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장경욱 전 국군기무사령관(소장·육사 36기)이 본보 인터뷰에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의 인사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이 문제를 청와대에 직보(直報)했다고 밝히자 군이 발칵 뒤집혔다.
전(前) 기무사령관이 바로 얼마 전까지 직속상관이었던 국방부 장관과 군 인사를 놓고 공개적으로 ‘날선 공방’을 벌이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터진 것. 기무사의 위상과 역할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등에는 “기무사령관이 어떤 자리이기에 국방부 장관과 ‘맞짱’을 뜨나” “국방부 장관도 기무사의 감시를 받는 건가” 등 수백 개의 댓글이 올라왔다. 장 전 사령관의 발언과 행동에 대한 찬반양론도 온라인 공간을 뜨겁게 달궜다.
아울러 장 전 사령관이 김 장관의 인사 전횡을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직언하려다 ‘괘씸죄’에 걸려 임명된 지 6개월 만에 교체됐다는 얘기가 흘러나오자 대통령과 기무사령관의 관계도 새삼 주목의 대상이 됐다. 더욱이 그의 후임에 박근혜 대통령의 남동생인 지만 씨와 육사 동기인 이재수 중장(육사 37기)이 전격 발탁되면서 그 배경을 놓고 갖은 억측과 의혹이 불거졌다. 도대체 기무사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시대가 바뀌었지만 기무사는 여전히 비밀스러운 군 조직이다. 안보와 직결된 군 정보보안 업무를 다루는 기무사의 ‘속사정’을 들여다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일반인에겐 ‘기무’라는 명칭조차 낯설다. 하지만 기무사를 빼놓고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논하긴 힘들다.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령부는 군사정부 시절 ‘절대권력’이자 공포와 억압정치의 상징이었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후 등장한 신군부의 쿠데타(군사정변)도 보안사를 주축으로 이뤄졌다. 1980년대 말 민주화 이후엔 불법 정치사찰 파문 등으로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무소불위의 권력기관
기무사의 연혁은 1948년 정부 수립과 시작을 같이한다. 광복 이후 대공업무 전담기구 창설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948년 조선경비대 정보처 내에 기무사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특별조사과가 설치됐다. 이후 특별조사대(1948년), 육군본부 정보국 특무대(1949년) 등으로 개편돼 간첩 검거와 부정부패 색출 업무를 맡아 왔다. 6·25전쟁은 기무사 조직이 확대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육군 특무부대와 해군 방첩대, 공군 특별수사대가 창설돼 숙군 활동 및 군내 간첩 검거 활동을 했다. 당시 육군 특무부대 및 방첩부대원들은 조선시대 암행어사가 차던 마패와 유사한 ‘메달’을 갖고 다녔다고 한다. 이 메달은 앞면에 ‘육군특무대’, ‘육군방첩부대’라는 글자가 적혀 있고 뒷면에 영문 약자인 ‘K.A.CIC’라고 적혀 있었다.
각 군에 흩어져 있던 조직이 장관 직속기관 부대로 통합된 것은 1977년 10월 보안사가 출범하면서부터다. 기무사 역사에서 보안사 시절(1977∼1990년)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정치 개입이 가장 두드러졌던 시기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신군부는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권력 공백을 틈타 보안사 조직을 동원해 12·12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거머쥐었다.
지금의 기무사로 이름을 바꾼 것은 ‘윤석양 이병 보안사 민간인 사찰 폭로사건’을 겪고 난 뒤인 1991년 1월이다. 기무(機務)란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비밀을 지켜야 할 중요한 일’로, 조선이 1880년 설치한 ‘통리기무아문’과 1894년 갑오개혁 때 정치와 군사 사무를 관장한 ‘군국기무처’에서 처음 사용됐다. 기무사는 2008년 37년간의 청와대 앞 소격동 시절을 마감하고 경기 과천시의 현 청사로 이전했다. 어두운 과거를 털고 새 출발을 하겠다는 의지의 한 단면이었다. 기무사 관계자는 “당초 국가정보원이 자리한 서울 서초구 내곡동으로 옮기려다 정보기관이 한곳에 몰리면 유사시 국가정보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는 국정원의 반대로 무산됐다”고 전했다. 베일에 가려진 조직과 요원 선발
보안을 강조하는 군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조직이 기무사다. 지금까지 정확한 조직 규모와 편제가 공개된 바 없다. 기무사는 사령관을 정점으로 준장인 참모장이 사령관을 보좌하고 있다. ‘3부(部) 8처(處) 체제’가 기본 골격이다. 1부는 정보, 2부는 보안, 3부는 방첩과 대테러를 담당하며 각 부 산하에 8처가 편재돼 있다. 국정원과 유사한 편제로 국내 일반 정보와 군내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1부가 핵심 부서로 꼽힌다. 그 밖에 기무사는 국방부(100기무부대)와 합참(200기무부대)은 물론이고 일선 사단급 부대에서도 기무부대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기무사는 ‘부 체제’를 ‘처 체제’로 바꾸는 조직 개편을 검토하고 있다. 보고체계를 단순화하기 위해서다. 아울러 정보 담당인원을 대폭 줄이는 대신 보안과 방첩, 대테러 인력을 보강하고 사단급 기무부대를 군단급으로 통폐합해 몸집을 줄이는 작업도 검토하고 있다.
