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사내 둘이 다가왔다, 다짜고짜 수갑을 채웠다
탈북자 가족 납치 북송사건의 진실
《 두만강에는 야만의 법칙이 흐른다. 상대를 죽여 내가 사는 것이 중국 두만강 국경의 생리다. 9년 전 어린 남매의 아버지였던 탈북자 스파이 채○○ 씨(48)는 비열한 순응을 택했다. 그는 자신과 가까웠던 또 다른 아버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구원의 손길을 가장한 배신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한국에 가려 했던 탈북자 일가족은 사지(死地)로 내몰렸다. 부부는 20대였고 아들은 8개월 된 젖먹이였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는 부인과 13세 딸, 8세 아들을 북한에 남겨두고 탈북한 채 씨에게 ‘작업’을 제안하며 “가족을 잊지 말라”고 했다. 부정(父情)과 인정(人情). 그 사이에서 채 씨는 한쪽을 택했다. “내 자식들은 나처럼 꿈 없이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채 씨의 선택으로 다른 탈북자 가족의 삶은 풍비박산이 났다. 채 씨의 죗값은 과연 얼마일까.
동아일보 탐사보도팀은 채 씨가 탈북자 일가족 납치 북송에 가담하기까지 지난 10여 년간 행적을 되짚어봤다. 총성이 사라진 북-중 국경에서 남북한 정보당국이 벌이는 음모, 북한체제의 농간에 스러져간 두 가족의 좌절과 투쟁을 목격했다. ‘드라마’ 형식을 빌리지 않고는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취재팀은 8월부터 두 달간 채 씨와 피해자, 양쪽 가족들, 검경 수사팀, 사건 목격자와 신고자 등 주변 인물을 2∼7차례 만나 심층 인터뷰했다. 기사는 검찰 공소장과 수사기록, 1심 판결문, 당사자 증언 등을 통해 확인된 사실만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본보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100% 실화를 재현하는 ‘논픽션 드라마’를 앞으로도 계속 선보일 계획이다. 》
회색 지프차에는 5명이 타고 있었다. 조수석의 남자는 낯이 익었다. 두 달 전 집에서 본 남자였다. 운전사는 말이 없었다. 한국말을 모르는 중국남성인 듯 했다. 왼쪽에 앉은 남편 가슴팍에 생후 8개월 된 아들이 잠들어 있었다. 장은희(가명·당시 24세)는 차창 밖을 내다봤다. 꽁꽁 언 두만강이 어둠 속에 멈춰 있었다. 반 년 전 아들을 업고 건널 땐 가슴까지 차오르던 강이었다.
2004년 12월 15일 오후 9시. 중국 옌볜(延邊) 두만강 접경도시인 투먼(圖們)의 외곽도로를 10여 분째 가고 있었다. 차 안은 고요했다. 남편이 초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형, 저 두만강 건너에 있는 게 강양군대(북한군 국경경비대) 아닌가?"
조수석의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남한행' 차에 탔지만 은희는 안심하지 못했다. 가는 길에 중국 공안이 차를 세우는 상상이 떠올랐다. 6개월 간 숨어 살 때 제복 입은 사람을 보면 심장이 내려앉던 관성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순조로웠다. 남쪽으로 간다면 왼편에 있어야 할 두만강이 오른쪽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것 말고는….
○ 은신처에 찾아온 남자
조수석의 남자가 집에 나타난 건 두 달 전인 10월 어느 날이었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키는 북한에선 평균인 165㎝ 정도. 그는 쌍꺼풀 진 큰 눈을 번뜩이며 목례를 했다.
"우리를 한국에 보내줄 채 형이야."
남편 이명호(가명·당시 23세)가 그를 소개했다. 은희는 생후 6개월 된 아들 현준(가명)이를 안고 채민철(가명·당시 39세)을 빤히 쳐다봤다. 낯선 사람이 집에 온 건 중국 투먼에 숨어 산 지 넉 달 만에 처음이었다.
