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 경호관(원) 대기실.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45)이 권총을 뽑아 들고 일어나며 외쳤다. 박 과장이 겨눈 사람은 정인형 대통령경호실 경호처장(48)과 안재송 경호부처장(43)이었다. 박 과장과 정 처장은 해병간부후보생 16기생으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고, 안 부처장은 역시 해병간부후보생 24기로 두 사람의 후배였다.
속사 권총의 대가로 꼽히던 안 부처장이 정 처장의 눈을 잠시 바라보곤 총을 꺼내려고 상체를 돌리는 순간 박 과장은 방아쇠를 당겼다. 탁자에 엎어지듯 쓰러지는 안 부처장을 보고 정 처장이 총을 꺼내 박 과장을 향해 일어나 다가가려는 순간 박 과장은 뒷걸음질을 치며 총을 발사했다. 비슷한 시각 안가의 주방에서는 경호관 김용섭(32)과 경호실 특수차량계장 김용태(47)가 중앙정보부 직원들의 총에 맞아 절명했다.
10·26 당일 대통령경호실은 차지철 경호실장과 이 4인의 경호관 등 모두 5명을 현장에서 잃었다. 이듬해 5월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비롯해 김 부장의 명령을 받은 박 과장 및 중정 직원 4인은 모두 형장에서 숨을 거뒀다. 이들의 이름은 훗날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재조명되기도 했고 박 과장은 ‘참군인’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안가 바닥에서 스러져간 이 4인의 경호관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호전애혈(好戰愛血)
1954년 임관한 정 처장은 16기 졸업앨범에 좌우명으로 ‘호전애혈(好戰愛血)’이라고 썼다. 글자 그대로 풀면 ‘전투를 좋아하고 피를 사랑한다’는 뜻이니, 싸우는 데 물러서지 않으며 피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로 새기면 될 듯하다. 그의 이 말은 7년 뒤 현실이 됐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정 처장은 해병 제1여단 1대대 5중대장으로 서울시경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울로 향했다. 군사정변의 맨 선두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듬해인 1962년 5월 16일 동아일보가 주최한 ‘혁명부대 중견지휘관 좌담회’에 참석해 1년 전 그날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전투가 벌어지는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5·16 당일 오전 4시 15분 그는 자신의 부대가 맡은 시경 점령을 완수했다. 그리고 그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경호관으로 발탁됐다. 1971년 대통령경호실 경호처장으로 승진한 그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총애는 대단했다. 박 전 대통령은 경호실 인력을 많이 교체했지만 유독 정 처장만은 8년간 그 자리를 지키도록 했다.
그와 함께 경호실에 있던 사람들은 그를 “우직하고 충성심이 강하며, 명령에 복종하고 책임감이 투철하며 대단히 강인한 심신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한번은 훈련 중에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다. 그때 마침 박 전 대통령이 외부 행사가 있어 경호를 해야 했다. 주변에서는 말렸지만 그는 압박붕대로 가슴을 동여매고 경호 업무를 끝마쳤다. 부하 직원들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박선호 과장은 군 검찰에서 “안재송이가 총을 뽑지 않았더라면 정인형도 뽑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본인도 그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대통령을 보호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정 처장으로서는 아무리 친한 친구였을지라도 동기생 박 과장의 말을 듣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해병간부후보생 16기생들은 정 처장에 대해 말을 아꼈다. 한 16기생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동기끼리 그랬는데(서로 총을 겨누고 죽였는데) 이야기하기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다른 16기생은 “(정인형도, 박선호도)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 군인 중의 군인이다”라며 “누구도 반역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0.7초의 사수(射手)
“임자, 전국에서 총을 제일 잘 쏘는 사람이 누구야?”
1965년 1월 초 박 전 대통령이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물었다. ‘피스톨 박’이라 불리던 박 실장이 답했다. “해병장교 안재송이 제일입니다.”
안 부처장은 그 전해인 1964년 10월 일본 도쿄 올림픽 사격 자유권총 부문에서 9위를 차지했다. 한국 국가대표 사격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10위 안에 드는 쾌거였다. 박 실장이 안 부처장을 추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로 불러 독일제 ‘골더’ 45구경 사격용 권총을 하사했다. 그 권총은 그 전해 9월 독일(서독)을 방문했던 박 전 대통령이 당시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대통령경호실 사격 교관으로 발탁됐다. 물론 국가대표도 겸하는 직이었다.
1960년대 안 부처장과 함께 사격 국가대표를 했던 고민준 씨(80)는 안 부처장을 “훌륭한 분”으로 기억한다. 당시 아시아경기 사격 종목 중에는 38구경 실탄사격 종목이 있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도통 실탄을 구할 수가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면 안 부처장이 미8군에서 조금씩 얻어다 모은 실탄 100발을 가져다줬다. 그중에서 30발로 연습을 하고 나머지 70발은 대회에서 썼다.
1988, 1992년 올림픽 사격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배병기 씨(77)도 안 부처장과 비슷한 시기에 국가대표를 지냈다. 배 전 감독은 “안 부처장이 미남에 영어도 잘하고 매너도 깔끔해서 교관을 하다가 수행경호관으로 발탁됐다”며 “그가 숨졌을 때 경호실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침통했다”고 기억했다.
안 부처장은 가슴에 찬 총을 꺼내 25m 앞의 박카스 병을 맞히는 데 0.7초밖에 걸리지 않았던 특등사수였다.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은 안 부처장의 죽음을 두고 “그렇게 빠른 명사수가 총도 뽑지 못하고 숨졌다”며 애석해했다고 한다. 국립묘지 안장도 못한 4인
김용섭 김용태 경호관의 유족은 국가보훈처를 통해 생존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용섭 경호관의 유족은 본보의 취재를 거절했고, 김용태 경호관의 유족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 4인의 경호관은 숨진 직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했다. 대통령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정 처장의 유족은 당연히 국립묘지에 묻히는 줄 알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발인 이틀 전에야 불가함을 통보받고는 황망히 충남 연기군 선산에 묘를 마련해야 했다. 너무 급하다 보니 석물을 만들 여유조차 없었다.
이후 전두환 정권 때까지 이들의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5공화국 정부 실세들은 유신정권과의 차별화에 역점을 뒀기에 박 전 대통령을 경호했던 이들의 주변 또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식이 없었던 안 부처장은 화장돼 납골당에 모셔졌고, 두 김 경호관은 각각 공원묘지에 묻힌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1988년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양지로 나올 수 있었다. 마치 박근혜 대통령이 5공 정부가 끝난 뒤에야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바깥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당시 보훈처는 소관위원회를 열어 이 4인의 예우를 비로소 순직으로 처리했다. 그때부터 이들의 유족은 순직군경배우자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10·26 34주년이 되는 지금도 이들의 연고나 유족의 행방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 시절 경호실에 근무했던 사람들의 모임인 ‘청호회’에서도 이들은 잊혀진 사람들이었다. 현 대통령경호실에서는 10·26 이후 이들의 묘소에 매년 꽃을 보낸다고 했다. 그것 말고는 별다른 조처는 하지 않고 있었다.
취재 중에 접한 정 처장의 해병 동기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 누가 잘못했겠는가.” 잊혀진 4인의 경호관은 유신이라는 시대가 낳은 우리의 이웃에 다름 아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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