기무사 요원들은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선발된다. 장교의 경우 임관 후 4∼6년차 장기복무자들 중에서 교육성적과 근무평정이 우수한 이들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진다. 국방·군사·정보통신에 관한 소양평가와 군 안보 이슈에 관한 논술 시험 등 1차 관문을 통과한 뒤 개인발표-심층면접-종합면접으로 이어지는 3단계 면접을 본다. 합격자들은 22주간 전입 교육을 받은 뒤 본부와 일선 부대에 배치된다. 군 관계자는 “시험도 시험이지만 해당 부대의 추천서가 어떠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군무원이나 부사관도 엄격한 선발 절차를 거친다. 병사들은 육군훈련소에서 전산 추첨과 철저한 신원조사를 거쳐 선발되면 기무사 부대에서 행정병과 특기병으로 근무한다. ‘기무사령관이 뭐기에…’
기무사 수장인 기무사령관은 ‘3성 장군’ 직위다. 올 4월 소장인 장 전 사령관이 임명됐을 때도 하반기 인사에서 중장 진급이 유력시됐다. 과거 기무사령관은 출세로 가는 요직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도 보안사령관(1968∼1971년) 출신이었다. 대통령도 두 명이나 배출했다. 20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21대 노태우 보안사령관이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문민정부 출범 이후 기무사령관의 ‘파워’는 급격히 축소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 초 대선 공약으로 내건 정보기구 축소 원칙에 따라 기무사령관 계급을 중장에서 소장으로 격하시켰다. 비육사 출신 준장급 장성이 기무사령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최근 들어선 기무사령관 출신 인사들의 정치권 진입도 눈에 띈다. 35대 사령관을 지낸 새누리당 송영근 의원은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안정권에 순번을 낙점받았고, 38대 사령관 새누리당 김종태 의원도 새누리당의 텃밭인 경북 상주에서 공천을 받아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박근혜 후보의 대선 캠프에 합류했다. 문두식 전 사령관(34대)은 임기를 마친 이듬해인 2004년 전남 나주-화순에 열린우리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허평환 전 사령관(37대)은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직접 국민행복당을 창당해 대표를 맡았다. 군 관계자는 “군내 민감한 정보를 총괄했던 기무사령관 출신들이 정치권에 몰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현역 시절 정치권에 줄을 대기 위해 관련 정보를 정치적으로 활용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 역대 주요 특무대-보안사-기무사 수장들 (이름/재임기간/기수/출신지) ▼
▼ “정보수집 수단엔 軍수뇌부-주요 지휘관 감청도 포함” ▼
대통령과 기무사령관
역대 정부에서도 기무사령관의 대통령 직보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집권한 대통령들도 군사정권의 폐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면보고나 독대(獨對) 형태로 기무사령관의 직보를 받았다. 기무사 관계자는 “군사정권이든 문민정권이든 정권 유지와 운영을 위해 더 많은 고급 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권력의 공통된 속성”이라고 말했다. 두 차례의 군사정변을 경험한 상황에서 군 정보조직의 수장인 기무사령관의 직보는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필요악’이었다는 얘기다.
