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차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6일(현지 시간)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파워 우먼’이 만났다. 박근혜 대통령과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여성이라는 점 외에도 공통점이 많은 두 사람이다. 양국의 첫 여성 리더라는 점, 이공계 출신이라는 점, 추구하는 정책 방향까지 닮았다.
둘 사이 공통분모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패션’이다.
메르켈 총리는 단추가 서너 개 달린 재킷과 정장바지가 트레이드마크다. 독일 디자이너 베티나 쇤바흐가 메르켈 총리가 입는 거의 모든 옷을 제작하는데, 똑같은 디자인에 색상만 달리한 옷들이다.
박 대통령도 트레이드마크가 된 패션 스타일이 있다. 엉덩이를 살짝 덮는 길이의 재킷과 정장 바지. 재킷은 대체로 차이나칼라이거나 깃을 세운 원브레스티드(단추를 한 줄로 잠그는 디자인) 형태다. 메르켈 총리 스타일처럼 빨강 노랑 파랑 등 색상도 다채롭다.
박 대통령이 최근 공식 석상에서 입는 옷들도 한 사람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훨씬 전부터 서울 강남의 한 의상실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취재진의 방문에 이 의상실 디자이너는 ‘확인해줄 수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VVIP(매우 매우 중요한 인물)’ 고객에 대한 예의인 듯했다.
박 대통령이 유명 브랜드나 유명 디자이너 대신 입이 무거운 개인 디자이너를 선택한 것은 어려서부터 체득한 ‘공인(公人)의식’의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즐겨 입는 패션 브랜드도 사생활의 영역으로 생각해 노출되는 것을 극히 꺼린다는 것이다.
유럽의 누리꾼들은 메르켈 총리의 단조로운 패션 스타일을 조롱하기도 한다. 그가 공식 석상에 입고 나온 똑같은 디자인의 재킷 50여 벌을 하나의 사진으로 편집해 여기저기로 퍼 나르기도 했다. 명도, 채도만 조금씩 달리한 보라색, 분홍, 하늘색 재킷들은 피부색만 다른 일란성 쌍둥이 같았다.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샤넬’을 이끄는 독일인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도 이런 옷차림에 ‘독설’을 퍼부었다. “패션에 대해 아무리 조언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군복 연상 롱재킷 별로… 여성적 라인 살렸을때 호평
박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보다는 유리하다. 그의 스타일을 선망하는 ‘패션 지지자’가 많기 때문이다.
대통령 패션 지지자들의 실체는 매출로 확인됐다. 여성 캐주얼 브랜드 ‘크로커다일레이디’는 박 대통령의 평소 스타일과 이미지를 반영해 ‘캐주던트(캐주얼+프레지던트)’란 이름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상품을 내놓았다. 불황에도 불구하고 ‘캐주던트’ 스타일 의류의 판매량은 다른 제품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특히 중장년층 여성 가운데 박 대통령의 스타일을 따라하고 싶어 하는 고객이 많은 것으로 브랜드 측은 분석했다.
일반적으로 여성 정치인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냉정하다. 여성 정치인과 퍼스트레이디들의 옷차림 전략에 대한 책, ‘파워 드레싱(Power dressing)’을 쓴 영국의 패션 칼럼니스트 로브 영은 “대중은 여성 지도자들에게 이중적 잣대를 들이댄다”라고 했다. 그들을 대표하는 리더가 연예인 수준으로 멋져 보이길 원하면서도 사치스러운 건 경계한다는 의미다.
패션을 ‘사치’의 동의어쯤으로 보는 한국에선 신경이 더 쓰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저울질한 끝에 박 대통령이 내린 전략적 결론은 ‘예측 가능한 파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옷의 디자인은 평범하게 둔 채, 알록달록 다채로운 색으로 ‘색(色)의 정치’를 시도한 것이다.
‘패션 테러리스트’와 ‘완판녀’ 사이, 이 큰 간극 속에서 박 대통령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취임 후 6개월. 대한민국 패션 전문가들이 내린 ‘박근혜 패션정치’의 성적은 몇 점일까. 최근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60∼70%)보다는 낮고 지난 대선 지지율(52%)보다는 높은 수준이란 게 대체적인 평가다.
박근혜 대통령은 스스로의 옷차림에 대해 얘기하거나 화제가 되는 걸 꺼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모태(母胎) 공인’으로서, 과거에 옷차림 때문에 구설에 올랐던 다른 정치인들의 사례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성 정치인에게 옷차림은 정치의 일부분이다. 게다가 박 대통령은 요가로 다진 날씬한 몸매와 단아한 외모 덕분에 ‘옷발’이 잘 받는 스타일이다. 불황에 시름하는 국내 패션계는 그가 국내 패션 발전에 불쏘시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패션 폴리틱스’는 성공할 수 있을까. 동아일보 취재팀은 국내 정상급 패션 전문가 30명과 함께 박 대통령의 패션을 평가했다. 간호섭 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교수, 이정민 트렌드랩506 대표, 황선아 인터패션플래닝 책임연구원, 박명선 패션 스타일리스트, 강진주 퍼스널이미지연구소장, 정연아 이미지컨설턴트협회장, 한혜연 패션 스타일리스트, 권희균 나비컴 이사와 국내 주요 여성복 브랜드 디자인실장 등 익명을 요구한 패션업계 권위자들이 분석에 참여했다.
