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줄거리) 중국에서 ‘한국행’을 기다리던 명호 은희 부부는 그를 구원자로 믿었다. 한국에서 온 탈북자 민철. 그의 안내로 지프에 탔다. 남쪽으로 간다면 왼쪽에 있어야 할 두만강이 오른쪽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것 말고는 모든 게 순조로웠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차가 멈추고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어둠에서 나타난 낯선 사내들의 그림자. ‘중국 공안인가?’ 은희의 착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
생후 8개월 된 아기가 꽁꽁 언 두만강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아기는 팔다리를 빳빳이 뻗고 부들부들 떨었다. '으앙으앙' 목청 찢어지는 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를 갈랐다.
북한 보위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준이(가명)의 기저귀를 벗겨 칼로 북북 찢었다.
"기저귀 두둑한 거 좀 보라. 이 독종 간나, 아 새끼 기저귀에까지 돈을 숨겨 놨구만 기래."
칼을 내두르자 노란 액체가 묻어나왔다. 현준이가 겁에 질려 싼 오줌이었다. 돈은 없었다. 현준이는 알몸으로 떨며 제 엄마만 봤다. 장은희(가명·당시 24세)는 눈범벅이 된 아기 얼굴을 닦아주려다 보위부원의 귀쌈(귀싸대기)에 나가떨어졌다.
2004년 12월 16일 오전 3시 중국 투먼(圖們) 도봉호텔. 불 꺼진 방에 혼자 앉은 채민철(가명·당시 39세)의 귀에 아기 울음소리가 맴돌았다. 소리를 떨치려 술을 들이켤수록 새파랗게 질린 현준이 모습은 더 생생해졌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6시간 전 그가 목격한 광경은 고량주 2병을 비워도 사라지지 않았다. ○ 두만강-12월 15일
전날 밤 9시경 투먼과 함경북도 온성군을 가르는 두만강변. 민철은 장은희 가족 체포조가 4명에서 순식간에 20여 명으로 불어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온성군 남양 북한군 중대부 초소에서 대기하던 보위부원들은 가족을 태운 차가 멈춰서자마자 두만강을 넘어 투먼으로 모여들었다.
초소는 두만강 중국 국경에서 100여 m 떨어진 지척이었다. 체포조는 은희를 걷어차고 귀쌈 때리기를 반복했다. 아기는 얼굴이 눈밭에 반쯤 박혀 바둥거렸다.
"지도원 동지, 내 도망 안 갈 테니 현준이 좀 업고 가게 해주십시오."
"이 개간나. 개소리 치지 말고 걸어라."
체포조는 밧줄에 묶인 가족을 군홧발로 차며 초소 방향으로 몰았다. 현준이는 누군가의 팔에서 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려 했다. 경기를 일으킬 듯 자지러지던 아기는 이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덜덜 떨뿐 울지도 못했다.
○ 낯익은 뒷모습
부부는 고개를 숙이고 초소에 들어섰다. 은희가 아기의 상태를 살피려고 고개를 들면 군홧발이 날아왔다. 한 간부가 발길질을 만류했다.
"아는 보게 해주라. 어차피 다 죽을 거 아이가."
은희가 고개를 들자 결박돼 벽을 보고 꿇어앉은 두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죽점퍼를 입은 뒷모습은 움츠리고 있었다. 먼저 끌려온 탈북자인 듯 했다. 트럭 소리가 초소 밖에서 요란하게 퍼지더니 부대장급 간부 서너 명이 초소로 뛰어들었다.
"개새끼들."
간부들은 두 남자에게 달려들어 뒤통수를 찍어 찼다. 얼굴이 벽에 부딪친 뒤 바닥으로 튕겼다. 피범벅이 됐다. 은희는 피로 물든 가죽점퍼를 유심히 봤다. 낯설지가 않았다. 은희 가족과 함께 숨어 살던 탈영군인 김정혁(가명·당시 22세)과 이광일(가명·당시 22세)이었다. 점퍼는 한 달 전 은희가 이들을 투먼시장에 데리고 가 사 입힌 옷이었다.
