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여름 어느 날. 이명박 대통령(MB)의 핵심 참모들은 청와대 비서동에 모여 개각 아이디어를 주고받고 있었다. 실물경제를 총괄하는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누군가 안철수 이름을 꺼냈다. 자신이 만든 안철수연구소의 사장 자리를 내놓고 이사회 의장으로 물러나 있던 그였다. 참석자 대부분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분야는 건설과 정보기술(IT)로 각각 다르지만 MB와 안철수는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고 성공한 기업인을 넘어 ‘신화’까지 만들어냈다.
청와대 참모들은 곧장 MB에게 보고할 ‘안철수 파일’ 작업에 들어갔다. 경제수석실은 물론이고 민정수석실의 검증 자료가 빼곡히 포함된 자료였다고 한다. MB도 ‘안철수 지경부 장관’ 안을 보고받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안철수 본인이 난색을 표했다. 안철수연구소 보유 주식 백지신탁과 매각 문제 등을 고민했던 것 같다는 게 MB 청와대 참모들의 분석이다. 당시 안철수는 연구소 주식 372만 주(전체의 37.1%)를 갖고 있었다.
지경부 장관 자리는 결국 최경환 의원(현 새누리당 원내대표)에게 갔다. 물론 최경환이 안철수의 ‘차선’이었던 건 아니었다. 안철수는 아이디어 차원이었지만, 최경환은 MB가 ‘꼭 써야 할 사람’이라고 꼽고 있던 후보였다. 다만, MB와 청와대가 안철수라는 인물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
서로 첫인상부터 좋았다. 김상협 미래비전비서관(현 KAIST 초빙교수)이 2008년 MB 취임 직후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회를 만들면서 미국에 있던 안철수에게 e메일을 보낼 때부터 그랬다. 김상협이 취지를 설명하자 안철수는 “(대통령직속 위원회 같은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런 뜻이라면 열심히 해 보겠다”고 열의를 보였다.
특히 ‘대기업 프렌들리 정책’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중소기업에 ‘스필오버 효과(spill over effect·낙수효과)’를 보이지 않자 미래기획위원회는 2011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부터 ‘공생발전’을 국정 운영 키워드로 내세웠다. 여기에는 안철수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 이에 앞서 김상협은 MB에게 ‘안철수 미래전략수석’을 건의하기도 했다. 대통령실에 가칭 미래전략수석비서관 자리를 신설해 안철수를 영입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안철수가 미래수석이 되면 김상협은 그 밑에서 비서관을 하게 될 공산이 컸다. 하지만 김상협은 개의치 않고 안철수를 찾아갔다.
김상협=“아직 (신설할 수석비서관실의) 명칭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만, 대통령의 허락을 얻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미래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발전하는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그 일을 추진하는 데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안철수=“(특유의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결국 대통령의 참모가 된다는 얘긴데…. 그건 본인의 의지도 있어야 하고, 캐릭터(성격)도 맞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둘 다 아닌 것 같습니다.”
안철수는 끝내 고사했다. 김상협도 더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그동안 미래기획위원회 일을 같이하면서 안철수라는 사람이 정치적 제스처나 허언(虛言)을 내뱉는 인물은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무렵만 해도 안철수가 정치적으로는 야권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안철수가 “안보는 보수고, 경제는 진보”라고 말한 것도 이런 행보와 무관치 않다.
그래서인지 그해(2011년)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 이후 오세훈이 전격 사퇴하면서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열리게 되자 청와대에선 ‘안철수 여당 서울시장 후보론’이 꽤 무게 있게 돌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실 핵심 관계자 A 씨의 회고. “안철수가 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지만 오세훈의 사퇴 과정에서 워낙 여야 간 정쟁이 심해 참신한 정치세력이 나타났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안철수 후보론이 돈 것 아니겠느냐.”
이 때문에 청와대는 안철수가 그해 9월 초 서울시장 보선에 출마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자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고 한다. MB도 그랬다. 그해 4월 ‘자폭 공천’이라는 말까지 나돈 여당의 경기 성남시 분당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유증 때문인지 MB는 여의도 정치권에 새삼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MB는 9월 6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열린 ‘추석맞이 특별기획, 이명박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안철수 돌풍에 대해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다.
