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시리아 대량살상무기 거래 보고서 입수
부산항서 적발, 화학적 장비·미사일용 부품 수출 내용도
즐비하게 늘어선 시체와 울부짖는 사람들, 거품을 문 채 사경을 헤매는 환자. 8월 21일 시리아 반군 측이 공개한 동영상이 미친 파장은 엄청났다. 반군 측 주장으로는 1300명가량이 희생됐다는 이 화학무기 공격은 사린가스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해외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특히 동영상에 찍힌 희생자 다수가 어린아이인 까닭에 세계인이 받은 정서적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사상자가 수십만이나 나왔지만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시리아 내전은 ‘화학무기 사용’이라는 한마디와 함께 순식간에 세계적 이슈로 떠올랐다. 시리아 정부의 부인에도 미국 워싱턴의 강력한 규탄과 개입 선언, 유엔의 화학무기 사용 확인 발표가 이어지면서 미국의 공습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뉴스가 쏟아졌다. 9월 중순 러시아가 내놓은 깜짝 중재안으로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이후 시리아 정부의 화학무기 포기 선언이 어떻게 현실화될지가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른 상황이다.
국제사회의 논의가 정점을 향해 치닫던 9월 3일 시리아의 참극이 남의 일이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하는 민감한 소식이 국내 신문지상을 장식했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남긴 북한-시리아 화학무기 커넥션 관련 발언이 그것이다. “부산항에서 그런 것이 캐치돼 (그런 식으로) 추측하고 있다. (중략)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날 김 장관은 부산항에서 포착한 ‘정황’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美 국방부 장관 “北 화학무기 엄청나”
북한-시리아 화학무기 커넥션에 대한 우려는 워싱턴에서도 동시에 제기됐다. 척 헤이글 미 국방부 장관이 9월 5일 “북한이 엄청난 양의 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한 데 이어, 9월 6일에는 조지 리틀 국방부 대변인이 “당장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으나, 두 나라가 화학무기와 관련해 논의하거나 정보를 공유해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날 동아시아를 순방 중이던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는 서울에서 “북한과 시리아 사이에는 확실히 길고 불미스러운 협력의 역사가 있다”며 두 나라의 화학무기 커넥션에 한층 무게를 실었다.
김 장관이 말한 ‘부산에서 캐치된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의 발언이 화제에 오르자 당일 오후 국방부는 백그라운드 브리핑을 통해 보충설명에 나섰다. 2009년 북한에서 출발한 다량의 화생방 장비가 시리아행 화물선에 실려 운송되다 부산항에 정박했고, 화물검색 과정에서 문제의 장비를 발견해 압수조치를 취했다는 것. 당시 이 사건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언론에 공개된 바 없고, 김 장관 발언 이후에도 앞서의 사건개요 정도만 간략하게 알려졌다.
‘주간동아’는 북한-시리아 화학무기 커넥션을 강력히 시사하는 부산항 사건을 비롯해, 최근 5년 사이 확인된 두 나라 사이의 대량살상무기 거래 적발사례를 상세히 기록한 유엔 산하조직의 비공개 보고서를 입수했다. 보고서에 포함된 사진과 기록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언론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주요 사건에 등장하는 북한 대사관 명의의 공문서와 거래물품 세부 명세는 두 나라의 대량살상무기 기술거래가 의혹 수준을 넘어 실체가 분명하다고 결론 내려도 무방할 만큼 구체적이다.
2009년 9월 초 북한 남포항, 특급 보안이 걸린 컨테이너 4개가 화물선에 적재됐다. 중국 다롄항으로 운반된 이 컨테이너들은 9월 11일을 전후해 파나마 국적의 선박 MSC 레이첼호에 옮겨 실린다. 스위스 운송회사 소유인 이 선박은 사우디아라비아 제다항 등을 거쳐 시리아 라타키아항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부산항에 정박한 것은 다롄항을 떠난 이틀 후. 운송장에 기록된 화물의 최종수취인은 시리아 환경연구센터(Environmental Study Centre)였고, 이를 눈여겨본 한국 세관당국이 화물검색에 나선다.
문 열린 컨테이너에서 쏟아져 나온 물건은 엄청난 분량의 방호복과 방독면 등 화생방 장비였다. 화학전을 벌일 경우 자국 병사들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인 물품이어서 북한이나 시리아 모두 대외거래가 금지된 품목이었다. 세부 명세를 확인한 한국 정부는 한 달 후인 10월 13일 해당 사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보고했고, 12월 유엔에서 파견한 조사단이 부산항을 방문해 세관당국의 브리핑을 받고 현장조사를 벌였다. 결론은 전시에 화학작용제가 사용될 경우 방호용으로 착용하려고 제작한 물품이라는 것. 명백한 유엔 대북제재 위반이었다.
눈여겨볼 것은 비슷한 시기인 2009년 11월 유럽국가에 정박 중이던 또 다른 파나마 국적의 선박에서도 마찬가지로 컨테이너 4개에서 방호복과 방독면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 역시 수취인은 시리아 환경연구센터였다. 방호복 수량만 1만3000벌, 화학가스를 검정하는 데 쓰는 앰풀이 2만3600개였다. 모두 군사용으로 제작되거나 개조된 화학전 장비들로, 관련 국제조약에 통제물품으로 적시된 물건들이었고, 수량만 봐도 민간용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2011년 9월 보고를 받은 유엔 안보리는 이듬해 1월 현장조사를 통해 화물의 세부 명세와 운송경로 확인에 나선다. 결론은 명백한 북한제라는 것. 압수한 방호복은 부산항에서 적발된 방호복과 동일한 제품이었다. 시리아 정부는 이들 방호장비 수입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부인했지만, 화물 수취인으로 기록된 환경연구센터는 미국과 일본 정부가 대량살상무기 개발 주체로 지목한 시리아 응용과학기술고등연구소(Higher Institute of Applied Sciences and Technology)의 연계조직이었다. 이들은 모두 시리아 정부의 과학연구조사센터(Scientific Studies and Research Centre)의 산하기관으로, 이 센터 역시 미 재무부가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이 있다며 물품거래와 대금결제를 금지한 기관이다.