"남한가면 옷 잘 입어야 돼. 이래 입고 모자도 쓰면 너거 군인인 줄 아무도 모를 거다."
정혁과 광일은 형수가 사준 옷을 들고 몇 달 만에 웃었다.
'저 아들이 와 여기 있는가….'
두 시간 전 군인들의 은신처였던 투먼 석유제현공장 사택 3층.
'끼이익.'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은 얼어붙었다. 바깥에서 채워놓은 자물쇠 열쇠를 가진 사람은 은희의 남편 이명호(가명·당시 23세)와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조선족뿐이었다. 이들이 연락 없이 문을 여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 자신들을 잡으러 온 게 틀림없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더 심하게 요동쳤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채민철이었다.
"오늘 (남한으로) 가자. 짐 챙겨라."
군인들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정말입니까? 진짜지요?"
정혁과 광일은 아껴둔 가죽점퍼를 챙겨 입었다.
○ 결정적 증거
부부는 갱생차에 실려 온성군 보위부로 호송됐다. 보위부원이 원하는 답변을 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조사를 받아야 할 처지였다. 구류장 배정 직전 두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 남겨진 시간은 3초. 명호는 은희에게 한마디를 던진 뒤 구류장으로 끌려갔다.
"일체 모른다."
모든 죄를 자신이 안을 테니 "아무것도 모른다"고 진술해 살아나가라는 얘기였다.
구류장에 들어가기 전 몸 검신(檢身)이 시작됐다. 보위부원은 은희 옷을 모두 벗겼다.
"뽐뿌질 하라."
은희는 팔을 머리 위로 올린 뒤 나체로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렇게 하면 질 안에 숨긴 돈이 빠져나온다는 것이었다. 수치심에 떨면서도 속으로 되뇌었다.
'일체 모른다.'
조사가 이어졌다. 은희는 각목과 철제 의자로 맞아 온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조사를 받지 않는 시간은 9.9㎡(3평) 크기 구류장에서 죄수 15명과 앉아서 생활했다. 잘 때는 나란히 열을 맞춰 앉은 다음 뒷사람 배 위에 몸을 겹쳐 누웠다. 사람과 오물, 벌레 등 구류장 안 모든 것이 한꺼번에 썩어가며 악취를 내뿜었다. 얼음장 같은 바닥에는 벌레가 우글대는 걸레가 있었다. 이불이었다. 현준이를 누일 곳은 그 거적때기뿐이었다.
조사받은 지 10일째 되던 날 보위부원이 물었다.
"니 채민철이 왔을 때 어떤 말했어?"
가슴이 철렁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보위부원은 기다렸다는 듯 종이 한 장을 꺼내 읽었다.
"2004년 10월 중국 투먼 교원주택 8층 1호. 장은희는 남한 방송에 나오는 여배우를 보더니 '나 남한 가도 알리지 않을까요?(북한에서 온 거 티나지 않을까요?)' 하고 물었음."
은희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보위부원은 은희 표정을 힐끗 보고는 계속 읽어 내려갔다. "채민철이 '한국 가도 알려지지 않을 세련된 스타일'이라고 하자 웃으며 좋아함."
3개월 전 은희와 민철이 나눈 대화와 똑같았다. 심장이 내려앉으려는 순간 남편의 당부가 떠올랐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기래? 이래도 모른다 하는가 보자."
보위부원은 다른 종이를 은희 가슴팍에 내밀었다. '동계 훈련 명령서'라고 적힌 종이였다. 누군가 꾹꾹 눌러쓴 글씨가 가득했다.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 김정일.'
은희는 얼어붙었다. 남편의 당부도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 그날만 불이 켜졌다
은희 가족이 숨어 지낸 투먼의 아파트는 늘 어두웠다. 빈집으로 위장하려고 불을 켜지 않았다. 불을 켜는 순간 보위부원 군홧발 소리 수십 개가 아파트 곳곳으로 파고들 것 같았다. 소리가 멈추는 동시에 보위부원들이 문을 부수고 집으로 들이 닥치는 상상이 은희를 괴롭혔다.
