는데, 새로 오는 주지도 항상 법호는 유발이고, 법명은 대처다. 국정원장은 대개 나이가 많아서, 자식은 밖에 두고 부인하고만 들어와 지내니 대처스님이고, 머리를 깎지 않았으니 유발 스님이다. 대모산 속 국정원장 관저는 너무 적적해 보통사람은 갑갑증을 견디지 못한다. 원장보다 부인이 더 힘들어한다.”
남재준 국정원장이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6월 20일 국회 정보위원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북방한계선) 발언이 담긴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발췌문을 내놓은 데 이어, 6월 25일에는 전문(全文)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남 원장은 2급 비밀문서로 돼 있던 이 회의록에 대해 비밀 해제해 전문을 제공하게 했다. 언론 보도를 통해 국민은 노 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NLL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 소상히 알게 됐다.
이뿐만 아니라 남 원장은 7월 10일 대변인을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해 NLL을 포기했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사실’에 이어 ‘판단’까지 공개한 것이다. 격투기에서 상대를 테이크 다운시킨 후 팔이나 목을 꺾어 항복을 받으려는 굳히기에 들어간 형세다. 여기에 김관진 국방부 장관도 호응했다. 7월 12일 국방부 대변인은 “북한이 주장하는 군사경계선과 NLL 사이의 수역을 공동어로구역으로 만들면 우리가 관할하는 수역을 북한에 양보하는 결과를 낳는다. NLL 남쪽으로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하는 것은 NLL을 포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밝혔다. ‘제가’→‘내가’ ‘저는’→‘나는’
국정원이 내놓은 전문은 과연 노무현-김정일 발언을 그대로 옮긴 것일까. 이 문제에 정통한 국정원 간부는 “100%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은 평소에도 ‘저는’ ‘제가’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김정일을 만났을 때도 계속 ‘저는…’ ‘제가…’를 반복하며 보고하듯이 말했다. 대화 내용도 답답한데 용어도 스스로를 낮춘 것 일색이라 ‘저는’은 ‘나는’으로, ‘제가’는 ‘내가’로 바꿔 정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조작’에 대해 민주당은 절대 시비를 걸지 않을 것이다. 거는 순간 또 다른 덫에 걸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회의록 내용보다는 공개 행위에 대한 비난에 집중하고 있다. 남 원장이 회의록을 공개한 것은 국정원 직원의 정치 개입을 금지한 국가정보원법(9조) 등을 위반한 것이라며 고발했다. 남 원장과 국정원을 상대로 국회 국정조사도 벌이기로 했다.
지난 18대 대선 직전 노 전 대통령의 NLL 발언을 터뜨린 이는 정문헌 의원인데 그는 뒤로 빠졌다. 정 의원은 남 원장과 교감을 나누고 바통 터치를 한 것일까. 두 사람을 잘 아는 이들은 “전혀 상의가 없었다”고 말한다. 정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통일비서관을 지냈기에 범MB계로 분류된다. 남 원장은 박근혜 캠프와만 접촉해온 ‘오로지’ 박근혜 맨이다. 그런데도 남 원장은 전문을 공개해 정 의원을 도와줬다. 다음은 국정원 관계자의 말이다.
“정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의 NLL 발언을 터뜨려 진위 논쟁이 일었을 때 국정원에서는 2차 정상회담 회의록을 일부라도 공개해 의혹을 풀어줘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원세훈 당시 원장은 대선 정국에서 그렇게 하면 정치행위를 했다는 오해를 받는다며 동의하지 않았다. 또한 일부 간부들이 ‘국정원이 가진 회의록이 국가기록물인지 공공기록물인지 판단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피력했기에 원 원장은 회의록 공개를 막았다.
