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통일코리아 프로젝트 2년차]
[제 3국의 북녘 아이들]<1>지워진 과거, 만들어진 기억
“사람들이 다 안 착해요. 그 사람들이 엄마한테 토마토를 막 던졌어요. 거짓말을 한다고 막 이렇게 banana and tomatoes(바나나랑 토마토를)…. 그래서 학교를 못 다녔어요.”
영국 런던에서 남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소도시 뉴몰든. 지난달 이곳에서 만난 강지애(가명·8) 양은 “왜 영국에 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며 빈주먹으로 뭔가 던지는 시늉을 했다. 한국말은 했지만 혀끝이 꼬부라지는 교포 2세의 발음이었다. 영어 단어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엄마가 왜 바나나랑 토마토를 맞았어”라고 묻자 “내가 중국에서 학교를 다니면 안 되는데, 다녀서요”라며 묻지도 않은 중국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중국에서 태어났어요. 핑크카드(출생지 등 신상정보가 적힌 서류)에서 봤어요. 내 이름, 그리고 날짜. 엄마가 공부해야 한다고 해서 중국 학교에 갔어요. 이렇게 똥머리(위로 올려 묶는 경단머리)를 하고 있는 중국 애들이랑 같이…. 중국 사람들은 다 똥머리를 해요.”
옆에서 듣고 있던 지애 엄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가 언제 중국에서 태어났니….” 기자의 눈치를 보면서 지애 엄마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지애 엄마가 중국을 거쳐 탈북한 것은 2000년대 초. 그러나 한국에 들어온 뒤 낳은 지애는 중국에 가본 적이 없다. 영국에서 난민 심사를 받기 위해 ‘엄마가 외우게 한 내용’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지애네 가족은 2009년 영국에 왔을 때 북한에서 탈출해 곧바로 유럽으로 왔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 정부의 합동심문을 거쳐 주민등록증을 받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은 숨겼다. 그래야 북한 난민으로 인정받아 영국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지원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에 없는 자신의 과거를 수없이 반복해 외우면서 지애는 실제로 그 생각을 믿고 있는 듯했다. 민망한 표정을 짓는 엄마에게 “No, I remember(아니야, 내가 기억한다고요)”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 만들어진 과거 속에 잊혀지는 한국
뉴몰든에 사는 또 다른 탈북 부모의 자녀 신현지(가명·10) 양에게도 ‘만들어진 기억’이 있다. 아빠에 대한 얘기다. “아빠는 여기 영국에서 무얼 하시니”라는 질문에 현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했다. 기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어깨를 움츠리더니 “아빠는 여기에 없어요. 좀 오래됐어요”라고 말했다.
현지 아빠는 영국에 없다. 한국에서 혼자 통닭집을 한다. 현지는 2006년 엄마, 남동생과 함께 이곳에서 난민 심사를 받았다. 엄마가 미혼모이거나 싱글맘 난민이면 양육비가 제공된다. 현지 엄마(37)는 “남편이 뒤늦게 영국에 따라오려고 했는데 영국 정부의 난민심사가 엄격해지면서 올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끊겨 버렸다”고 말했다. 그렇게 떨어져 산 지 7년째. 현지 엄마는 그런 상황에 어느덧 익숙해진 듯했다.
“뭐 어째요.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내년에 시민권을 신청해서 받으면 그때 남편을 초청할까 생각 중이에요.”
뉴몰든은 현재 600여 명의 탈북자들이 모여 사는 유럽 최대의 ‘탈북자 마을(North Korea Town)’로 불린다. 난민 인정과 지원에 적극적인 영국 정부가 탈북자를 대거 받아들이면서 한때 ‘탈북자 주민’이 1500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낯선 외국에서의 적응 실패와 언어 장벽 등으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도 속출했지만 아직도 이곳으로 오려는 탈북자들의 시도는 이어지고 있다.
