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의 19대 총선 공천에서 서울 지역의 친이(친이명박)계 의원들은 겨울의 칼바람을 기다리는 가을 잎 신세였다. 그들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낙엽이 돼 바닥을 뒹굴었다. 20명 안팎의 서울 친이계 중 살아남은 의원은 5명 정도에 불과했다. 18대 총선에서 ‘이명박 바람’을 타고 당선됐던 초선들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18대에 피해자였던 친박은 박근혜 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버티던 19대엔 죄업(罪業)을 심판하는 명부시왕(冥府十王)이 돼 있었다.
2012년 3월 초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6층 공천심사위원회 회의실. 공천 작업의 실무를 총괄하는 권영세 사무총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청와대 사람이 항의하러 찾아왔더라. 낙천자 중에 친이계가 너무 많다는 거다. 그래서 ‘야당이 이명박 정부 심판론을 들고나올 텐데 그런 구도를 깨려면 친이의 희생이 불가피하다. 총선에서 지면 MB(이명박 대통령)도 퇴임 이후 구속될 수 있다’고 했더니 아무 말도 못 하더라.”
친이계 공천 배제 논리가 공심위 공식 회의에서 거론된 순간이었다. 친박 중심으로 구성된 공심위원들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대리인 격이었던 권영세의 논리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당시 공천 문제로 권영세와 수시로 만난 이는 이달곤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이었다. 이달곤의 회고는 공심위원들이 증언하는 권영세의 발언과 달랐다. “청와대가 당에 친이 입장을 대변한 적은 없었다. 공천의 큰 원칙과 공천자 개개인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게 전부였다.”
공천은 친박이 짠 시스템에 의해 진행됐다.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공천을 해야 한다는 박근혜의 원칙 때문이었다. 공심위가 공천 기준의 ‘헌법’으로 삼은 건 ‘현역 의원 하위 25%를 배제한다’는 컷오프(cut-off) 룰이었다. 이 룰을 만든 건 공심위가 아니라 비대위 정치쇄신분과였다.
그해 1월 이상돈 분과위원장(중앙대 교수), 김세연 의원(간사) 주광덕 홍일표 의원과 자문위원이던 장훈 중앙대 교수, 가상준 단국대 교수, 곽진영 건국대 교수가 국회 의원회관 1층 회의실에 모였다. 비대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현역 의원 교체 룰을 짜는 게 이들의 임무였다. 몇몇 위원들은 “시스템이 우선돼서는 안 된다. 계파와 무관하게 훌륭한 분을 공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을 냈지만 ‘정량적 평가 기준이 필요하다’는 비대위 방침이 우선이었다. 결국 가상준 교수가 컷오프 룰을 짰다. 새누리당 의원이 현역인 지역구 유권자를 상대로 ‘19대 총선에도 현역 의원이 출마하면 투표하겠느냐’고 질문해 지지율이 낮은 의원들을 낙천시키는 방식이었다. 당초에는 20%만 배제하는 안이 논의됐지만 쇄신파였던 주광덕이 “새누리당이 100석도 어려운 상황에서 뼈를 깎는 모습으로 국민 앞에 서야 한다”고 주장해 25%로 조정됐다.
2월 2일 출범한 공심위는 새누리당 부설 여의도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본격적인 논의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논란이 된 건 이재오 의원이었다. 1차 공천자를 가리던 2월 26일 공심위 회의장에 있던 권영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김종인 비대위원이었다.
김종인=“이재오는 MB의 최측근 아닙니까. 그 사람을 공천하면 은평을은 이길지 몰라도 전체 선거구도에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절대 이재오는 안 됩니다.”
권영세=“특정인을 임의로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공심위원들과 논의해 보겠습니다.”