2004년 12월 초. 불을 끄고 거실에 앉아 있던 은희의 눈길이 작은방 문틈으로 향했다. 하얀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두런두런하는 소리도 들렸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문을 열어젖히자 갇혀있던 빛이 쏟아졌다. 담배 연기까지 가득해 방은 더 환해보였다.
방 안에는 남편과 정혁, 광일이 있었다. 명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고 수화기 너머 한 남자가 불러주는 말을 따라 읊었다. 정혁은 명호가 읊는 말을 종이에 써내려가고 있었다. 광일은 창가에서 망원경을 들고 북한군 초소 쪽을 살폈다. 세 남자는 줄담배를 피웠다. 수화기 너머는 남편과 친분이 있는 북한 군인인 듯했다. 남편은 은희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했다.
"2004년도 동계 훈련을 다음과 같이 진행할 것을 명령한다. 군종, 병종, 전문병 부대, 구분대(대대 아래의 부대 조직단위)들의 훈련 달수는 다음과 같이 할 것. 땅크병구분대 7달, 비행구분대 12달…."
"전자전병훈련은 적의 무선전자수단들의 배치 위치를 신속 정확히 판정하여 적극적인 전파 장애를 조성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매월 일선 부대에 직접 내려 보내는 훈련 명령서였다. 군사기밀이었다. 유출은 곧 총살이었다.
다음 날 명호는 안절부절못했다. 은희는 명호가 은희 가족의 은신처를 지공한 조선족과 통화하며 하는 말을 들었다.
"채 형이 국정원 사람에게 명령서를 줘야 남한에 수월하게 갈 수 있대요. 명령서를 복사해서 채 형한테 얼른 줘야 합니다."
명호는 필사적이었다. 얼마 전 중국 다롄(大連)의 일본 국제학교에 들어가 망명 요청을 하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보위부가 명호 가족을 잡겠다며 혈안이 된 터였다. 명호는 마지막 동아줄이라 믿은 민철에게 명령서를 건넸다. 그 명령서가 은희 앞에 놓여있었다.
○ 화장실 밀담(密談)
은희는 계속 먹지 못했다. 구류장 식사로 나오는 썩은 강냉이죽은 먹으면 바로 탈이 났다. 껍데기가 둥둥 떠있는 데다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입에 대기 힘들었다. 민철의 정체를 알게 되자 배고픔도 잊었다. 젖도 말라버렸다. 현준이는 남은 기력을 다해 울었다. 강냉이죽이 나오면 고개를 돌리던 현준이가 어느 날 입을 뻐끔뻐끔했다. 은희가 할 수 없이 죽을 떠주자 입을 쫙쫙 벌려 받아먹었다. 은희는 민철에게 묻고 싶었다. 이렇게 할 거면서 왜 현준이를 친아들처럼 예뻐했냐고. 아기를 보고도 어떻게 승냥이로 변할 수 있었느냐고.
체포 12일 만인 12월 27일, 구류장 문이 열렸다. 간수가 들어섰다.
"애기를 안고 나오라."
은희는 직감했다. 구류장에 수감된 여성의 아기는 입양 보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저한테 애기 떼면 안 됩니다. 나 죽거든요. 차라리 날 죽게 해주세요."
울며 발버둥을 치다 혼절했다.
그날 밤 은희는 간수를 불렀다.
"선생님, 저 대변보겠습니다."
1호 구류장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소변은 방에서 해결하지만 대변을 보려면 복도 끝 화장실에 가야 했다. 2, 3호를 지나 4호 앞에서 멈춰 섰다. 철창을 톡톡 건드렸다. 명호에게 화장실로 오라는 신호였다. 대변 전용 화장실은 가까이만 가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간수들은 '사람 갈 곳이 못 된다'며 감시하지 않았다. 부부가 1, 2분이나마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현준이 아부지, 현준이를 떼갔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은희는 오물 범벅인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렀다. 명호는 은희 옆에 쪼그려 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3화에 계속>
손효주·신광영 기자 hjson@donga.com
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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