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승용 위원=“현재 강남에 시가 12억 원이 넘는 아파트 두 채를 보유하고 있는 소위 ‘강부자’고…, 그리고 소망교회 다니시지요?”
국세청장 후보자 백용호=“저는 교회를 나가 본 적이 없습니다.”
주승용=“또 소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으로 근무하신 S라인이라고 해서 제 자료에는 ‘강부자, 고소영, S라인’을 다 겸비한 3관왕의 최측근이라고 돼 있습니다. 시인하십니까?”
백용호=“그런데 ‘고소영’은 뭔가요?”
주승용=“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백용호=“저는 고려대를 안 나왔습니다.”
주승용=“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2관왕이군요.”
2009년 7월 백용호 국세청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인사청문회의 한 장면이다. 민주당 주승용 위원은 재선 의원. 대한민국 국회 인사청문회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질문이지만, ‘강부자’ ‘고소영’ ‘S라인’은 이명박(MB) 정권 5년 내내 빠지지 않고 등장한 인사 검증의 단골 메뉴였다.
백용호(현재 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교수)는 중앙대를 나왔고, 충남 보령 출신이다. ‘고소영’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이명박 서울시장 때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으로 있었으니 ‘S라인(서울시 인맥)’이라고는 할 수 있었다. MB와의 인연의 뿌리는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2008년 1월 초. 대선에 승리하고 새해를 맞은 MB는 새 정부의 인선에 골몰했다. 초기 인선 작업을 주도한 정두언 당선자 보좌역, 박형준 대통령직인수위 기획분과 위원, 박영준 당선자비서실 총괄조정팀장 등과 인물평을 주고받는 일도 적지 않았다. 때로는 인선 대상을 놓고 토론도 벌어졌는데, 특히 MB가 원세훈(나중에 국정원장)과 백용호를 언급할 때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MB=“원세훈 괜찮지 않아?”
박영준 등=“성격도 괴팍하고 밥도 혼자 먹고 그러는 사람인데 뭐가 괜찮겠습니까?”
MB=“백용호는 어때?”
박영준=“이전에 우리를 제대로 돕지 않고 6개월인가 잠적한 적이 있습니다.”
MB=“(약간 언성을 높이며) 그래도 내가 서울시장 나간다고 할 때 내 옆으로 가장 빨리 온 사람이 백용호야!”
MB가 백용호를 만난 건 15대 총선(1996년) 때였다. MB가 신한국당의 종로 선거구 후보였고, 백용호는 바로 옆 서대문구 후보였다. MB는 당선됐으나, 백용호는 패했다. 하지만 MB가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내놓고 ‘낭인(浪人)’이 됐을 때 위로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바로 백용호였다. MB가 설립한 동아시아연구원을 맡아 무보수로 뛰었다.
영어 속담에 ‘필요할 때 친구가 진짜 친구(Friend in need is indeed friend)’라는 말이 있다. 그 당시 MB에게 백용호란 그런 친구였다.
백용호는 MB 정부 출범과 함께 공정거래위원장으로 발탁됐다. 그 다음엔 국세청장, 그 다음엔 대통령실 정책실장, 마지막엔 대통령정책특보를 맡아 MB와 운명을 함께했다.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공정거래법 전문가도 아니고, 더구나 국세 행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는 MB의 ‘친위 리베로’였다.
2010년 9월 김황식 감사원장을 국무총리로 기용한 뒤에는 백용호를 후임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당시 백용호는 대통령실정책실장을 맡은 지 겨우 두 달쯤 됐을 때였다.
학문적 자부심이 강했던 백용호는 자기 경력에 ‘사정(司正) 이미지’가 쌓이는 것도 내심 부담스러웠다. 공정거래위원장에 국세청장, 거기다 감사원장까지 맡는다면? 모두 칼을 드는 역할이었다.
만약 이때 백용호가 감사원장으로 갔다면 MB 정권에 치명상을 입힌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 낙마 사태’(3월 30일자 ‘비밀해제 MB 5년-MB 손 부들부들 떨며 분노’ 참조)는 피할 수 있었을까?
MB에게는 또 한 명의 ‘S라인 친위 리베로’가 있었다. 원세훈이었다. MB의 포항중학교 후배였다. 이명박 서울시장 때 정무부시장을 지낸 이춘식 전 의원은 “MB는 원세훈과 백용호를 좋아했다. 사람들은 MB가 (그 두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몰랐지만…”이라고 술회했다.