NLL 발언 공개로 정 의원은 고소·고발을 당했는데, 이 사건을 조사한 검찰은 ‘이 회의록은 국정원이 자체 생산한 후 (노무현) 대통령 지시에 따라 국정원에서 관리해온 공공기록물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도 재가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이 회의록은 국정원장이 비밀 평가를 다시 할 수 있는 공공기록물임이 확실하다. 지난 6월은 대선이 끝난 지 오래인 데다 다른 선거를 앞둔 시점도 아니어서 공개해도 정치에 개입했다는 얘기가 나올 수 없다고 판단, 남 원장이 국가 안보를 위해 공개를 결정했다.” 어항 속의 금붕어
국정원 국정조사 사태가 불거졌는데도 ‘관저귀신’의 행동엔 변화가 없다고 한다. 점심은 국정원 구내에서 먹고, 저녁식사는 퇴근 후 ‘국정사’에서 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 남 원장은 국정원 간부들을 점심 자리에 참석시키지도 않는다. 그의 점심 상대는 자신이 데리고 온 비서실장으로 고정돼 있다시피 하다. 회의록 파문 이후로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선지 청와대 호출도 사라져 그의 차가 내곡동 밖으로 나갈 일도 줄었다고 한다. 그의 사무실에서 ‘국정사’까지는 차로 5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 5분이 그가 바깥바람을 쐬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 된 것이다.
그는 관저생활의 달인이다. 군에서는 관저를 ‘관사’라고 하는데, 대대장 이상의 지휘관은 위수지역을 벗어날 수 없기에 관사를 제공받는다. 30, 40대 지휘관에게도 자녀 교육은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가족은 대도시에 두고 혼자 관사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내는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고 남편은 사단장쯤 됐을 때 비로소 관사생활에 동참한다. 이러한 경험 덕분에 남 원장은 관저생활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저생활에는 비밀이 없다. 관저에는 요원들이 있기 때문에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살아야 한다.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 국정원 직원이라고 해서 정치 성향이 여당 일색일 것으로 보는 것은 단견이다. 지난 대선 직전 터져나온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은 국정원 현직 직원이 민주당에 제보하면서 시작됐다. 남 원장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직원 중 일부는 그를 ‘공적(公敵) 1호’로 보고 소리 없이 관찰할 수도 있다. 국정원 직원들은 모두 ‘미감(미행 감시)’ 교육을 받았으니 ‘그림자 추적’에 능하다.
군에서 회식을 하면 아랫사람들이 회식비를 낸다. 지휘관이 주도한 자리에는 경리 장교가 참석해 비용을 정산한다. 관례가 그렇기에 회식비에 신경을 쓰지 않는 지휘관이 많다. 그러다 외부인이 마련한 자리에 ‘생각 없이’ 참석했다가 오명을 쓰기도 한다. 그래서 ‘군 지휘관은 털면 (비리가) 나온다’는 속설이 굳어졌다.
하지만 남 원장은 ‘관사 회식의 달인’이라 그런 약점이 없었다. 그는 군 지휘관 시절에도 외부 음식점에서 회식을 하지 않았다. 회식은 관사에서만 했는데, 관사 회식은 부대 규정에 따라 예산으로 처리된다. 그러니 신세를 진 부하가 없어 청탁을 받지도, 들어주지도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부하였던 한 예비역 장교는 진급이 확정돼 다른 부대로 떠나게 됐을 때 남 원장에게 “딱 한 번만 부대 밖에서 모실 기회를 달라”고 청했다. 남 원장은 “좋지. 그런데 밥값은 내가 내는 조건이야”라고 응했다고 한다. 그는 관사 회식 원칙을 국정원에서도 이어가고 있다. ‘꼿꼿 재준’
남 원장은 국정원 간부들을 통해서만 보고를 받고 판단하지 않는다. 개성공단 철수처럼 국정원의 일은 아니지만(통일부 소관) 국정원이 대통령을 대신해 판단해야 할 것은 외부 인맥에게도 판단을 의뢰한다. 주로 군과 사회생활을 통해 그와 신뢰를 쌓아온 예비역 장교, 전직 외교관 등 안보통들이다. 부탁을 받으면 이들은 성심껏 판단 자료를 만들어주는데, 남 원장은 가끔 이것을 들고 가 박 대통령을 설득한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의견이 갈리면 박 대통령의 지시라도 듣지 않는다고 한다.
