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북자 가족 납치 북송사건의 진실
아비의 죄를 빌러 그놈 딸이 왔다… “나도 저렇게 고왔는데”
《 (지난 줄거리)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채민철에게 속아 가족과 함께 북송된 장은희. 은희가 7년간 교화소에서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사이 남편은 죽고 생후 8개월이던 아들은 어딘가로 입양됐다. 은희 가족을 팔아넘긴 민철은 자신의 가족을 탈북시켜 한국에
데려왔다. 은희는 출소 후 복수를 위해 다시 탈북길에 오르지만 강을 건너다 군인들에게 붙잡히자 칼로 자결을 시도했다.》
하나원에서 배정받은 서울 강북의 아파트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 남자가 문 앞에 있었다. 허름한 검은 옷에 때가 절어 본색이 사라진
운동화 차림이었다. 오래 기다렸는지 입술이 하얗게 부르터 있었다. 2010년 2월, 아직 영하의 날씨였다.
"아버지."
채영선(가명·22)은 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아버지라는 세 글자가 주는 느낌이 낯설었다. 다만 10년간
상상해 온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10년 전 여름, 채민철(가명·48)은 영선의 손을 잡고, 등엔 다섯 살이던
아들 영학(가명·17을 업고 평양 시내를 걸었다. 탈북 브로커 일로 생계를 잇던 시절이었다. 북한 주민 2명을 중국으로 보내는
'큰 건'을 앞두고 남매에게 평양 구경을 시켜 준 것이었다.
"아빠가 중국 가서 돈 많이 벌어 올게."
한 팔로 자신을 번쩍 들어 올리던 그때의 듬직함을 문 앞의 남자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다. 등은 오그라들고 키는 쪼그라들어 보였다. 얼굴은 까맣게 그을렸고 이마와 볼에 파인 자국이 수두룩했다.
민철이 영선에게 다가왔다. 자신(키 165cm)보다 키가 큰 딸(167cm)을 어색하게 안았다.
"보고 싶었다."
민철의 잠바에선 시큼한 땀 냄새가 풍겼다. 영선은 아버지를 허리춤을 꽉 부여잡았다. 영학은 이 광경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어릴
때 헤어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민철의 시선은 아들을 거쳐 아내 허정애(가명·45)와 마주쳤다. 정애는 젖은 눈을
깜박였다.
이튿날 아침, 민철의 집은 침묵에 잠겼다. 영선이 "잘 주무셨느냐"고 물었을 때 민철이 "어"라고 답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대화가 없었다. 영학은 아직 아버지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민철이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온 지 5년. 그리워하던 가족이 마침내 탈북해 한국에 왔지만 헤어져 지낸 10년 세월의 벽이
허물어지는 데는 1년여가 걸렸다. 공사장 일용직으로 일하는 민철이 퇴근하는 오후 8시가 되면 가족은 지하철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민철은 마중 나온 남매에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웃음을 지어 입가가 씰룩거릴 뿐이었다. 영선과 영학(키
182cm)이 양쪽에서 팔짱을 끼면 가운데 있는 민철은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아내 정애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집으로
걸어왔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남매는 민철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워 TV를 봤다. 서로 민철의 팔을 베겠다고 다투다 결국은 양팔을 하나씩 꿰차곤 했다. 영선은 북한에 있을 때 아버지 팔을 베고 TV 보는 상상을 자주 했다.
● 아들 생일날 들이닥친 손님
올해 3월, 은희는 결국 한국 땅을 밟았다. 2011년 여름 압록강을 건너 탈북하려다 북한군에 붙잡혔을 때 스스로 배에 칼을
찔러 넣고도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은희는 한국에 가 있는 엄마가 보내 준 돈을 찔러 주고 교화소에서 빠져나왔다. 세 번의 시도
만에 한국행에 성공한 것이다. 은희는 한국에 오자마자 민철의 만행을 국가정보원에 알렸다. 조사관에게 민철의 가족이 3년 전 한국에 와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은희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놈을 꼭 잡아 주기요. 내가 먼저 칼탕 쳐(토막 내) 죽이기 전에…."
국정원은 은희 가족이 북송된 직후인 2005년부터 민철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은신처를 제공한 조선족이 민철을 간첩으로
신고했기 때문이다. 민철 역시 2010년 가족이 한국에 오고 나서 얼마 뒤 "보위부 지령을 받고 탈북자 일가족 북송에 가담한 적이
있다"고 국정원에 자수했다. 국정원은 민철을 처벌하는 대신 북한 쪽 정보원 역할을 제안했다. 보위부에서 내려 보낸 공작원들이
어디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귀띔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민철을 협조자로 대하던 국정원은 피해자인 은희가 한국에 살아 들어와 신고하자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정원 요원과 경찰이 민철의 집에 들이닥친 건 올해 6월 20일 아침. 아들 영학의 생일이었다. 출근을 앞둔 민철이 미역국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민철은 요원들 손에 수갑이 들린 것을 보고 말했다.
"영선이 영학이는 나가 있어라."
영선은 며칠 전 민철이 "아빠 없어도 영선이 네가 엄마 잘 보살펴라"라고 지나가듯 말했던 이유를 그때서야 알아차렸다.
요원들은 13평(약 42.9㎡) 남짓한 민철의 집을 샅샅이 뒤졌다. 서류와 사진, 휴대전화 같은걸 모조리 상자에 담았다. 아내
정애는 심장약 몇 알을 입에 털어 넣고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민철은 또다시 남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붙들려 갔다.