투먼은 북한 최북단인 함북 온성군에서 두만강만 건너면 나오는 중국 땅. 남한에 가려고 '선'을 찾는 탈북자가 많다. 명호와 은희는 그해 6월 갓난아기를 데리고 이곳으로 탈북했다. 명호가 밀무역을 할 때 친해놓은 조선족의 집에 숨어 지냈다. 은신처는 중국과 북한을 잇는 투먼대교 옆 8층짜리 아파트 꼭대기 층이었다. 망원경으로 보면 북한 초소의 군인들 얼굴표정이 보였다.
민철은 거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어? 한국 거 보네."
드라마 '올인'이 TV에 나오고 있었다.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는 민철의 바쁜 눈빛이 은희와 마주쳤다. 민철은 은희 품에 있던 현준이를 끌어안았다.
"야, 이 새끼 잘생겼다."
민철은 아기와 이마를 맞대고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은희가 외출 준비를 하는 내내 민철은 아기를 무릎 위에 앉혔다. 민철이 볼을 비비자 현준이는 수염에 따가워하며 몸을 비비 꼬았다. 다 같이 사진관으로 옮겨서도 민철은 현준이를 안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 녀석, 화보 모델해도 되겠다."
이날 명호와 은희는 여권 사진을 찍었다. 위조 여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간다는 게 며칠 전 민철이 명호에게 제시한 계획이었다.
○ "형님 배를 따오면 살려준답니다"
명호는 '쫄쿠기(뜯어내기)'를 못 견뎌 탈북을 결심했다. 명호는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송이버섯 밀무역으로 생계를 꾸렸다. 장사를 하려면 북한 최고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안원(경찰)의 묵인이 필수였다. 두 기관에서 하루씩 교대로 명호 집을 찾았다. 달라는 뇌물을 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이들을 피해 다니자 명호는 곧바로 체포 대상이 됐다. 밀무역을 하며 다져놓은 북한군과 보위부 인맥은 명호를 조여 오는 수사망으로 돌변했다. 남한행은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탈북한 지 석 달 만인 2004년 9월 명호는 투먼 시내 음식점에서 민철을 만났다. 민철은 "청진에서 군함 타고 나갔다가 수영해서 한국에 귀순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무용담은 명호를 사로잡았다. 1년 전 탈북자 25명이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들어가려다 중국 공안에게 잡힌 사건 때문이었다. 이후 남한으로 가는 '선'이 끊겨 민철 같은 유경험자가 귀했다.
당시 명호는 며칠 전 일 때문에 신경이 더욱 곤두서 있었다. 북한 국경경비대 상등병 김정혁(가명·당시 22세)과 이광일(가명·당시 22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명호가 밀무역을 할 때 뒤를 봐줬고 탈북할 때도 두만강 길을 열어준 군인들이었다.
"(보위부에서) 형님 배를 따오면 살려준답니다."
명호는 표정이 굳어졌다. 친형제로 여기는 동생들이라도 조심했어야 했다. 명호 가족의 탈북을 도운 게 발각돼 총살 위기에 놓였다가 체포 임무를 받고 파견된 것이었다. 탈북을 도와준 사람을 체포용 미끼로 쓰는 게 보위부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하지만 정혁은 곧 중국으로 찾아온 속내를 털어놨다.
"형님 못 죽이겠소.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읍시다. 남한 같이 가요."
명호는 정혁과 광일을 숨겨줬다. 가족과 사는 아파트에서 10km쯤 떨어진 석유공장 뒤편 다세대주택 3층이었다. 이곳 역시 명호를 숨겨준 조선족의 집이었다. 명호는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전기를 끊어 빈집으로 위장했다. 탈영병 은닉죄는 잡히면 살 길이 없었다.
○ 비정한 국경 도시
투먼은 돈과 안전을 위한 배신이 일상화된 도시였다. 누군가의 최소한의 선의에 내 생명을 맡겨야 했다. 북한 공작원들이 중국 공안 복장을 하거나 탈북 브로커 행세를 하며 탈북자를 색출했다. 돈벌이로 탈북자 은신처를 보위부에 일러바치는 조선족도 많았다. 북한에서 송이버섯이나 골동품을 가져올 판로를 보장받는 대가로 정보를 넘기는 식이다. 이들은 북한 정보를 한국 국가정보원 요원에게 팔아넘기는 이중 스파이 짓도 했다. 명호 역시 국정원 첩보망의 한 고리였다. 북한 쪽 인맥을 통해 빼낸 정보를 넘기며 도피자금을 벌었다.