남 원장은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골프도 치지 않는다. 그러니 주말 외출도 없다. 신세를 진 외부 인사에겐 관사 회식도 베풀지 않는다. 데리고 온 직원을 보내 대신 감사의 접대를 하게 한다. 판단 자료는 구하면서도 외부에서 ‘○○○은 남재준 인맥이다’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접촉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냉정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는 딸 둘을 뒀는데, 출가한 딸 가족이 주말에 ‘국정사’를 찾는 거의 유일한 손님이다.
그는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절제하는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듯 줄기차게 불을 붙인다. 여가는 전사(戰史)를 중심으로 한 독서로 일관한다. 독서량이 엄청나서 그를 만난 국정원 간부들은 그가 앉아서 천리를 보고, 서서 만리를 보는(座見千里 立見萬里)’ 것 같다고 평하기도 한다. 그의 말을 ‘어록’으로 받아 적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국정원 1급 간부들은 계급과 근속 등 여러 가지 정년에 걸려 60세를 넘기기 어렵다. 원세훈 전 원장은 올해 62세(1951년생)니 두어 살 많은 나이로 국정원 간부들을 이끌었다. 그의 통제는 찬바람이 일었다고 한다. 남 원장은 1944년생으로 69세다. 고참 1급보다도 열 살 이상 많으니 직원들은 그에게 기꺼이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해박한 지식, 나이에 비해 젊은 기력이 그의 리더십을 이루는 3박자라는 것이다.
남 원장은 언론과의 접촉을 꺼린다. 국정원 간부들은 대(對)언론 관계를 위해 그에게 언론사 대표를 만나라고 조언하지만 따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도 남재준식 자기관리로 본다. 그는 군에 있을 때도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기자를 만나지 않았다.
그는 서울 배재고를 나왔다. 기자는 그가 육군참모총장에서 퇴임했을 때 비교적 오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는 배재 출신임을 자랑했다. 실력이 모자라 경기고, 경복고 같은 공립고를 응시하지 않은 게 아니라 “배재고가 대일 항쟁기에 민족자주성을 유지한 유일한 사립학교라서 갔다”고 했다. 그는 가슴을 펴고 걷는다. 고개는 숙이지 않는다. 특이해 보여서 “그렇게 걸으면 발을 헛디딜 수 있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물웅덩이에도 빠지고 지하철 공사판의 복공판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선택입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12·12, 광주 군 개입 비판
남 원장은 정치적인 의도 없이 회의록을 공개했다고 하지만 야당은 물론 일부 대학생과 교수들도 정치개입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어떤 정치관을 갖고 있을까.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전두환 보안사령관 세력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12·12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는 소령 계급의 육군대학 교관이었다(전사나 전술, 전략에 밝은 소령은 육군대학 교관을 하는 경우가 많다). 정 총장을 체포할 때 보안사 세력은 정 총장 측근인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체포하려다 이를 막고 나선 김오랑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을 쏴 숨지게 했다. 김오랑 소령과 남재준은 육사 동기(25기)였다.
육군대학 강의를 하던 남재준 소령은 신군부의 등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군의 광주민주화운동 진압도 비판했다. 이 얘기가 보안사의 귀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진급에서 매번 탈락했다.
자격을 갖춘 장교에겐 세 번 진급 기회가 주어진다. 첫해에는 잘나가는 소수만 진급하는데 이들이 선두주자다. 이듬해 가장 많은 수가 진급하고(2차 진급), 3년차 때 소수가 진급한다(3차 진급). 3차에서 진급하지 못하면 그 후 매년 진급대상자로 올라가도 후배들에게 진급 기회가 돌아가기에, 경쟁률만 올리는 허수(虛數) 노릇을 하다 계급정년으로 전역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군에서는 4차 이상의 진급은 거의 없는데, 남 소령은 기적같이 4차를 넘기고도 진급했다.
