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8월 24일)가 실시되기 며칠 전 청와대 본관 집무실. 이명박(MB) 대통령은 핵심 참모들에게 오세훈 서울시장에 대한 답답함을 강하게 토로했다.
“서울시민이 한나라당 후보(오세훈)를 두 번이나 뽑아줬는데 자기가 시장을 안 한다고 나가면 세 번째에 또 한나라당 후보를 뽑아주겠느냐. 서울시민의 투표 성향으로 봐도 시장을 그만두면 절대 안 된다.”
MB는 거듭 “정치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라고 답답해했다.
집권 4년차였던 MB의 정치적 감각은 ‘절정’에 달했다. 각종 현안에 대한 정무적 판단을 혼자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무상급식 주민투표도 마찬가지였다. MB도 전면 무상급식 즉각 시행을 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현실적으로 민주당이 서울시의회를 장악하고 있지 않은가. 설령 주민투표가 오 시장의 승리로 끝난다고 해도 예산 승인은 결국 시의회가 하게 돼 있기 때문에 전면 무상급식 실시를 제도적으로 막을 장치는 없었다. 당시 서울시의회는 시의원 114명 중 76명(67%)이 민주당 소속이었다.
게다가 이듬해에는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이 기다리고 있다. MB는 전국 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서울시의 정치지형이 변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MB는 참모들에게 “서울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어려워진다. (서울시 참모 중에서) 누가 조언을 했는지 아주 잘못 조언을 한 것이다. 트렌드를 거스르면 절대 안 된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처음 하는 얘기도 아니었다.
6개월 전 박형준 대통령사회특보가 올라왔을 때였다.
박형준=“오 시장이 서울시의회와 정면 대결을 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MB=“(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절대 말려야 한다!”
박형준의 기억. “대통령도 전면 무상급식은 오 시장과 같은 입장이었다. 무상보육 문제는 전체적으로 육아 정책, 저출산 방지를 위한 정책으로 봤지만 무상급식은 포퓰리즘 성격이 강하고 예산도 감당되지 않는 퍼주기 정책이라고 봤다. 점진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시장 직을 연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박형준은 오세훈을 만났다. 박형준은 오세훈의 서울 대일고 1년 선배. 둘은 막역한 사이였다. “시장 직 사퇴는 안 된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비슷한 시기 오세훈의 고려대 동기인 정진석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현 국회 사무총장)도 나섰다. 정진석의 생각도 MB와 같았다. MB에게도 “여론조사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밀어붙였다가 만일에 실패했을 경우 후폭풍이 예상됩니다”라며 ‘오세훈 저지’를 건의했다.
그러는 사이 여의도 국회 주변에선 ‘박형준 기획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박형준이 박근혜 전 대표의 대항마를 키우기 위해 오세훈을 부추겼다는 내용이었다. ‘세대교체’ 주자로 내세웠던 40대의 김태호 총리 후보자가 낙마(2010년 8월)하자 이번에는 오세훈을 ‘보수의 아이콘’으로 키우려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었다. 말이 ‘박형준 기획설’이지 그건 ‘MB 기획설’이나 마찬가지였다.
박형준은 펄쩍 뛰었다. “전혀 사실 무근이다. 오 시장이 무상급식과 정면 대결한다는 계획을 확정한 다음에야 알았다. 청와대가 (오 시장의 계획에 대해) 개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시 오 시장을 (박 전 대표의) 경쟁자라고 생각을 했으니까 오 시장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박형준의 기획설로 말을 만든 것이다.”
같은 시기 오세훈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치적으로 ‘무상급식 주민투표=오세훈 대권 플랜’으로 비치면서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제대로 지원을 받기 힘든 구도가 돼버렸다.