명호는 투먼을 벗어나려 했다. 중국 다롄(大連)에 있는 일본 국제학교에 뛰어들어 망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명호 가족과 탈영병 둘을 포함해 탈북자 16명이 탄 승합차가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내리지 못했다. 교문 앞에 공안 차량이 이미 와 있었다. 차에 탄 누군가에게서 계획이 새나간 것이었다.
투먼에 돌아온 명호는 더욱 초조해했다. 다롄의 승합차 안에 숨어있던 스파이에게 얼굴이 노출됐기 때문이었다. 바삐 한국으로 떠나야 했다. 민철과 가까워진 건 그즈음이었다. 대부분의 브로커가 한국에 가본 적 없는 조선족이었는데 민철은 달랐다. 한국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었고 남한행에 성공한 경험이 있었다.
명호는 민철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 잡히면 정치범으로 몰릴 수 있어 탈북자들끼리도 함부로 하지 않는 말이었다.
"남한에 가려고 하는데…. 형이 도와줄 수 있소?"
민철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내가 직접 데려가줄게."
명호는 민철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탈영병 둘도 데리고 있어서 걔들부터 빨리 보내야 될 것 같소."
"그러면 네가 다친다. 손 떼는 게 좋지 않겠냐."
명호는 민철이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에 고마워했다. 민철은 돈이 궁하던 명호에게 100달러까지 지폐를 종종 쥐어줬다.
○ 합승의 함정
민철과 남한행을 상의한 지 두 달쯤 뒤인 2004년 12월 15일 오후 8시. 명호는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 민철의 전화를 받았다. 명호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은희랑 애기는 왜 안 데려가겠다는 거야?"
이를 들은 은희가 식탁에 앉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남한) 못 가면 언제 간단 말입니까. 우리도 남자들 있을 때 끼어서 갈 기라요."
명호는 다시 민철에게 전화를 걸어 3, 4분 만에 통화를 끝냈다.
"짐 싸라. 다 같이 간다."
명호 가족은 8층을 걸어서 내려왔다. "명호야." 민철의 목소리였다. 200m쯤 떨어진 곳에 지프차가 있었다. 명호 가족이 탄 차는 정적 속에 10분쯤 달렸다. 민철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차를 세우고 밖에서 통화를 하고 들어왔다.
"명호야. (함경북도 온성군) 상탄에서 사람 하나 넘어오기로 했다. 받아서 같이 가자."
"아, 그럼 그렇게 하기요."
탈북브로커를 한 적이 있는 명호는 '남한행 합승'이 간혹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차는 교차로에서 U턴해 두만강변 외곽도로로 들어섰다. 민철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차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 어, 어."
민철은 나직이 대꾸만 했다. 운전사는 곧 한적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시동과 헤드라이트도 껐다. 한겨울 국경의 밤은 적막했다. 어둠 속에서 남자 2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현준이 아버지, 둘 다 남자입니다. 남한 가는 길에 좋겠습니다."
은희는 험한 길에 건장한 사내들이 동행하는 것을 다행스러워했다.
나란히 오던 남자는 좌우로 갈려 각각 뒷좌석 쪽으로 다가왔다. 은희가 있는 오른쪽 문을 연 남자는 차에 엉덩이를 들이밀며 말했다.
"야, 이 개간나, 안으로 들어가라."
'이런 막 돼먹은 인간.' 은희는 생각했다. 명호 쪽에도 남자가 끼어 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차 앞쪽에 또 다른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은희는 '차는 좁은데 무슨 사람이 이리 많나' 하며 의아해했다. 그 순간 남자들은 은희와 명호의 팔을 꺾어 수갑을 채웠다. 은희는 차 문을 열려고 몸부림 쳤다. 밖에는 중국 공안 복장을 한 남자가 한 명 더 와 있었다. 차 밖으로 끌려나와 강변 쪽 절벽으로 발길질을 당했다. 그때만 해도 은희는 돈을 얼마나 줘야 공안이 풀어줄지 생각했다.
눈밭에 나뒹구는 엄마 아빠를 보고 현준이가 울기 시작했다. 울음 사이로 북한말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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