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전자정부시스템 자료의 유출 우려에 대해 발 빠르게 진상규명 및 수사에 착수한 것은 ‘국가 안보’라는 시급성을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가능성은 낮지만 이 자료가 외부로 유출됐을 경우 국가 전자정부시스템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손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청와대도 이 같은 위기의식을 감추지 않았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14일 국정감사에서 민주당이 ‘수사’에 대해 반발하자 “그것이 대한민국 전자정부시스템 설계도이기 때문”이라며 “혹시라도 외부에 유출되거나 위해를 가하는 세력에게 가면 매우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군사기밀 못지않게 국가 안보에 끼치는 영향이 큰 민감한 자료임에도 청와대와 한국정보화진흥원이 주고받은 과정이 너무 허술한 데다 그마저 입증할 문서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의혹을 키우고 있다.
2008년 1월 초 청와대는 구두로 이 자료를 요청했고 진흥원이 ‘국가 보안’을 이유로 거부하자 청와대는 문재인 비서실장의 직인이 찍힌 공문을 보내 거듭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 공문은 현재 진흥원은 물론이고 대통령기록관에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자료는 아무런 보안장치가 없는 외장하드에 담겼고 반환될 때는 아예 공문도 없이 외장하드만 달랑 돌아왔다. 마치 학교나 회사에서 친구나 동료가 자료를 전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안전행정부 조사 결과 당시 진흥원이 제출한 자료는 네트워크 구성도, 인터넷주소(IP), 데이터베이스(DB) 설계도, 비밀번호, 보안장비 현황 등이다. 소스코드(프로그래밍 언어로 구성된 설계도)는 빠졌지만 시스템 보안에는 치명적인 자료들이다.
특히 전자정부시스템 가운데 7개는 현재도 기존 체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진흥원이 제출한 자료가 외부에 유출됐고 누군가가 이를 악용해 해킹을 시도한다면 손쉽게 뚫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다. 정부는 해커의 집중 공격이 예상된다는 이유로 7개 시스템의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박찬우 안행부 1차관은 “(소스코드라는) 열쇠만 없을 뿐 비상구가 어디에 있는지 같은 건물 구조에 대한 자료를 통째로 건넨 셈”이라고 표현했다. 또 “당초 36개 시스템으로 알려졌지만 조사 결과 34개 시스템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앞으로 행정기관끼리도 중요한 전산시스템 자료를 함부로 주고받지 못하도록 관련 제도를 정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관계기관과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전체 전자정부시스템에 대한 정밀 영향분석에 착수할 예정이다.
이 사건은 ‘국가 안보’ 문제와는 별개로 특검 논란과 예산안 처리 등으로 얽히고 꼬인 연말 정국에서 또 다른 정쟁의 불씨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새누리당은 벌써부터 이 문제를 ‘친노 세력의 국가 재산 사유화’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김태흠 새누리당 의원은 이날 국정감사에서 “노무현 정부 인사들이 (이 설계도 등을 가지고) 봉하마을에 제2의 청와대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민주당과 노무현 정부 청와대 인사들은 아직까지 정부의 수사 착수 등에 대해 공식 논평 등을 자제하며 사태의 진행을 주시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경찰이 2008년 1월 이 자료를 요청한 민기영 업무혁신비서관 등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과 문재인 비서실장을 소환하려 할 경우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건에 이어 여야는 또다시 격렬한 충돌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