특히 원세훈은 오직 MB만 쳐다봤다. MB의 친형인 이상득(SD)도, 멘토인 최시중도 쳐다보지 않았다. 늘 따로 밥을 먹는다고 해서 ‘원 따로’라는 별명이 생겼지만, 행동하는 것도 다른 친이 직계들과는 영 ‘딴판’이었다.
MB는 취임 후 조각(組閣) 때부터 원세훈을 국정원장에 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원세훈은 행정고시(14회)에 합격한 뒤 강원도에서 서울시까지 줄곧 지방행정만 해 온 사람이었다. 1988년 국무총리실 파견 근무를 한 게 ‘국정 경험’의 전부였지만, 그때도 지방행정담당관 자리였다.
“총리실에 있을 때 북한 문제를 연구하는 모임에 들어가 한 달에 한 번씩 공부했다. 또 (2006년 행정부시장을 끝으로 MB와 함께 서울시를 나온 뒤) 미국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에서 연수를 할 때 북한 문제를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원세훈은 언젠가 그렇게 말했지만, 역시 국정원장은 무리였다. 결국 SD가 나서 “국정원장 후보로는 경력이 모자란다”고 설득한 다음에야 뜻을 접었다. 그 사이 ‘50년 지기(知己)’이자 고려대 교우회장을 맡고 있던 천신일 전 세중나모여행 회장이 김성호 전 법무장관을 추천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냈지만 김성호는 그래도 고려대 출신이었다.
원세훈에겐 행정안전부 장관을 맡겼다. 이를테면 ‘경력 관리’의 기회를 준 것이다. 국정원장에 대한 MB의 ‘초심(初心)’은 여전히 원세훈이었다.
촛불사태는 MB의 초심을 일깨워줬다. 촛불이 잠잠해진 2008년 8월 MB는 뉴라이트 전국연합 회원 250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비공개 만찬을 가졌다. MB 정권의 탄생을 도운 우군(友軍)이었다.
“누가 내 편인지 이제 알겠다.” MB는 식사 도중 이렇게 털어놨다. 그리고 해가 바뀌자 원세훈 국정원장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TK(대구-경북)도, 고려대도 신뢰엔 한계가 있었지만 원세훈만은 달랐다. 최시중의 증언. “내가 세 번인가 말렸지만 대통령의 뜻이 확고했다. 또 가만히 돌아보니 원세훈 말고는 시킬 사람도 없었다. 내 얘기도 많이 나돌았지만 (형님의 친구인 나를 시키면) 대통령이 불편했을 것이다.” 마음 편하게 부릴 수 있는, 말 그대로 ‘심복’이 원세훈 말고는 없었다는 얘기다.
이춘식은 “원세훈이 다른 건 몰라도 북한에 대한 생각만큼은 확고했다”고 말했다. 본적은 경북 영주로 돼 있지만 원세훈의 선대(先代)는 북한 출신이다. 원세훈의 모교인 서울고 역시 6·25전쟁 이후 실향민의 자녀가 많이 다니던 학교로 유명했다. 성장 과정에서 ‘냉전적 반북(反北) 의식’이 쌓였을 개연성이 높다.
‘국정원 선거·정치 개입 의혹 사건’을 수사한 검찰 발표문을 보면, 검찰 역시 원세훈의 ‘반북 캐릭터’가 사건의 주요한 배경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의 대남 심리전에 대응하는 것은 국정원의 고유 기능이다. 그러나 (원세훈 국정원장은) 그 과정에서 북한의 주의·주장에 동조하는 세력은 물론 북한의 동조를 받는 정책이나 의견을 가진 사람과 단체도 모두 종북 세력으로 보는 ‘그릇된 인식’하에 국정원의 직무 범위를 넘어서는 불법적인 지시를 하게 됐다.’
이진한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그릇된 인식’이라는 표현이 이례적임을 의식한 듯 그 의미를 부연 설명하기도 했다.
“원세훈 전 원장은 종북 개념을 보통의 의미보다 더 넓게 해석했다. 한 사람의 생각이 북한의 주장과 유사하다면 북한을 지지하거나 추종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단일화 이슈 등에서 북한의 주장과 같다는 이유로 (단일화 주장 세력을) 종북 세력으로 봤다는 점에서 그릇된 인식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릇된 인식.’ 결국 국정원장에게 요구되는 고도의 판단력과 정치적 균형 감각이 부족했다는 의미다. 대통령의 신뢰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한마디로 자질이 부족한 인물을 ‘심복’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정원장에 앉혔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올 7월 원세훈이 국정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건설회사 대표에게서 1억6000여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자 MB는 “원세훈만은 돈 받고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도저히 못 믿겠다”고 탄식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