당시 공심위는 컷오프 말고도, 두 가지 룰이 더 있었다. 전략지역이 아닌 현역 단수 공천 신청 지역과 여론조사에서 경쟁자를 20%포인트 이상 앞서는 지역에는 현역 의원을 공천한다는 것이었다. 은평을에 공천을 신청한 후보는 이재오뿐이었다. 다음 날 정홍원 공심위원장은 비대위에 이재오 김선동 권영진 의원의 이름이 담긴 공천명단을 보고했다. 하지만 명단을 본 김종인 이상돈이 공심위안에 강하게 반발했다. 권영세의 설득에도 비대위원들이 태도를 바꾸지 않자, 정홍원은 비대위 회의가 끝나기도 전인 오전 10시 반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명단을 발표해 버렸다. 비대위의 재의(再議) 요청에도 공심위는 그날 오후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원안을 재의결했다. 이후 당내에는 “이재오를 살렸으니 이재오계는 다 죽일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재오에 대한 박근혜의 불편한 심기 때문에 나도는 추측이었다. 추측은 점차 현실이 됐다.
주초에 나올 것으로 예상됐던 컷오프 명단이 나오지 않으면서 공천 작업이 늦어지자 정홍원이 격노했다. 당시 민주당은 새로운 공천자 명단을 발표하며 여론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정홍원은 회의장에서 “여론조사 때문에 공천이 늦어진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권영세에게 화를 냈다. 당시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은 2007년 경선 때 박근혜 후보의 공보특보였던 신동철 현 대통령국민소통비서관이었다. 결국 그 주 일요일인 3월 4일 오후 공심위원들에게 컷오프 명단이 전달됐다.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살생부’였다. 명단에 따르면 단수 공천신청자와 불출마 선언자를 뺀 현역 의원 125명 중 25%인 31명은 무조건 공천을 받을 수 없었다.
이 살생부를 기초로 다음 날인 5일 2차 공천자 21명의 명단이 발표됐다. 컷오프에 걸린 31명 중 10명 이상이 서울에서 나왔다. 서울에서 컷오프된 현역 전원이 친이계였다. 가장 논란이 컸던 건 방송인 출신인 유정현 의원(중랑갑)의 탈락이었다. 유정현은 당 여론조사에서 37.6%의 선호도로 2위 후보(8.3%)를 압도적으로 앞섰지만 컷오프에 걸렸다는 이유로 3.1%를 얻은 4위 후보가 공천을 받았다. A 공심위원은 “여론이 좋았던 유정현 의원과 강승규 의원(마포갑)이 컷오프에서 각각 31위와 30위에 걸려 모두 의외라는 반응이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신지호 의원(도봉갑)도 여론조사에서 36.8%로 2위 후보(8.1%)를 크게 앞섰지만 컷오프로 낙마했다. 당시 일부 공심위원은 “당세가 강하지 않은 서울 외곽에는 인지도가 높은 현역을 공천해야 한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성호(중랑을) 전여옥 의원(영등포갑)과 이재오의 측근인 권택기 의원(광진갑) 등의 친이계 의원들도 고배를 들었다. 지지율이 낮았던 일부 친박 의원은 컷오프에 걸리지 않으면서 ‘컷오프 조작설’이 친이계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이재오의 핵심 측근인 진수희 의원(성동갑)의 공천 탈락은 ‘친이 학살론’에 불을 댕겼다. 컷오프에 걸리지 않은 진수희는 여론조사에서도 다른 후보를 20%포인트 가까이 앞섰지만 공심위는 그를 외면했다.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슈퍼에서도 상비약을 팔 수 있도록 약사법을 개정하는 일에 소극적이었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이재오는 진수희 권택기라는 양팔을 모두 잃었다. 진수희가 탈락한 9일 이재오는 기자회견을 열어 “보복공천은 안 된다. 컷오프 명단을 공개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다음 날 탈당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진수희에게 이재오가 전화를 걸었다.
진수희=“불공정한 보복공천에는 승복할 수 없습니다. 무소속으로 출마하겠습니다.”
이재오=“무슨 일이 있어도 탈당은 절대 안 된다. 지금은 참고 기다려야 한다.”
진수희는 결국 불출마를 결심했다. 이재오는 올해 7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정권 재창출을 위해 당에 남았지만 ‘인간 이재오’로 봐서는 그때 공천을 반납했어야 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해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52석을 얻어 기적적으로 승리했지만 서울에선 의석 상당수를 잃었다. 18대 총선에서 48석 중 40석을 차지했지만 19대에서는 큰 폭의 물갈이를 하고도 16석에 그치며 완패한 것이다. 살생부가 됐던 컷오프 명단은 지금까지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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