컨테이너 속 방호복과 방독면
부산과 유럽에서 적발된 두 사례는 이 무렵 이뤄진 북한의 대규모 화학장비 수출의 한 부분이었으리라는 게 유엔 조사단의 결론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부산항에서 압수한 장비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감쌀 수 있는 ‘풀세트’였던 데 비해, 유럽에서 확인한 장비에는 방호용 장화가 빠져 있는 등 수량이 맞지 않았다는 것. 이 시기 화학장비 수출은 적발된 두 사례 외에도 다양한 경로로 이뤄졌고, 다른 운송작업은 각국 당국과 국제기구의 감시망을 피해 결국 성공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다. 맞지 않는 수량 등을 감안해 추산해보면 대략 수만 명 이상이 착용할 수 있는 화학전 장비가 북한에서 시리아로 넘어갔다는 뜻이다.
국제기구에서 확인한 북한과 시리아 간 대량살상무기 거래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사일용 재료와 부품들. 2012년 5월 중국 해운회사 소속 화물선이 불법운송하던 미사일 관련 부품이 역시 부산항에서 우리 측 세관당국에 적발된 바 있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중국 톈진에서 시리아 라타키아항으로 향하던 이 화물은 10t 규모의 흑연 실린더로, 운송장에는 납 파이프로 허위 신고돼 있었다. 적발된 고밀도 흑연은 미사일 노즐이나 삭마제(削磨劑)에 쓰이는 순도 높은 제품으로 유엔 안보리 결의 1718호에 따라 북한이 거래할 수 없는 품목이었다. 미사일 후미의 노즐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이나 낙하할 때 발생하는 마찰열을 견뎌내기 위한 단열재에 주로 사용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미 여러 차례 시험발사를 거친 북한 로켓이 미사일로 전용되려면 남아 있는 대표적인 관문 중 하나가 바로 이 삭마제 기술이라고 지적해왔다. 북측이 이에 쓰이는 고순도 흑연 실린더를 수출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은 로켓 기술을 대륙간탄도탄 수준의 장거리 미사일로 바꿀 기술적 기반을 이미 확보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사례다.
2012년 5월에는 역시 중국 해운회사 소속 선박에 실려 시리아로 향하던 포탄제조용 동(銅) 디스크 1880개와 알루미늄 및 구리 강관이 프랑스에서 적발됐다. 프랑스 당국과 유엔의 기술조사에 따르면 이들 제품은 모두 군사용 목적으로 특수 제작된 것이었다. 운송장에 발송처로 기재된 중국 회사는 북한의 무기수출 기업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 바 있는 룡봉일반회사의 위장계열사였고, 운송장에 찍힌 연락처 번호는 북한 군부의 무기거래에 주로 사용되던 번호라는 게 프랑스 당국의 분석이다. 수취인 역시 시리아 과학연구조사센터가 국제사회의 감시를 피하려고 활용하는 위장회사였다. 2007년 10월 북한이 시리아로 보내려다 적발된 스커드미사일 출력 강화용 추진체 블록 50개의 수취인도 바로 이 회사였다.
2012년 9월에는 ‘민수물품’을 운송 중이라던 북한 고려항공의 Il-76 전세기가 이라크 당국에 의해 통과를 거부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이 전세기의 항로가 막히자 북한 당국은 직인이 선명한 공문을 주중 이라크대사관에 발송하는 등 거래성사를 위해 사활을 걸기도 했다. 어떤 물품이 실려 있었는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지만, 유엔 안보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운송화물의 세부 명세를 명확히 신고하지 않은 북한 항공기의 영공 통과를 거부해달라고 각국에 통보하기에 이른다.
2000~2500t 화학작용제 비축
북한이 오랜 기간 화학전을 준비해왔다는 사실은 군 당국이나 전문가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1960년대부터 관련 장비 개발에 착수해 80년대 이르러서는 각종 화학작용제를 대량으로 생산, 비축했고 이를 대규모로 뿌리거나 날려 보낼 투발 수단도 꾸준히 발전시켜왔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신의주, 만포, 아오지, 청진, 강계, 함흥, 안주, 순창 등 여덟 곳에 이르는 생산시설에서 현재 2000~2500t 규모의 화학작용제를 비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9월 한 달간 진행된 시리아 화학무기 사용 논란과 관련해 국제사회에서 가장 촉각을 곤두세운 것 역시 바로 이 대목이다. 화학무기로 대규모 인명이 살상됐음에도 아무런 개입이나 처벌 없이 넘어간다면, 유사시 북한이 비슷한 행위를 저질러도 무사할 것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남길 수 있다는 우려였다. ‘주간동아’가 확인한 북한과 시리아 간 화학무기 거래 실체는 시리아 동영상에 등장하는 참극이 먼 중동의 일이 아니라 우리 눈앞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지구는 생각보다 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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