일단 영국 땅에 들어가 난민 신청만 하면 심사가 진행 중인 기간에도 숙소와 생활비를 제공받을 수 있고, 어린이의 경우 교육과 의료 서비스가 무상으로 제공된다. 이후 난민으로 받아들여지면 영주권을 얻을 수 있고 집세를 포함해 월 3000파운드(약 520만 원) 안팎의 생활비와 각종 지원금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다. 다만 이런 혜택을 누리려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난민에 맞는 ‘과거’를 만들어야 한다.
현지 엄마는 “(난민 심사 때) ‘아이들을 탈북 이후 중국에서 낳았다’고 말해야 하니까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다”며 “잘못인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짓말”이라고 토로했다.
“아이들이 혹시라도 말실수를 하거나 밖에 나가서 순진하게 재잘거리다가 들통이 날까 봐 수시로 내가 질문을 던지고 그 거짓말 답변을 외워서 말하도록 훈련시켰어요.”
현지는 그 거짓말이 자신의 과거라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 “북한, 잘 모르는데요. 무섭고 싫어요”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 아이들은 북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북한이 어딘지 아느냐”는 질문에 최준 군(10)은 눈을 빛내며 “알아요”라고 큰소리쳤다.
“음, 사람들이 집도 많이 없고 돈도 없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어요. 땅에서 죽어요. 뭘 사면 나쁜 사람들이 빼앗아 갈 수 있어요. 아파도 약 없어요. 우리 아빠 군인이었는데 아빠 친구들 5명이 다 죽었어요. 아빠도 다 죽었다가 살아났대요.”
익숙하지 않은 한국말이 짧은 문장으로 끊기듯 이어졌다. 꼬이는 발음에 잘 안 되는 모국어가 답답했는지 준이는 한국어를 쓰다가도 자주 영어로 돌아갔다. 준이는 “엄마가 북한에 대해 말하면 police(경찰서)에 간다고, 북한에 끌려간다고, 그러니까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말 안 했어요”라고 했다.
준이의 19세 이복누나는 아직 북한에 살고 있다. 삼촌, 할머니도 북한에 살고 있다고 했다. 뉴몰든의 한 한국 상점에서 일하는 아빠는 최근까지도 번 돈의 일부를 북한에 보냈다. 아빠는 늘 준이에게 “더 크면 북한에 가서 네 누나를 찾아라”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 “내 조국은 어디…” 우리 새싹들이 뿌리 없이 자란다 ▼
얼굴도 모르는 이복누나 이야기를 하면서 준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빠는 탈북한 뒤 재혼해 준이를 낳았다.
“난 크면 (북한에) 갈 거예요. 누나한테 집도 주고 먹을 것도 줘야 해요. 빨리 가야 해요. 안 그러면 죽으니까. 우리는 먹을 것도 있고 햄버거랑 물이랑 다 있으니까. 누가 나 죽이려고 하면 칼 갖고 가고 총도 갖고 가요. 나쁜 놈들이 총 갖고 있어요.”
준이는 엄마가 보여주는 DVD와 TV 방송을 통해 북한을 알게 됐다. 북한의 실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는 물론이고 부자(父子)의 눈물겨운 탈북 과정을 담은 영화도 봤다. 준이는 또래의 꽃제비들이 장마당에서 시커먼 검댕이 묻은 얼굴로 구걸하는 장면도 봤다. 준이 엄마(39)는 “아이들에게 북한을 숨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며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교육이고 애들이 자라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탈북자 가정이 모두 준이 엄마처럼 교육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뉴몰든 탈북 부모의 대부분은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탈북자 몇 명은 동아일보의 인터뷰 요청을 강하게 거부했다.
북한에 대해 준이만큼 아는 아이가 많지 않은 건 당연했다. 인터뷰에 응한 10여 명의 어린이 중 통일이 무엇인지 아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북한이 어떤 곳인지도 잘 몰랐다. 지애는 “(북한에) 절대 가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거기는 대왕이 다 jail(감옥)에 보내고 사람들을 죽여요. 교회에서 전도사님이 불쌍한 북한 사람들을 위해 다 같이 기도하자고 했어요….”
