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상봉 나흘 앞두고 연기 일방통보… 이석기 구속 등 “南 대결소동” 트집
금강산회담도 연기해 협상 기싸움… 정부 “이산 아픔 외면한 반인륜 행위”
‘우리 민족끼리’를 강조하는 북한이 민족의 명절 추석 직후 이산가족의 부푼 마음에 못을 박았다. 북한이 25일로 예정됐던 이산가족 상봉을 불과 나흘 앞둔 21일 행사를 연기한다고 일방적으로 밝힌 것이다. 상봉 예정자들은 좌절했고, 개성공단의 재가동으로 고무됐던 남북 대화 모드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이날 대변인 성명을 통해 “흩어진 가족, 친척 상봉 행사를 대화와 협상이 진행될 수 있는 정상적인 분위기가 마련될 때까지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조평통은 이어 “우리를 모략중상하고 대결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금강산관광 재개를 위한 회담’도 미룬다는 것을 선포한다”고 덧붙였다. 추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련 회담의 날짜는 명시하지 않았다.
북한은 성명에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구속 수사 등을 언급하며 ‘남조선 보수패당의 무분별하고 악랄한 대결 소동’을 상봉 연기 이유 중 하나로 내세웠다. 그러나 북한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많다. 북한이 지지부진한 금강산관광과 6자회담 재개 등의 현안을 타개하기 위한 카드로 이산가족 상봉을 연기했다는 게 정부 안팎의 대체적 시각이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최근 남북관계를 개선했음에도 경제적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인도주의 사안인 이산가족 상봉을 협상 카드로 쓰는 과거 행태를 다시 보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부는 이날 오후 통일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북측이 민족의 가장 큰 아픔을 치유하는 일이자, 인도적 차원에서 준비해 온 이산가족 상봉을 불과 4일 앞두고 일방적으로 연기한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의도 대변인은 이어 “며칠 후면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200여 이산가족의 설렘과 소망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것이며 모든 이산가족과 우리 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반인륜적 행위”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김 대변인은 북측이 이석기 사건을 언급한 것에 대해서도 “우리의 헌법을 무시한 반국가적 행위에 대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조사가 이뤄지고 있는 사건마저 남북 관계와 연결시키는 북측의 저의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 이산가족 볼모로 금강산관광-6자 재개 압박 ▼
김 대변인은 “통일애국인사에 대한 탄압을 좌시하지 않겠다는데, 소위 애국인사를 남한에 두고 지령을 주면서 조종한다는 뜻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며 “우리 정부와 국민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단호히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통일부는 이날 장관 주재로 긴급회의를 열고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통일부는 20일 금강산에 도착한 우리 측 사전선발대 13명과 기존 지원인력 62명을 22일 오후 2시에 귀환시킬 예정이다.
○ 이산가족 때려 금강산 얻으려는 성동격서?
이날 북한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구속 수사와 관련해 “남한의 보수패당이 우리와 끝까지 대결하겠다는 심보”라고 비난했다. 이어 “이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정상적인 대화와 북남 관계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며 상봉 연기를 감행한 이유 중 하나로 꼽았다.
하지만 북한은 이석기 사건이 터진 이후에도 개성공단 재가동이나 이산가족 상봉 준비 과정에서 이 사안을 특별히 문제 삼지 않아 왔다.
북한이 주장한 남쪽의 전쟁 도발 책동 역시 결정적인 이유로 보기 어렵다. 올해 8월 치러진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한미 연합 군사연습 기간에 북한은 예년과 달리 대남 비방을 자제했고 훈련 기간에도 남북은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논의를 했다.
따라서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을 연기한 결정적 이유는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관광을 연계하는 과정에서 협상력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설득력이 높다. 북한은 이날 조평통 성명에서 “민족 공동의 사업인 금강산관광에 대해서는 ‘돈줄’이니 뭐니 중상모략한다”며 지지부진한 금강산관광 회담 문제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실제 정부는 북한이 숙소를 문제 삼을 때부터 이를 빌미 삼아 막판에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무산될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이 사안에 접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당초 금강산호텔과 외금강호텔을 이산가족 상봉단 숙소로 사용하자고 요구했지만 북측은 ‘사전 예약’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몽니를 부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북한을 자극하지 않는 방향으로 최대한 인내심을 갖고 구슬려 왔는데 결국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 북-미 관계 개선 등 노린 다목적 카드
최근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이를 발판으로 기대했던 국제 관계 개선이 북한의 의도대로 풀리지 않은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18일 중국에서 열린 ‘6자회담 당사국들 간 1.5트랙 대화’에 김계관, 이용호, 최선희 등 북핵 라인을 총출동시키는 등 6자회담 개선에 적극적인 의지를 나타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물론이고 우리 정부도 ‘북한이 비핵화와 관련해 성의 있는 사전 조치를 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며 북한의 기대를 꺾었다.
정부는 일단 북한의 의도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17일 통일부 대변인에 임명된 뒤 첫 대북성명을 발표한 김 대변인은 매우 강경한 어조로 북한을 압박했다. 그는 “모처럼의 대화 분위기를 다시 대결 상태로 몰아가는 행위이며 이를 통해 북측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 “북측이 단호하고 강력한 대응 조치를 운운한 것은 또 다른 무력 도발을 하겠다는 것인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런 행위는 우리의 단호한 응징과 국제적 제재만을 강화시킬 뿐”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이산가족들의 아픔과 실망은 이해하지만 시간에 쫓겨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구축을 위한 기존 원칙을 훼손하지는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로 풀이된다.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무산되거나 연기되더라도 당장 한반도 정세가 급속히 경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다. 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이 일단 ‘무산’이 아닌 ‘연기’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에 주목할 만하다”면서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큰 틀에서 북한에 대화를 제의할 경우 북한도 대외 관계를 살피며 밀고 당기기를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