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환란 주범서 소방수로… “모피아 시대는 지지 않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31일 03시 00분


‘甲중의 甲’ 기재부


▼환란 주범서 소방수로… “모피아 시대는 지지 않는다”

“정부는 단순한 금융위기로 보고 근본적인 구조조정을 취하지 못한 채 외환 확보 정책에만 주력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외환위기의 책임은 재정경제원에 있습니다.”

1999년 1월 18일 오전 10시, 국회 본관 501호실. 10년 전 ‘5공 청문회’가 열렸던 이곳에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을 비롯한 재경부 주요 간부들이 들어섰다. 외환위기 원인 규명을 위한 경제청문회에 출석하기 위해서다. 의원들의 질타가 이어지자 이 장관은 결국 고개를 숙이며 재경부의 책임을 인정했다.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의 ‘절대 갑(甲)’으로 군림하던 ‘모피아’가 맞은 최대 위기였다. 금융정책과 금융감독 권한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던 모피아에 ‘외환위기의 주범’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모피아를 청산하려는 움직임도 이어졌다. 금융과 예산, 세제를 총괄하던 부총리급 재경원을 장관급 재경부로 격하시키고 관치(官治)금융의 핵심으로 떠오른 금융정책실을 국제금융국과 금융정책국으로 쪼갰다. 외환위기 당시 금융정책을 담당했던 주요 간부들은 산하 기관이나 해외 국제기구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던 모피아의 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숨을 죽였던 모피아는 외환위기의 충격파가 가라앉기도 전에 기업 구조조정의 칼자루를 쥐면서 ‘한국 경제의 소방수’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모피아를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부 경제팀의 요직은 돌고 돌아 결국 모피아의 차지가 되는 현상이 반복됐다. 금융공기업과 금융 관련 협회, 민간은행 수장 역시 모피아로 분류되는 경제 관료들이 꿰찼다.

경제성장기에 태동한 관료 파워의 핵 ‘모피아’

1982년 3월 31일 서울 중구 회현동 무역회관에서는 재무부 출신 전직 관료들의 친목모임인 ‘재우회(財友會)’ 발족식이 열렸다. 이날 발족식에는 남덕우 전 재무부 장관을 비롯한 전직 장관들, 시중은행장, 금융공기업 사장 등 금융계를 좌지우지하던 180여 명의 재무부 출신 인사들이 참석했다. 1970년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관치금융을 통해 경제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모피아 시대를 공식화하는 신호탄이었다.

정부 수립 초기 경제 권력은 재무부와 경제기획원(당시 기획처), 한국은행이 나눠 갖고 경쟁했다. 예산과 기획은 기획처, 금융과 세제는 재무부, 외환정책과 금융감독권은 한은이 쥐는 식이었다. 1960년대 들어 재무부가 한은의 권한 상당 부분을 가져왔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주도한 경제기획원을 넘어서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가 커지기 시작한 1970년대 들어 금융과 세제, 당근과 채찍을 모두 쥐고 있던 재무부로 경제 권력의 균형추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모피아가 맞은 첫 전성시대를 대표하는 1세대 인물들은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과 장덕진 전 농수산부 장관이다. 김 전 장관은 1966년 재무부 이재국장을 거쳐 차관보, 차관 등 승진가도를 달렸고, 장 전 장관은 이재국장, 차관보, 경제기획원 차관 등을 뒤이어 역임했다.

특히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을 업은 김용환 재무부 장관 취임 이후 재무부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김 전 장관은 취임 직후 한은 은행감독원에 대기업 대출 규제를 총괄하는 여신관리국을 신설하고 재무부 이재국 출신을 국장에 앉혔다. 재무부가 은행감독원을 통해 금융권과 대기업의 자금줄을 틀어쥐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70년대 중반부터 재무부 출신들이 민간 금융회사를 장악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예전 모피아의 권력을 묘사하던 ‘재무부 10년, 은행 10년, 제2금융권 10년’, ‘재무부 관료의 정년은 70세’라는 속설이 등장한 것도 이때다.

실제로 1975년 재무부 차관보에서 물러난 한 관료는 이후 주택은행장, 경남은행장, 중앙투자금융 사장, 한국투자신탁 사장을 거쳐 전국투자금융협회장을 지낸 뒤 재무부를 떠난 지 18년 만인 1993년에야 금융권 요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금융공기업 사장을 지낸 한 인사는 “용퇴하는 선배에게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당시에는 재무부 인사계가 공공연하게 퇴직 관료들을 관리했다”며 “1980년대 말에는 은행이나 증권 관련 기관장 중 재무부 출신이 아닌 사람은 두어 명에 불과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외환위기 구원투수로 화려한 부활

문민정부를 자처한 김영삼 정부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해 재정경제원을 출범시켰다. 금융과 세제에 예산 편성 권한까지 모두 휘두르게 된 모피아는 재경원 체제 아래 더욱 세력을 키웠다.

