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해제 MB5년]<24>정몽준의 한나라당 적응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7일 03시 00분


“정몽준이 대표 되면 한나라당 문 닫는다” SD 반대에도…

2009년 11월 30일 한나라당 최고위원단의 청와대 초청 조찬간담회에서 인사하고 있는 정몽준 대표(왼쪽). MB는 참모들에게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추억을 자주 언급했지만, 정몽준과는 그런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냥 정치인으로만 대했다. 2007년 12월 3일 정몽준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날 조찬을 함께했을 뿐 그 전까지는 한 번도 둘이서 따로 식사를 한 적도 없다. 동아일보DB
2009년 11월 30일 한나라당 최고위원단의 청와대 초청 조찬간담회에서 인사하고 있는 정몽준 대표(왼쪽). MB는 참모들에게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추억을 자주 언급했지만, 정몽준과는 그런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냥 정치인으로만 대했다. 2007년 12월 3일 정몽준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날 조찬을 함께했을 뿐 그 전까지는 한 번도 둘이서 따로 식사를 한 적도 없다. 동아일보DB
《정양석 대표비서실장, “얼마 전 청와대 회동에서 정몽준 대표의 얼굴이 굳어졌다. (친이계인) 장광근 사무총장이 사전에 보고도 없이 시도당 위원장들을 청와대로 데려가려고 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요즘 정 대표는 장 사무총장을 아예 만나지 않으려고 하고, 전화도 안 한다.”(2009년 12월 4일 한나라당 출입기자 정보보고)》   
     
        

“이 와중에 어디를 가는 거야?”

전화기 속 남자의 목소리가 낯이 익긴 한데 잡음 때문에 누구인지 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스튜어디스가 급하게 깨우는 바람에 조종실로 가 항공용 위성전화기에 귀를 가져다대기는 했지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2008년 3월 13일 인천공항발(發) 스위스 취리히행(行) 대한항공 일등석. 국제축구연맹(FIFA) 총회 참석을 위해 해외출장길에 오른 한나라당 정몽준 의원(MJ)은 마음이 급해졌다. 숱하게 비행기를 탔지만 지상에서 기내로 걸려온 전화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요즘은 일반석에서도 기내전화를 이용할 수 있지만, 그건 ‘걸 수만 있는 전화’지 ‘받을 수 있는 전화’는 아니다. 상공을 날고 있는 비행기로 전화가 걸려온다는 건 웬만한 비상상황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조종실 안의 잡음이 심해 살짝 짜증이 났다. ‘인마, 잘 안 들린다, 끊어!’라고 할 뻔했다. 하지만 귀를 기울여 다시 들어보니 평소에 자주 듣던 이명박 대통령(MB)의 목소리였다.

“저도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가는 겁니다.”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은 MJ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나라당은 18대 총선(4월 9일)을 앞두고 있었다. MB가 취임한 직후 치러지는, 말 그대로 ‘MB의 선거’였다. 당 공천심사위원회는 당초 MJ를 울산 동구 후보로 내정했다. MJ의 현대중공업이 있고, 한나라당에 입당하기 전까지 내리 5선을 한 지역구였다. 하지만 ‘서울 승리’를 위해선 인지도가 높은 MJ를 서울로 징발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공심위원장은 과거 울산지청장을 지내기도 했던 안강민 전 대검 중수부장이었다. 공심위의 의견은 즉각 청와대에 전달됐다.

정작 당사자인 MJ만 긴박하게 돌아가는 공천 상황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MB가 ‘이 와중에’라는 단어를 사용할 만했다.

“서울 출마를 생각해 봐.” 조종실 위성전화기에서 흘러나온 MB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통합민주당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과 서울 동작을에서 정면승부를 펼치라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확답을 할 수는 없었다. 내리 5선을 했던 지역구를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MJ는 취리히에 내리자마자 후원회장인 이홍구 전 국무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홍구는 자초지종을 들은 뒤 “정동영은 호남을 대표하는 정치인인데 꼭 (그런 사람과) 선거를 해야 하느냐”고 만류했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상황. 당 공심위가 이미 결정을 내렸고 MB도 직접 전화를 걸어 권유한 상태라 되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MJ는 15일 급거 귀국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당사에서 “정치 인생을 새로 쓰고자 한다”며 출마를 선언했다. MJ의 기억. “서울에 출마한다니까 나보고 함정에 빠진 거라는 얘기가 있었어요.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단일화에 나섰던 기억 때문인지 한나라당에선 나를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하지만 여러 가지 생각해서 출마한 거예요.” 6년 전 한나라당의 대선 패배에 ‘기여’했던 정치적 부채를 이번 기회에 털어버리고 싶었다는 얘기다. 그러곤 보란 듯이 당의 수도권 돌풍을 주도하며 큰 표차로 승리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MJ에게 ‘여전히 먼 당신’이었다. 역학 구도부터 그랬다. 친이(친이명박)계는 당 주류로 위세를 떨치고 있었고, 친박(친박근혜)은 비주류로 친이계와 첨예한 갈등 구도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굴러 들어온 돌’이자 ‘무계파 정치인’인 MJ로서는 한계를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특히 친이계의 텃세가 만만치 않았다. 2008년 7·3 전당대회 때도 그랬다. MJ는 정작 어렵게 서울에 입성해 6선 의원이 됐지만 지역 주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선수(選數)가 많아 국회 상임위원장이나 원내대표에도 나설 수가 없었다.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혈혈단신으로 한나라당에 입당(2007년 12월 3일)한 지 반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지만 전당대회 출마를 강행했다. 원외위원장들은 물론이고 현역 의원조차 누가 누군지도 몰랐던 그로서는 쉽지 않은 결심이었다. 부산 지역 초선의원 한 명과 조찬을 하기 위해 서울 마포의 한 호텔에 들어서다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이 의원 수십 명과 조찬을 하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진입장벽이 그만큼 높았다.