2011년 8월 12일, 오세훈은 결국 대선 불출마 기자회견까지 해야 했다. 주민투표 결과에 관계없이 이듬해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거취 문제가 주민투표 의미를 훼손하고 투표에 임하는 진심을 왜곡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래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2007년 12월 대선 당시 MB의 서울 득표율은 33.4%였다. 오세훈의 주민투표 개표가 이뤄지려면 서울시 유권자(838만7278명)의 33.3%(279만5760명) 이상이 투표에 참여해야 했다. 전국적으로 500만 표의 압도적 승리를 거둔 MB가 17대 대선 때 서울에서 얻은 268만9162표를 다 가져와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야권은 이미 ‘나쁜 투표, 착한 거부’라는 슬로건으로 투표 불참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세훈은 ‘중도층’에 호소했다. 서울시 유권자의 50%에 육박하는 중도층의 관심을 끌어올리고, 최소한 중도층의 10%를 투표에 참여시키기 위해서는 또 다른 ‘승부수’가 필요했다. 결국 주민투표를 사흘 앞둔 8월 21일, 오세훈은 시장 직까지 걸었다. 여권은 오세훈의 두 번째 승부수에 경악했다. 오세훈의 행동은 “대통령과 당의 뜻을 모두 저버린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사실 8개월 전만 해도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오세훈 사단’ 내부에서 폐기된 방안이었다. 정치적 부담도 부담이지만 투표 비용만 해도 200억 원가량으로 추산되자 참모들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오세훈은 서울시 출입기자를 통해 뒤늦게 그런 사실을 알았다. 정무조정실장인 강철원을 불렀다. ‘오세훈 의원’의 보좌관이었던 강철원은 2006년 오세훈이 처음 서울시장에 당선됐을 때 ‘시장직 인수위원회’ 간사로 활약했고, 이후 홍보기획관을 지낸 뒤 2010년 6월부터 신설된 정무조정실장을 맡고 있었다.
오세훈=“주민투표 방안에 대해서는 왜 말을 안 한거야?”
강철원=“검토는 했지만….”
오세훈=“(언성을 높이며) 왜 마음대로 검토하고 결론을 내리는 거야!”
주민투표 방안은 즉각 부활됐다. 오세훈은 1월 10일 전면 무상급식 시행 여부를 주민투표로 결정하자고 시의회 다수당인 민주당에 전격 제안했다. “무상급식 때문에 서해뱃길 등 서울시의 미래가 걸린 사업들의 발목이 잡혔다. 민주당의 ‘망국적 무상 쓰나미’를 막지 못하면 국가가 흔들린다.”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운(戰雲)은 이미 되돌리기가 어려웠다.
11일 전 민주당이 주도하는 서울시의회는 오세훈이 재의를 요구한 ‘친환경 무상급식조례안’을 재의결해 버렸다. 또 무상급식 예산이 담긴 2011년도 서울시 예산안을 의결하면서 오세훈이 강력 추진했던 서해뱃길 사업 예산도 전액 삭감했다.
경인 아라뱃길을 통과한 대규모 관광선이 한강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세훈은 양화대교 구조개선사업을 추진했다. 서해뱃길 프로젝트의 핵심사업이었다. 하지만 민주당 시의회가 예산을 전액 삭감하면서 공사는 중단됐다. 오세훈은 6개월간 시의회 출석을 거부했다. 그런 상황에서 주민투표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일종의 힘겨루기용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판이 커져버렸다.
한 핵심 측근의 전언. “출발은 시의회와의 관계가 힘드니 주민투표라는 승부수를 던지자는 것이었다. 표면적 이유는 양화대교였지만 우리가 주민투표에서 이기면 시의회를 압박하고 무상급식에서 협상의 여지가 생긴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대선 출마용 기획설이 터져 나왔고, 우리는 더욱 부담스러워졌다.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시장으로서는 어찌됐든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결국 과격한 방법이지만 시장 직을 걸게 됐다.”
8월 24일 주민투표 최종 투표율은 25.7%에 그쳤다. 215만7744표가 담긴 투표함은 열리지도 못했고, 오세훈은 재선 1년 2개월 만인 8월 26일 스스로 물러나야 했다. 정치권은 곧바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야권 무소속 박원순 후보가 시장으로 당선되면서 9년 동안 한나라당이 차지했던 서울시장 자리가 야권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당시 박원순에게 ‘깜짝 양보’를 하면서 일약 ‘박근혜 대항마’로 떠올랐다.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탄생한 ‘안철수 현상’은 대선 정국에서 정치권을 흔든 태풍이 됐다. 반면 오세훈은 복지 포퓰리즘을 막겠다는 ‘보수의 전사’에서 하루아침에 원망을 듣는 신세로 전락했다. 퇴임 26개월이 된 현재까지도 오세훈은 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최소 자신의 재선 임기였던 2014년 6월까지는 무거운 침묵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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