동해안을 지키는 모 사단에서 한 병사가 수류탄을 던져 동료를 폭사시켰다. 이 때문에 아무도 이 사고 대대를 맡으려 하지 않자, 사단장이 불우한 처지에 있던 남재준을 진급시키려는 마음에 그를 대대장에 앉혔다. 그렇게 중령이 됐지만 한참 뒤처져 있었기에 그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런데도 육사 출신이라 3차로 대령 진급을 할 수 있었다. 그 무렵 군에서는 하나회에 대한 말이 많았다. 그는 군인이 사조직을 갖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했지만 곧 전역할 사람으로 간주됐기에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예비군 부대의 연대장 등을 전전했다.
1993년 김영삼(YS) 정부가 출범하며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YS 정부는 김진영 육군총장 경질을 시작으로 하나회를 날렸다. 그러고는 비(非)하나회 장교들을 찾았는데 그가 꼽힌 것이다. 더욱이 그에게는 똑똑하다는 평가가 따라붙었기에 이후 내리 1차로 별을 달 수 있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엔 육군총장에 지명됐다. 총장 시켜준 盧 정권과 불화
군인에게 전쟁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진급이다. ‘마누라를 인사권자 집에 무료 파출부로 보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진급에 목을 맨다. 진급 인사 후에는 누가 누구를 밀어줬네 하는 말들이 나돈다. 기무사나 헌병대엔 투서가 쏟아진다.
그는 진급 문제로 누구보다도 많은 고생을 해봤기에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아 인사참모부장을 임명했다. “총장인 나도 누구를 진급시키라는 지시를 하지 않을 테니 누구의 부탁도 받지 말고 진급자를 선발하라”고 지시했다.
그가 총장을 하던 2004년 노무현 정부는 북한과 심리전을 중단하고 서해 NLL에서 남북한 함정이 교신한다는 합의를 했다. 그러나 그해 7월 북한 함정이 합의대로 교신하지 않고 NLL을 넘어와 교전이 벌어졌다. 당시 그는 NLL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인식을 주의 깊게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군 검찰을 독립시켜 군 검찰이 지휘관을 내사 및 수사할 수 있게 하자는 군 사법개혁을 추진했다. 남재준 총장은 이를 군을 정권에 예속시키고 군권을 약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기에 강하게 반대했다. 자신의 임명권자와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가을 원칙대로 심사를 해서 준장 진급자를 확정했는데,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이 국방부장관실을 통해 몇몇 사람을 바꾸라고 지시했다. 한밤중에 국방부 차관보가 헬기를 타고 계룡대로 내려와 그 뜻을 전했다. 그러나 남 총장은 진급 심사에 잘못이 없다면 바꿀 수 없다고 맞섰다. 안보에 대한 인식 차이와 군 사법개혁 문제 등으로 불편한 관계이던 청와대와 남 총장이 정면 충돌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육군이 결정한 대로 진급안을 결재하면서 그에게 “총장, 군통수권은 대통령에게 있으니 내가 하는 말도 들어줘야 합니다”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이 갖는 인사권은 법령에 따라 총장에 위임돼 있습니다. 총장이 인사권을 적법하게 행사했다면 받아주셔야 합니다”라고 대꾸해 대통령을 머쓱하게 했다고 한다.
이것이 군 시절을 통해 드러난, 그가 생각하는 군의 정치적 중립관(觀)이다. 그가 보는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관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사정은 과거와 다르다. 그는 시대와의 불화에 익숙한 소수파의 특징을 보인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 그는 자기 확신을 고집하며 살아야 했던 극소수파였다. 그러다 김영삼-김대중 정부 때 확 풀리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설 때는 정점을 맞았다. 그러나 노 정부의 색깔을 분명히 알고 나서는 다시 권력과 대립하는 길을 걸었다.