김은지 양(9)은 엄마의 과거 삶에 대해 일곱 살 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엄마의 생활에 대해 적어 가는 숙제를 받아 온 날 엄마는 딱 한 번 입을 열었다고 한다. 엄마는 이후 북한과 관련된 이야기를 더 해 주지 않았다.
“엄마는 13세 때 가족들이랑 흩어져서 잘못 살았어요. 중국에서 경찰에 잡혔고 잘 먹지도 못하고 감옥에도 갔대요. 외할아버지가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는데… 큰 강이 있었대요. 이렇게 열린 강이 있었는데 거기로 건넜대요. 아빠는 태국에서 만났대요.”
은지는 “많이 놀랐어요. 슬펐어요. 싫어요. 거기는…”이라고 말했다. 옆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은지 엄마(29)는 “어머니 없이 아버지와 탈북했다가 붙잡혀 강제 북송됐다. 중국에서 고아로 떠돌았던 그 상처를 내 아이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 아이들에게 북한은 무섭고 싫은 곳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한국을 ‘내 나라’로 느끼지도 않았다. 난민 심사를 위해 한국에서의 모든 기억을 지웠고 그 후에도 ‘한국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가 보고 싶다”는 아이들은 있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영국 영주권을 가진 이 아이들은 시민권이 나올 때까진 법률적으로 엄연한 북한 국적의 북한 난민이다.
○ “아이들 미래 위해 대한민국이란 뿌리 버렸다”
아이들의 정체성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내 뿌리는 한국’이란 인식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김주일 재유럽조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은 “대부분의 탈북자 부모가 아이들에게 탈북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뿌리가 어디인지, 북한은 어떤 곳인지, 한국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안 가르친다”며 “정체성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정체성 문제는 성인인 탈북 부모들도 겪는다. 뉴몰든의 한인 교포들은 “탈북자들은 뭔가 우리와 다르다”고 말한다. 북한에서의 어두운 기억, 북한식 말투, 이질적인 사고방식 등 때문에 한국 출신의 교포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면서 영국 사회에도 섞여들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여행자와 출장자들을 상대로 민박집을 운영하는 한 교포는 “우리는 돈 벌어서 세금과 집값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는데 탈북자들은 이곳 대졸 초봉의 2배가 넘는 생활비와 집을 그냥 제공받는다”며 “뉴몰든에서 제일 부자는 탈북자들”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버버리 같은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탈북자로 보면 된다”고도 했다.
탈북자들을 상대로 목회를 하는 런던새마음교회의 강도준 목사는 “생활비를 비롯한 각종 지원금이 안정적으로 나오다 보니 일자리를 얻지 않고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도 생기고, 낯선 자본주의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도박에 빠지는 등 탈선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걱정했다.
이런 시선에 대해 뉴몰든의 탈북자들은 “그래도 영국에서의 삶은 한국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라고 입을 모았다. 남한에서 경험한 차별과 편견, 은근한 따돌림 같은 것들이 이곳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현지 엄마는 “오로지 애들 때문에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 공부시킬 자신이 없었어요. 아무리 날고 기어도 그 많고 비싼 학원들을 다 어떻게 보내요. 한국은 이제 겨우 우리 둘째(6세)만 한 애들이 서로 ‘너 몇 평 아파트에 사니, 방은 따로 있니’ 그런 것들을 묻고…. 그 차별의 시선은 또 어쩌나요. 애들한테까지 상처를 줄 수는 없었어요.”
최연제 양(6)과 재룡 군(5)의 엄마(함경북도 회령 출신)도 같은 이유로 연제가 생후 2개월이었을 때 무작정 영국행 비행기를 탔다.
“우리는 이미 힘든 것 다 겪으며 살았고 고향을 떠나 봤으니 낯선 나라에서 또다시 힘들어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한국에서 애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애들 키우기가 정말 무서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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