기무사의 청와대 직보는 전신인 보안사령부 때부터 김영삼 문민정부를 거쳐 김대중 정부까지 계속됐다. 전직 기무사 고위 장성은 “김대중 정부 때까지 기무사령관의 ‘VIP(대통령)’ 대면보고는 월 한 차례 정도 이뤄졌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직후 정보기관장의 독대 폐지를 선언하면서 기무사 직보는 국방부 장관을 통한 간접보고로 바뀌었다.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정보기관장의 대면보고가 부활하면서 기무사령관의 독대보고도 재개됐다. 이 전 대통령은 매달 한두 차례 군내 동향과 방첩사건 등에 대해 기무사령관의 대면보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지난해 북한군 병사가 강원도 동부전선의 아군 전방초소(GP)로 귀순한 ‘노크 귀순사건’ 때도 이 대통령이 기무사의 직보를 통해 경위를 파악한 뒤 군 수뇌부의 미숙한 대응을 질책했다”고 소개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독대 보고는 다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재수 기무사령관도 지난달 기무사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 “현 정부 출범 후 대통령 독대보고가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국방부 장관부터 일선 부대장들의 동향 등 군내 정보를 총괄하는 기무사령관에 누가 기용되느냐는 군 안팎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기무사령관의 위상은 역대 정권의 인선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김영삼 정부에서 기무사령관 2명은 모두 PK(부산-경남) 출신이었고, 김대중 정부는 호남 출신 기무사령관을 세 번 연속 발탁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기용된 김종태(새누리당 의원), 배득식 기무사령관은 모두 TK(대구-경북) 출신이다.
군 관계자는 “군 장악과 견제를 위해 정권과 지역적 기반이 같거나 ‘코드’가 맞는 인물을 기무사령관에 기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군 인사에서 장 전 사령관 후임에 박 대통령의 남동생인 지만 씨와 육사 동기인 이재수 사령관이 발탁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박 대통령의 군에 대한 친정(親政) 체제 강화 포석이 아니냐는 얘기다. 기무사의 빛과 그림자
기무사는 건국 이래 붙잡힌 간첩 4500여 명 가운데 43%를 검거하는 등 국가안보에 기여해왔다. 북한의 도발 위협이 상존하는 만큼 대간첩 대테러 임무를 전담하는 기무사의 역할이 과소평가돼선 안 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첨단 방산기술의 유출과 사이버 테러 등 국익과 직결되는 미래 안보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기능과 조직을 더 보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기무사가 걸어온 길은 그림자가 더 짙다.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는 절대 권력기관으로 정치 개입과 민간인 사찰 등에 관여했다. 보안사의 서빙고 분실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남산 지하실,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과 함께 야당 정치인과 재야인사, 운동권 대학생에 대한 불법 연행과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다.
‘억압정치’의 상징이던 보안사는 1990년 10월 윤석양 이병의 민간인 불법 사찰 폭로로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다. 학생운동을 하다 입대해 보안사 예하부대에서 근무하던 윤 이병(당시 25세)은 운동권 동료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프락치 역할을 강요받고 괴로워하다 1300여 명의 민간인 사찰 카드와 컴퓨터 디스켓 등을 갖고 탈영해 이를 공개했다. 그가 폭로한 자료에는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 등 주요 정치인을 비롯해 각계 인사들의 성향과 행적을 추적한 내용이 포함돼 있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보안사는 1991년 국군기무사로 간판을 바꾸고, 정치사찰 중지를 선언했다. 지휘부 교체 등 조직과 직제를 개편하고 서빙고 분실도 해체됐다. 하지만 1년여 뒤인 1992년 이지문 육군 중위의 양심선언으로 기무사는 다시 홍역을 치렀다. 14대 총선 직전인 1992년 3월 당시 9사단 28연대 소속 이 중위는 기자회견을 통해 기무사가 군 부재자 투표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르고, 여당을 찍으라는 정신교육이 이뤄지고 있다고 폭로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기무사는 군 정보기관으로 자리를 잡는 듯했지만 심심찮게 불법 사찰 논란에 휩싸였다. 2009년 야권에선 “기무사가 재일교포 어린이에게 책 보내기 운동을 하고 있는 인터넷 동호회 회원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1년엔 일선 기무부대 요원들이 한 대학교수의 e메일을 해킹한 사건에 연루돼 군 검찰에 구속됐다. 이 사건으로 기무사는 사상 처음으로 군 검찰의 압수수색을 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기무사는 조직 차원의 불법 행위를 부인했지만 과거 잘못된 관행을 답습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기무사 고위 관계자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맹목적 충성을 했던 부끄러운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며 “군에 대한 문민통제가 제도화한 현 상황에서 기무사의 정치 개입이나 불법 사찰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기무사 권력의 원천은 동향보고
과거나 지금이나 기무사의 ‘파워’는 군내 동향을 밀착 감시하는 정보력에서 나온다. 군 당국에 따르면 기무사 요원 규모는 5000여 명(병 포함)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국방부와 예하 부대에 배치돼 군 수뇌부와 일선 지휘관 동향 등 내부 상황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실제로 몇 년 전까지 국방부 장관이나 합참의장, 각 군 등이 주관하는 공식 행사엔 기무관계자의 배석이 관행처럼 이뤄졌다. 사단급 이상 부대의 경우 영관급 장교가 기무부대장을 맡아 위관급 장교, 준위급 요원들과 팀을 이뤄 활동한다. 이들은 군 안팎의 여러 경로를 통해 해당 부대장의 충성도와 성실성, 국가관을 비롯해 비위 여부 등 세세한 동향까지 파악해 수시로 상부에 보고한다.