홍보수석이던 이동관은 다소 긴장했다. 추석맞이 대화는 KBS에서 생중계될 예정이었다. 방송 전날 이동관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이동관=“틀림없이 안철수에 대해 질문이 나올 텐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MB=“음∼. 그렇겠지. 나한테 맡겨둬.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리고 MB는 방송에 나가 이렇게 말했다.
“정치권에 올 것이 왔다. 스마트 시대가 왔는데 정치는 아날로그에 머물러 있지 않나. 국민은 상당히 앞서가고 있다. 많은 변화 요구는 정치권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 아니냐? (그런 변화의 요구가) 안 교수를 통해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안철수 돌풍은 여야 정치권의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이즈음 MB는 안철수에 대해 호감을 넘어 미묘한 ‘동류의식’까지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이동관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내용이나 타깃 층은 다르지만 MB와 안철수 모두 ‘현상’이라고 할까, 일종의 시대정신을 기반으로 부상한 것이다. 2007년 대선 때도 유권자들은 기성정치권에 대한 환멸이 강했다. 그 환멸이 비즈니스맨 신화의 주인공인 MB를 불러낸 것이다. ‘안철수 현상’의 기저에는 2007년 대선 때 유권자들이 MB에게 갈망하던 것과 같은 변화의 욕구가 있었다. 대통령이 누구하고도 상의하지 않고 ‘올 것이 왔다’고 말씀하신 배경에는 그런 인식이 깔려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MB와 청와대의 안철수에 대한 호감은 안철수가 돌연 서울시장 후보를 박원순에게 양보하고 대선주자 반열로 올라서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MB는 그해 초부터 여당 대선 후보로 ‘박근혜 불가피론’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던 차였다. 무엇보다 MB는 안철수를 ‘시대적 현상’으로 봤지, 대선주자로는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안철수의 지지율이 오르자 일부 측근은 안철수의 ‘여당 후보’ 가능성을 흘렸다. MB가 한때 안철수를 국무총리 후보로까지 생각했으며, 대선주자로 눈여겨보고 있다는 듯한 신호를 퍼뜨리면서….
“내가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했잖아!” MB는 거의 공개적으로 측근들을 질책했다.
해를 넘겨 2012년 초. 대선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19대 총선이 다가오는데도 안철수는 대선 출마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고민을 거듭했다. ‘안개 정국’이었다. 안철수가 4월 총선 직전 유튜브에 투표 독려 영상을 올리자 MB는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안철수는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안철수 현상은 이해할 수 있지만, 현실 정치에 기반도 없는 사람이 저렇게 해서(출마를 머뭇거려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MB는 안철수의 스타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MB의 ‘안철수 지원설’은 끊이지 않았다. 4월 총선 공천에서 배제된 MB의 핵심 참모들이 안철수 진영에 합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임기 첫해에 대통령연설기록비서관을 했던 이태규는 얼마 뒤 안철수 진영에 합류했다. MB의 핵심 측근으로 통하는 B, C 씨도 안철수 측으로부터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으나 사양했다는 후문이다.
안철수의 출마 선언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그해 늦여름. 일부 여론조사에서 안철수가 다자 대결에선 박근혜를 오차범위 내에서 앞서는 것으로 나오자 MB, 또는 MB 참모들의 안철수 지원설이 다시 불거졌다.
그해 가을, MB의 핵심 참모인 D 장관과 일부 청와대 출입기자가 이런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
기자들=“대통령이 대선에서 누굴 밀지 내기를 거는 사람이 많다.”
D 장관=“이런 일은 상식적으로 봐야 한다. 대통령은 새누리당 당원이다.”
기자들=“대통령은 실용주의자 아닌가?”
D 장관=“그렇다고 막말로 안철수를 밀면 ‘퇴임 후’가 보장되나? 정도(正道)로 가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이즈음 MB의 머릿속엔 안철수란 이름이 들어 있지 않았다. 안철수가 결국 출마를 포기했을 때도 MB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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