한 기획재정부 출신 인사는 “원래 흔히 경제 부처를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관료는 ‘어너러블(honorable)’, 실권을 가진 재무부 관료는 ‘파워풀(powerful)’하다고 평가했는데 경제 3권(예산, 세제, 금융)이 합쳐진 재경원은 명예와 힘을 모두 갖게 된 셈”이라고 말했다.

‘공룡 부처’로 절대 경제 권력을 쥔 모피아는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맞으며 큰 타격을 입었다. 재경원은 ‘외환위기의 주범’이라는 손가락질 속에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로 분리됐다. ‘이번 기회에 모피아 독주 체제를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모피아의 아성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외환위기는 오히려 모피아가 제2의 전성시대를 맞는 계기가 됐다. 대체 세력을 찾지 못한 김대중 정부가 관치금융의 폐해를 막기 위해 설치한 금융감독위원회의 주도권을 결국 모피아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세대 모피아를 대표하는 인물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다. 1974년 재무부 금융정책과장을 맡으면서 김용환 전 장관의 방을 수시로 들락거려 ‘부(副)장관’으로 불렸던 이 전 부총리는 1998년 금감위원장을 맡아 금융 구조조정과 부실 기업 정리를 주도했다. 이 전 부총리가 모피아의 중심으로 등장한 데도 김 전 장관의 역할이 컸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 전 장관은 조세연구원(현 조세재정연구원) 자문위원으로 나가 있던 이 전 부총리를 외환위기 극복의 소방수로 불러들였다.

금융·대기업 개혁의 칼을 쥐고 은행 합병, 대우그룹 해체 등을 주도한 이 전 부총리는 구조조정 실무 업무를 민간 전문가들과 함께 재경부의 전신인 재무부 금융정책국 출신들에게 맡겼다. 이때 이 전 부총리의 부름을 받은 인물들 가운데 재경원 금융정책국장 출신으로 나란히 금감위 부위원장, 증권선물위원장, 산업은행 총재를 지낸 정건용 나이스(NICE)그룹 금융부문 회장과 유지창 유진투자증권 회장, 그리고 재경부 금융정책국장과 금융정보분석원장을 지낸 뒤 민간으로 나간 변양호 보고펀드 대표 등이 있다. 이른바 ‘이헌재 사단’의 핵심들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외환위기 당시 재경원 차관을 지내다 외환위기로 밀려났던 강만수(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 지냄), 외환위기 때 재경원 금융정책실장으로 금융정책을 총괄했던 윤증현(기재부 장관), 강력한 외환정책으로 국제금융시장의 투기세력을 벌벌 떨게 만들던 최중경(지식경제부 장관),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재경부 차관을 지낸 뒤 민간으로 떠나 있던 김석동(금융위원장) 등이 대거 복귀하며 다시 모피아의 전성기를 꽃피웠다.

정치권-대기업에도 포진

모피아가 한국 경제 주도 세력의 위치를 확고히 한 1980년대부터 모피아를 권력의 정점에서 끌어내리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그때마다 모피아의 대항마로 등장했던 대표적인 세력이 경제기획원 출신 관료들이다.

예산과 경제정책 기획이 특기인 경제기획원은 박정희 정부 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같은 비전 제시에는 뛰어나지만 끈끈한 조직문화는 모피아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획예산처 출신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모피아는 ‘팀워크’를 중시하는 축구, 경제기획원은 개인 역량이 중요한 야구를 주로 즐긴 것을 봐도 두 집단의 조직문화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 관가에서는 “경제기획원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초대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현오석 전 한국개발연구원장,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에 조원동 전 조세연구원장 등 경제기획원 출신들이 임명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민간 금융회사와 금융 관련 협회, 금융공기업 수장 자리를 모피아로 분류되는 전직 관료들이 차지하면서 “모피아의 시대는 지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과거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대 대통령들은 집권 초기 모피아를 멀리하려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모피아를 다시 찾았다. 모피아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이들은 그 이유로 끈끈한 선후배 관계에 따른 ‘인의 장막’을 들지만 모피아 내부에서는 현실감각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한 탁월한 위기 대응 능력을 꼽는다.

한 기재부 간부는 “‘경제기획원이 하늘을 볼 때 모피아는 땅을 살핀다’는 말이 있다”며 “경제위기 조짐이 나타날 때 풍부한 정책 경험과 순발력 있는 정책 생산 능력을 가진 쪽이 부각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든든한 인적 네트워크와 강한 추진력을 갖춘 모피아는 정치권이나 대기업에도 적지 않게 진출해 있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김진표 이용섭 민주당 의원 등이 대표적인 재무부 출신 정치인이다. 이현승 SK증권 사장, 방영민 삼성증권 부사장 등은 각각 서기관, 과장 시절 관직을 떠나 대기업 금융계열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1998년 재경부 공보관을 지낸 뒤 부실 기업이었던 코리안리 사장으로 취임해 5차례에 걸쳐 재임에 성공하며 회사를 세계적인 재보험사로 끌어올린 박종원 코리안리 고문 역시 실적으로 ‘낙하산’이라는 딱지를 떼어낸 모피아 출신으로 꼽힌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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