이런 실태를 보여 주는 에피소드. 새누리당 송영근 의원은 현역 사단장 시절 사석에서 “술을 잘하는 지휘관이 일도 잘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몇 해 뒤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기무사령관에 발탁된 그는 자신의 발언 내용이 그대로 담긴 동향보고서를 접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기무사 관계자는 “정보 수집 수단에는 군 수뇌부 등 주요 지휘관에 대한 합법적 감청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기무사의 동향 보고서는 진급심사 때 주요 인사자료로 활용된다. 기무사 간부 출신인 김모 씨는 “기무사의 동향보고는 진급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어 군 관계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무사 보고서가 특정 인사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기무사 일부 고위층이 동향보고를 활용해 군 인사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거나 좌지우지했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기무사의 동향 보고서는 철저히 ‘케이스(사례)’ 중심으로 작성된다. 풍문이나 ‘∼카더라’ 통신이 아닌 ‘팩트(fact)’에 기반을 둔다는 얘기다. 기무사의 고위 장성을 지낸 한 인사는 “대통령 등 최고위층에 제출하는 보고서는 ‘육하원칙’에 따라 사안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정확하고 치밀하게 작성된다”고 말했다. 장 전 사령관 재임 당시 기무사가 청와대에 보고한 일부 야전 지휘관의 부적절한 처신을 지적한 보고서도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이유로 기무요원들은 과거 보안사 시절부터 ‘특별대우’를 받았다. 1980년대 말 보안사에서 근무한 한 관계자는 “일선 사단장과 연대장이 위·영관급 보안사 장교에게 밥과 술을 사는 등 극진히 대접하는 게 통례였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 기무사 간부를 지낸 한 예비역 대령은 “국방부 고위 장성들도 기무사 관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고 전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확 바뀌었다고 기무사 측은 전한다. 육군 모 사단의 기무부대장으로 근무하는 A 중령은 “기무사의 역할이 군내 견제와 감시보다 보안 관련 지원과 업무 협조로 바뀌면서 과거의 특권과 월권적 관행은 사라진 지 오래”라며 “오히려 기무요원들이 괜한 구설에 오를까 행동에 각별히 주의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기무사 개혁의 관건
기무사의 주요 임무는 △군사보안 및 방첩업무 △군 및 군 관련 첩보의 수집·처리 △정보작전 방호태세 및 정보전 지원 △군사법원법(제44조 2호)에 규정된 특정범죄 수사 △국방 정보통신 기반체계 보호지원 등이다. 군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군내 동향을 음성적으로 청와대에 직보하거나 군 고위 인사들의 사생활 조사를 통해 군 인사에 개입하는 관행 때문에 기무사가 방첩이나 보안이란 본연의 임무를 등한시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2010년에는 현직 사단장이 기무사 요원의 ‘동향사찰’ 행위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기무사 소속 장교 2명을 군 검찰에 고소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건을 반영하듯 김관진 장관은 지난달 말 이재수 기무사령관의 취임식에서 고강도의 내부 개혁을 주문했다. 김 장관은 기무사가 매진해야 할 본연의 임무로 △군 내외 불순세력 발본색원 △장병 보안의식의 획기적 제고 △군사보안 활동 강화 △방위산업 기밀유출 방지 등을 꼽았다. 하지만 군 안팎에선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군 관계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무사에 대한 강도 높은 개혁을 요구해 왔지만 언제나 그때뿐이었다”며 “군 통수권자의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번에도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개연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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