○ “군복 한복 코스프레?” vs “그만하면 선방”
전문가단은 먼저 1968년부터 2013년 9월 현재까지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에 축적된 박 대통령의 사진 약 3만 개 중 의미 있는 것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박 대통령의 ‘패션 아이덴티티’를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필하던 영애 시절, 박 대통령은 주로 옆으로 넓게 퍼지는 플레어 주름 스커트를 입었다. 허리띠를 즐겨 매면서 자연스럽게 ‘모래시계’ 라인이 형성됐다. 박 대통령의 패션이 가장 여성적이던 시절이었다.
정계 진출 초기에도 영애 시절 스타일이 일부 남아있었다. 1998년 3월,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에서 대구 달성 보궐선거 후보 공천장을 받을 당시엔 무릎길이 플레어스커트와 허리까지 내려오는 짧은 재킷을 입었다.
2004년 이회창 후보가 대선에 연패하고, 불법 대선자금이 드러나 당의 지지율이 추락하자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천막당사로 이전하는 결단을 내렸다. 강 소장은 “이미지 개선에 성공하며 정치 고수의 풍모를 보였던 이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바지 정장을 입었다”라고 전했다. 이 바지 정장은 ‘전투복’으로 불렸다.
강 소장은 “박 대통령은 패션을 통해 여성성과 남성성을 적절히 이용해 왔다”고 분석했다. 강하게 이슈를 제기할 때는 바지 정장을, 타협과 화합이 필요할 때는 스커트 정장을 입는 식이었다.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군복에서 디자인을 차용한 듯한 딱딱한 디자인, 짙은 무채색의 정장을 즐겨 입었다. 취임 후에야 부드러운 파스텔톤으로 여성적인 디테일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취임 이후 패션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패션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한국 사회에서 이 정도 입는 것도 선방하는 것” “색깔을 활용한 이미지 정치를 나름대로 훌륭히 해내고 있다”고 호평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옷맵시 좋은 체형… 패션업계 ‘박근혜 효과’ 큰 기대
한 패션 전문가는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의 요즘 패션 스타일을 벤치마킹하라고 조언하고 싶지만 클린턴은 이탈리아 고급 브랜드 ‘조르조 아르마니’를 즐겨 입는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비난을 감수하고 감히 ‘명품’을 입을 수 있겠나”라며 ‘동정론’을 펼쳤다.
혹평을 내놓은 전문가들은 날선 코멘트를 쏟아냈다. 한 전문가는 “아버지의 군복, 어머니의 한복을 어정쩡하게 결합해 부모님 패션의 ‘코스프레’를 하는 것 같다”라고 평했다. “A라인 재킷과 어정쩡한 길이의 바지 정장만 고수하는 모습이 1970년대에 찍은 흑백 사진 속 모습 같다”라는 평가도 있었다.
지금까지 박 대통령이 입었던 옷 가운데 전문가들이 꼽은 베스트는 대체로 전형적인 ‘박근혜 스타일’에서 벗어난 것들이었다.
6월 중국을 국빈 방문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부부와 만난 자리에서 입었던 연분홍색 재킷은 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자주 시도하지 않았던 라운드 네크라인이 온화한 느낌을 줬다는 설명이다. 지난달 26일 청와대에서 존 매케인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 셸던 화이트하우스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과 만날 때 입었던 파란색 재킷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6월 방중 당시 베이징(北京) 서우두 공항에 도착할 때 입었던 흰색 재킷도 합격점을 받았다. 칼라와 단추 여밈 부분에 검은색 테두리 장식이 된 디자인으로 블랙&화이트의 조합이 요즘 트렌드에 잘 맞는다고 평가됐다.
반대로 전형적인 ‘박근혜 스타일’은 ‘워스트 패션’으로 꼽혔다. 자주 입는 카키색 롱 재킷이 가장 먼저 도마에 올랐다. 한 전문가는 “아무리 밀리터리룩이 유행한다고 해도 중국 인민복처럼 보이는 건 문제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또 앞섶에 단추를 많이 다는 디테일은 ‘나를 꽁꽁 감추고 싶다’는 느낌을 줘 ‘불통’의 이미지를 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재킷에만 힘을 준 나머지, 바지나 구두는 늘 같은 스타일로 ‘대충대충’ 연출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지난달 7일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국내 인문, 문화 분야의 석학들을 초청해 오찬간담회를 가질 때 입었던 ‘긴 원피스+짧은 재킷 차림’은 최악의 패션 아이템으로 평가됐다. “발목까지 오는 긴 원피스에 ‘땡땡이’ 무늬 재킷을 입은 모습이 1980년대 여대 동창회 모습을 연상케 한다”는 평가가 나왔다.