게다가 MB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SD)이 대놓고 자신을 반대한다는 얘기까지 들렸다. 불과 몇 개월 전 총선 때 격전지에 출마한 것에 대해 ‘고맙다’며 격려 전화까지 걸었던 SD였기에 서운한 마음은 더했다. 그래서 SD와 친분이 있는 한 중진 의원에게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얘기했다. 전당대회 며칠 전, SD가 전화를 했다.

SD=“이상한 얘기를 들었어요.”

MJ=“….”

SD=“박희태 전 부의장과 정 의원 사이에서 나는 완전히 중립이에요. 박 전 부의장은 만난 적도 없어요.”

MJ=“후보를 만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런데 특정 후보를 가리키며 절대 안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거죠!”

MJ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물론 내가 무소속을 오래 했기 때문에 이상득 전 부의장의 얘기도 일리는 있어요. 하지만 내가 대표가 되면 ‘한나라당이 문을 닫는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래도 MJ는 전당대회에서 2위를 차지해 최고위원이 됐다. 1위는 박희태. 이듬해 9월엔 박희태가 경남 양산 재선거에 출마함에 따라 MJ는 대표직까지 승계했다. 입당 21개월 만에 168석의 거대 여당을 이끄는 수장이 된 것이었다. 공직이나 기업으로 치면 ‘초고속 승진’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시험대에도 오르게 됐다. 그 자신 개인적으로는 재벌그룹의 오너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이명박 한나라당의 ‘낙하산 CEO’나 마찬가지였다. 한나라당 당원이나 당료들의 인식은 그랬다. 대표 임기 내내 불화를 빚었던 장광근 사무총장은 MJ를 향해 “한나라당을 알지도 못하면서 ‘오너십 경영’을 하려고 한다. 대표는 오너가 아닌데 정말 웃기는 사람이다”라며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MJ는 집권 여당의 대표로서 뭔가를 보여줘야 했다. 방법 중 하나가 당내에서 가장 조심스러웠던 ‘MB 인사’ 문제였다. 그것도 MB에게 직접 얘기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위상을 굳히겠다는 생각이었다. 대표직을 승계한 직후 어느 날, MJ는 MB를 만나 작심한 듯 먼저 당내 문제부터 언급했다.

MJ=“이재오 의원이 (지난해 총선에서)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희태 전 부의장을 공천에서 떨어뜨린 것이 아닙니까. 이 의원을 대표로 만들어 당을 꾸려가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MB=“그게 아니야.”

MJ=“그런데 이 의원이 덜컥 떨어지니까 이번엔 박 전 부의장을 당 대표로 만든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내가 볼 때는 권력의 오만입니다. 권력이 있으니까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상식에 맞는 일이 아닙니다.”

MB=“그게 아니라니까!”

MB와 MJ의 대화는 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과거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대화 분위기와는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아마도 두 사람의 뿌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MB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도와 신화를 만들었고, MJ는 정 전 회장의 6남으로 현대중공업 회장 출신의 ‘현대가(家)’ 일원이다.

비슷한 시기 정치를 시작했지만 길은 달랐다. MJ는 1992년 부친인 정주영 회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통일국민당을 만들 때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MB는 경쟁 후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자당행을 택했다.

MB가 현직 대통령이고, 열 살이나 연장자이지만 MJ의 무의식 속엔 어쩌면 ‘월급쟁이 사장을 바라보는 오너가(家)의 시선’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MB도 MJ만 보면 자꾸 옛날 생각이 오버랩됐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MJ는 MB를 별로 어려워하지 않았다.

MB가 당선인 시절이던 2008년 1월 초 어느 날, 이런 대화도 나누었다.

MJ=“총리는 정하셨나요?”

MB=“아직 못 정했지.”

MJ=“잘됐네요. 야당 원로 한 분이 있는데요.”

MB=“그 사람이 해주면 좋은데, 하겠어?”

MJ=“청와대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곧바로 MJ는 그 야당 원로 인사를 만났다. “(정권을 떠나) 새롭게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설득의 요지였다. 하지만 야당 원로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 야당 원로는 “배신자 취급을 받을 것 같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MB 정부 5년. MJ는 MB의 권유로 입당했지만 당내 계파의 틈바구니 속에서 좀처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한나라당, 아니 새누리당에 적응 중이다.

고성호 기자 sungho@donga.com
#MB#MJ#정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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