이날 저녁은 한국에서 처음 아들의 생일 파티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 텅 빈 법정에서 내려진 7년 형
8월 9일 경기 의정부지법. 검찰은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재판장이 민철에게 물었다.
"혐의 다 인정합니까?" "네." "마지막으로 할 얘기 없어요?" 민철은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저는 부모 없이 자라서 하고 싶은 거 못 하고 살았지만 내 아이들은 남한에 와서 꿈을 펼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방청석은 텅 비어 있었다. 민철과 은희 어느 쪽에서도 오지 않았다. 은희는 "벌을 약하게 주면 내가 그 자리에서 배를
가르겠다"고 흥분해 주변에서 참관을 말렸다. 민철의 딸 영선은 재판과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겹쳤고 아내 정애는 허리디스크가 도져
거동을 못 했다.
1심 재판부는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검찰 구형보다 형량을 깎아 주는 관례에 비춰 이례적이었다. 민철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9월 중순 교도소에서 기자와 만난 민철은 스포츠형 머리에 베이지색 수형복을 입고 있었다. 콧대에 가로로 길게 파인 흉터가
도드라져 보였다. 10여 년 전 북한 보위부에 탈북 브로커 일을 한 게 들켜 고문을 받다 코뼈가 부러진 자국이다.
"왜 그랬습니까?"
민철은 큰 눈을 껌벅이며 무표정하게 가만히 있었다. 다시 똑같이 물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소." "북송되면 어찌 되는지 알면서 왜 그랬어요?" 민철은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갑자기 들었다. "애들이 위험하면 안전한 데로 빼 줘야 하잖아요. 제가 아빠잖아요." "(다른 가족의) 8개월짜리 아기는 북한에 보내고요?" "저도 그게…. 여자하고 애기가 있어서 안 보내려고 했는데…." "반성한다면서 항소는 왜 한 건가요?"
민철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면회 종료 종이 울렸다. 자리를 뜨려는 기자에게 그가 말했다.
"북한에서 10년간 그리 고생시켰는데 어떻게 7년을 또…. 와이프 약값도 많이 들고 돈은 누가 법니까."
● '7년'이 앗아간 것들
영선은 9월 12일 충남 아산행 열차에 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는 기차였다. 영선은 '여행을 가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혼잣말을 했다. 한 복도식 아파트 앞에 닿았을 때 종이가방을 쥔 영선의 손이 덜덜 떨렸다. 종이가방 안에는 카스텔라 상자가
있었다.
"네가 무슨 체면으로 여기를 와!"
은희의 집 문이 열리자 은희 엄마가 영선을 쏘아보며 말했다. 은희 엄마는 먼저 탈북해 2008년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집에 은희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대신해서 제가 빌려고 왔어요." "스물 몇 살밖에 안 된 사위(이명호)가 죽고 손주는 어디 가 버리고. 응? 자기 가족은 살려 놓고 이제 와 어쩌자는 거야. (네 아빠) 찢어 죽여도 시원찮아."
은희 엄마는 영선이 오는 걸 허락하고도 막상 얼굴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영선은 울먹였다. "저희도 10년 전에 아빠랑 헤어져서, 여기 와서 알게 됐어요. 아빠가…."
그때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틈으로 은희의 얼굴이 보였다. 은희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다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영선을 대면했다간 분에 못 이겨 해코지를 할 것 같았다. 은희 엄마의 목소리가 누그러지는 듯하더니 다시 높아졌다.
"다 필요 없고 돈으로 보상해. 내 딸, 어떻게 보상할 거야." "아빠도 보상해 드리라고 했어요. 해 드릴게요. 근데 저희가…." 영선은 고개를 떨궜다. 대학생인 영선은 아버지 민철이 수감된 뒤 호프집 서빙과 편의점 알바 일을 하고 있었다. 간염과 폐병으로 앓고 있는 엄마(정애)는 일할 능력이 없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은희 엄마는 30분 넘게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영선을 지그시 바라봤다.
"우리 딸도 불쌍한 만큼 그쪽 딸도 불쌍하고 아깝지. 사람 다 죽여 가면서 왔으니 어찌 벌을 안 받겠어."
영선은 이곳에 오면 전하려던 말이 있었다. 오기 직전 교도소로 면회를 갔을 때 아버지는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혹시 써 줄 수
있는지 부탁해 보라"고 했다. 울분을 억누르려 애쓰는 은희 엄마를 보며 영선은 탄원서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발에 쥐가 나 절뚝이며 현관으로 향하는 영선에게 은희 엄마는 카스텔라 상자를 내밀었다. "천당에서 가져온 거라도 안 받아."
영선이 당황해하며 신발을 신으려 하는 순간 안방 문이 또다시 열렸다. 은희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영선을 유심히 바라봤다. 하얀 피부에 크고 쌍꺼풀 진 눈, 긴 갈색 생머리, 매끈하고 탄력 있는 다리. '정말 예쁘게 생겼구나…. 나도 저렇게 고왔는데….'
원수의 딸을 보면 분통이 터질 줄 알았는데 서글픔이 더 크게 밀려왔다. 은희는 7년 동안 교화소에서 겪었던 영양실조의
후유증으로 눈이 튀어나온 데다 시력이 나빠져 돋보기를 끼고 있었다. 민철에게 속아 북송되기 전 20대 초반이던 자신의 모습과
눈앞의 영선이 겹쳐졌다. 은희는 소리가 나지 않게 방문을 닫았다.
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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