○ ‘박근혜 효과’를 기대하며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 뒤 1년간 퍼스트레이디인 미셸 오바마 여사가 일으킨 패션 경제 효과가 27억 달러(약 3조 원)에 이른다는 분석을 내놓은 적이 있다. 박 대통령이 의도하지 않게 소소히 노출시킨 패션 아이템들이 품절 현상을 빚었던 걸 떠올리면 ‘박근혜 효과’도 ‘미셸 오바마 효과’ 못지않을 수 있다는 게 패션업계가 거는 기대다.
국내 누비 전문 브랜드 ‘소산당’이 대표적 사례. 이 브랜드는 올 3월을 기점으로 운명이 달라졌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농협하나로클럽을 찾은 박 대통령이 물건 값을 치르느라 꺼내 든 지갑이 이 업체의 4000원짜리 제품이었다는 사실이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부터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의 한 빌라 지하에 소박하게 둥지를 틀고 있던 이 영세 업체의 웹사이트는 이후 접속이 집중되면서 다운되기도 했다. 단체 주문도 늘었다. 롯데백화점은 7월 여름 정기세일 사은품으로 이 업체의 지갑 6000개를 주문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리자 박윤주 대표는 직원을 과거의 2배 수준인 10명으로 늘렸다. 일용직이었던 직원들의 신분도 4대 보험이 적용되는 정규직으로 바뀌었다. 소산당은 인력이 늘면서 현재의 작업실이 좁아 조만간 가까운 곳의 더 넓은 장소로 이사한다.
서울 남대문시장의 한 액세서리 도매업체도 ‘박근혜 효과’를 봤다. 박 대통령이 즐겨 착용하는 브로치 제품을 이 업체가 생산·공급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주문이 집중된 것이다. 롯데백화점은 6월 말 서울 중구 소공동 본점 영플라자 옥상공원에서 열린 ‘플리마켓’에 남대문 출신의 보석 디자이너를 초청했다. ‘박근혜 대통령 브로치’란 이름을 단 모델들은 품절 사태를 빚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패션 정치’는 아직 패션업계가 기대했던 대규모의 경제효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맞춤복만 고수해 패션 지지자들이 같은 제품을 쉽게 구입할 수 없고, 기성품인 구두나 시계도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10여 년 전 제품이어서다.
한 패션 평론가는 박 대통령이 다양한 패션 전략으로 국내 관련 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지 못한 점을 일종의 ‘직무 유기’로 봐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대통령의 패션은 1970년대 ‘양장점 시대’에서 ‘기성복 시대’로 넘어오지 않고 있다. 1970년대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인지 헷갈린다”라고 덧붙였다.
○ ‘색의 정치’에서 ‘선의 정치’로
동아일보는 새 스타일에 대한 국내 패션업계의 염원을 담아 새로운 패션을 박 대통령에게 제안하기로 했다.
간 교수는 “박 대통령이 이미 ‘색의 정치’는 충분히 그 효과를 입증했기에 ‘선(線)의 정치’를 제안하는 데 주력했다”고 설명했다. 느슨해 보이던 옷의 라인에 긴장감을 주는 것만으로도 훨씬 더 세련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컴퓨터그래픽 소프트웨어 전문기업인 에프엑스기어의 연구진들은 새로 제안한 옷들을 박 대통령의 ‘3차원(3D) 아바타’에 입혔다.
간 교수팀은 먼저 새로운 바지 정장 스타일을 제안했다. 어깨 라인은 기존에 즐겨 입던 남성적 느낌을 그대로 살리면서 허리 부위에 가는 벨트를 달아 여성적 곡선을 강조한 것이다. 어정쩡한 길이라 ‘에지(edge)’가 없다고 지적된 바지는 통을 줄였다. 또 박 대통령이 고수하는 코가 뭉툭한 로퍼 대신 코 끝이 날렵한 구두를 추천했다.
코트형 원피스 정장은 기존에 박 대통령이 즐겨 입던 발목 길이 대신 무릎 아래로 살짝 내려오는 정도로 길이를 조절해 제안했다. 영애 시절 즐겨 입던 여성스러운 ‘프린세스 룩’을 복원한 것이다.
민생 현장을 누빌 때 입을 옷으로는 엉덩이 아래까지 길게 덮는 조끼형 롱 재킷을 추천했다. 워킹우먼의 활동성을 살리는 셔츠형 블라우스로 젊고 활기찬 이미지를 냈다.
박 대통령이 참고할 만한 패션 ‘롤 모델’로 전문가들은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꼽았다.
각각 자국의 럭셔리 브랜드 제품을 즐겨 사용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지만, 때와 장소 그리고 트렌드에 맞는 옷차림으로 패션을 정치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주인공들이다.
대처 전 총리는 1986년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누구를 위해 옷을 입느냐고요? 옷을 때와 장소에 맞게 잘 입는 것은 국가가 제게 부여한 임무 중 하나입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임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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