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준 국정원장(사진)은 엉거주춤 서 있는 11명의 80대 탈북 국군포로 할아버지들에게 일일이 거수경례를 했다. 군 출신인 남 원장은 “지금도 저는 스스로 군인이라고 생각한다”며 “선배님들을 이제야 뵙게 돼 송구스럽다”며 깍듯한 예의를 갖췄다.
이날 면담은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근본적 문제해결 노력을 촉구하기 위해 국군포로신고센터를 운영해온 사단법인 물망초의 요청으로 마련됐다. 남 원장은 북한 정권수립 65주년(9·9절)인 이날 북한의 동향분석 보고 등을 받느라 바빴지만 탈북 국군포로 할아버지들과의 대화는 당초 예정됐던 30분을 훌쩍 넘겨 1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남 원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동안 국가가 (국군포로 문제에) 너무 소홀했다. 잘못했다”며 사과했다고 배석자들이 전했다. 그는 “선진국은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국가에 헌신한 이들을 기억하고 기리며, 후대에도 가르치는 나라”라며 “그동안 섭섭하셨겠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국군포로 출신 할아버지들은 그동안 가슴에 담아둔 말을 다 쏟아내려는 듯 때론 책상을 쾅쾅 쳐가면서 열변을 토했다. “북한의 장기수 67명은 전부 돌려보냈으면서 왜 우리(북한 내 국군포로)에 대해서는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느냐”, “어떻게 국정원조차 국군포로들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몰랐을 수 있느냐”며 서운함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남 원장은 “몰랐던 게 아니다. 알았지만 행동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그동안 비겁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들의 말이 계속 길어지자 면담 중간에 배석자들이 ‘시간상 이유’로 발언을 끊으려 했다. 이에 남 원장은 “그냥 놔두시라”며 끝까지 묵묵히 들었다고 한다.
국정원은 이날 국군포로 방문자들을 위해 꽃다발을 준비했고 국정원 입구에는 환영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또 접견실에도 ‘사선을 넘어 귀환해 오신 국군포로 어르신 여러분 사랑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따로 준비하는 등 각별한 신경을 쓴 것 같았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국정원 간부들도 대부분 배석했다. 국정원은 이날 국군포로 할아버지들의 배우자들까지 초청해 오찬을 대접했다. 할아버지들 사이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는 반응이 나왔다.
이날 면담에 참석한 유영복 6·25국군포로가족회 명예회장(84)은 국정원 방문에 마음이 설레 오전 4시 반에 일어났다고 했다. 그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국정원이 한 번도 우리를 만나준 적이 없었는데 우리 용사들을 따뜻하게 맞아줘서 감사했다”며 “진정성 있게, 진심으로 대해주는 것을 보고 이 나라가 아직 우리를 잊지 않고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유 명예회장은 ‘들어갈 수는 있어도 나올 수는 없다’는 함경남도의 검덕광산에서 50년간 강제노동을 하며 노예같은 비참한 삶을 살다가 2000년에 탈북해 조국으로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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