전역한 뒤에도 외골수적인 삶을 이어갔다.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서는 이명박과 박근혜가 경쟁했다. 양측은 노 정권에 맞섰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양쪽에 안보관을 묻는 질의서를 보낸 다음 답변을 받아 읽어보고 박근혜를 선택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누른 이명박 후보가 1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MB 정부 5년간 그는 서경대 군사학과 석좌교수 등을 하면서 조용히 지냈다. ‘셀프 개혁’ 압박
그와 대비되는 인물이 김장수 대통령 안보실장이다. 남재준 총장과 마찰을 겪은 노무현 정부는 다음 총장감으로 부드러운 사람을 찾았다. 남 총장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 청와대의 실력자가 기자에게 “김장수 연합사 부사령관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왜 김장수냐”고 되물으니 그는 “유연하잖아. 우리 요구도 들어줄 거고”라고 했다. 며칠 후 김 대장이 후임 총장으로 발표됐다. 김 총장은 2년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국방부 장관에 지명됐다.
김장수 장관은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던 군 사법개혁을 통과시켰다(개혁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해 부결됐다). 그리고 전임자인 윤광웅 장관 때 결정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과 관련해 미 국방장관과 그 시기에 합의했다. 보수세력이 반대하는 국방개혁은 대체로 그가 국방장관일 때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2차 남북정상회담에 따라갔다가 김정일과 꼿꼿한 자세로 악수해 ‘꼿꼿장수’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이 별명 덕분에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금배지를 달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을 하고 보수세력이 반대하는 국방개혁을 추진하던 이가 한나라당에 왔는데도 ‘꼿꼿장수’ 이미지가 워낙 강해 반발은 거의 없었다.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을 치르던 2012년, 김장수 씨는 총선 출마를 포기하고 박근혜 캠프에 합류했다. 박근혜 후보는 남재준과 김장수 모두를 얻었다.
대선에서 승리한 박근혜 당선인은 맨먼저 최측근이라 할 안보실장에 김장수 씨를 임명했다. 그리고 김병관 씨를 국방부 장관, 가장 늦게 남재준 씨를 국정원장으로 내정했다. 박 대통령이 깐깐한 남재준 원장을 어려워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야당과 비판세력은 그를 박 대통령의 복심(腹心)으로 이해하고 ‘공공의 적’으로 꼽았지만 실제로는 청와대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독립군’일 가능성이 높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박 대통령이 요구한 ‘국정원 셀프 개혁’이다. 박 대통령의 국정원 자체 개혁 요구에 대해 비판세력은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겼다”고 비난하지만, 실상은 ‘회의록을 공개해 문제를 일으킨 것은 남재준 국정원이니, 국정원이 야당과 싸우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방기(放棄)일 가능성이 높다. 국정원을 중심으로 한 정보체계는 안보의 핵심이기에 정권 차원에서 다뤄야지 국정원이라는 일개 기관에서 맡길 일이 아니다.
박 대통령이 요구한 셀프 개혁은 남 원장에게 화를 부르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북한은 북한대로 그를 고립시키는 전술을 구사할 것이니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황에 몰릴 수도 있다. 그를 구원했던 김관진 국방장관은 전 정권 사람이라 교체되면 그뿐이다. 그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박 대통령은 그를 교체할 수밖에 없다.
‘공공의 적’으로 몰리는 이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적막한 ‘국정사’에서 남 원장이 고민해야 할 문제는 그것이다. 해법은 필사즉생(必死卽生)으로 모든 것을 던지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김정은 정권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면 세상은 그가 생각한 안보논리로 회귀할 수도 있다. 그래야만 철저히 자기관리를 하며 불우한 여건에서도 굴하지 않은 그의 삶을 경쟁자들도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10여 년을 기다렸다가 기회 잡기를 반복해왔다. 지금 두 번째 10여 년이 막 끝나 그는 마지막으로 공직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첫 번째 10년이 끝나 운이 풀렸던 김영삼-김대중 정부 시절엔 일개 장군에 불과했기에 그는 큰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어찌 됐든 권력 2인자다. 한국의 안보는 남 원장이 어떤 행동을 결심하는지에 따라 크게 요동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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