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線 넘은 은혜 가족 “한국 대사관서 안받아줘 미국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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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통일코리아 프로젝트 2년차]
[제 3국의 북녘 아이들]<2>남녘 땅 대신 선택한 아메리칸 드림

북한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정착한 탈북 젊은이들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길고 어려운 과정이었다. 드넓은 태평양을 건너온 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조국을 등진 사람들의 집단 이동)가 날선 경계심을 만들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요청을 거듭하면서 기자의 마음은 간절해졌다.

“여러분(재미 탈북 젊은이)의 ‘어제’가 곧 북한 어린이의 여전한 ‘오늘’이잖아요. 다문화사회인 미국에서, 그 안의 ‘작은 한국’인 한인사회에서도 분투 중인 여러분의 이야기는 미래의 통일코리아를 준비하는 데도 적지 않은 시사점이 될 수 있어요.”

한 달 가까운 기다림 끝에 ‘예스’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지난달 중순 미 버지니아 주의 애넌데일에서 조은혜 씨(23·여)를, 같은 주의 알링턴에서 서철수(가명·27) 씨와 각각 마주 앉았다.

이제는 그레이스, 제이컵이라고 불리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북한은, 한국은, 그리고 통일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일까.

○ “다섯 밤만 자면 데리러 온다 했는데…”

“제가 일곱 살 때였어요. 식량을 구하러 중국에 다녀온 아버지를 보위부가 탈북자로 몰아세웠죠. 어머니만이라도 살리겠다고 아버지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고문 받다가 돌아가셨어요. 간신히 풀려난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들어오시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1998년 7월의 어느 깊은 밤. 은혜 씨 자매가 엄마의 손을 잡고 고향을 도망치듯 등져야 했던 것은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영양실조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4세 남동생에게는 무리였다.

“나중에 사람을 보내 동생을 데려오기로 했죠. 엄마가 떡 5개를 쥐여주면서 ‘다섯 밤만 자면 데리러 온다’고 하자 울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이던 착한 아이였어요.”

은혜 씨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1시간 넘게 줄곧 담담하면서도 거침없는 어조로 이야기하던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김정일의 ‘탈북자 총살령’이 내려진 때였거든요. 나중에 수소문해보니 동생을 맡아준 북한 지인 집도 사정이 어려워지자 동생을 쫓아냈다고 해요. 그 뒤 혼자 겨울 들판을 헤매다 굶어 죽었다는 말도 있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엄마가 절규했다. “왜 북한이라는 이놈의 나라는 이렇게밖에 되지 않는 거야.” 그 통곡의 소리는 아직도 은혜 씨 귓가에 생생하다.

양강도가 고향인 철수 씨에게도 비슷한 아픔이 있다.

“밑으로 동생 세 명이 있었는데 대기근 때 다 굶어 죽었어요. 그중에서도 막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던 2세 여동생이 제일 기억나요. 온 가족이 식량을 찾아 나설 때면 그 애를 강아지처럼 묶어놓고 갈 수밖에 없었어요. 해질녘 들어가면 혼자 울다 지쳐 잠들어 있던 모습이 참….”

철수 씨 가족 역시 ‘살아남기’ 위해 강을 건넜다. 2007년 6월 어느 여름밤의 일이다.

○ ‘멀고 먼 나라’ 한국

새 삶을 위해 처음부터 미국행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은혜 씨는 엄마 언니와 함께 중국 옌볜에서 4년간 숨죽이듯 살았다. 신분이 노출될까 걱정돼 학교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언젠가 한국에 갈 거야’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았다.

은혜 씨는 한국행을 미끼로 탈북자들을 유린하는 일부 탈북 브로커의 어두운 세계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브로커가 말한 베이징의 건물이 외국 공관이고, 그 담장만 넘으면 한국에 갈 수 있다는 말만 믿었어요. 그런데 서방국 대사관이 아니라 그냥 외국인들이 묵는 게스트하우스였어요. 우리 모습을 찍어 언론사 등에 팔려는 의도였던 것 같아요. 죽을힘을 다해 담장을 넘으려는 데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바로 모두 잡혀 북송됐죠.”

은혜 씨 모녀는 2006년까지 강제 북송과 재탈북을 세 차례나 반복해야 했다.

은혜 씨는 “그래도 여기(미국)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알게 모르게 저희를 도와주던 분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보위부에 끌려간 엄마에게 음식까지 넣어주며 석방을 위해 힘써준 아버지의 친구분, 유엔난민기구(UNHCR)라는 곳을 소개해 주고 줄까지 놔주신 조선족, 선교사님 모두 우리의 은인”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 내내 은혜 씨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꺼렸다.

그의 언니 진혜 씨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중국에 있는 동안 선양 한국영사관에 전화와 편지를 보냈지만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토로한 바 있다. 한국은 그들을 보호해줘야 할 ‘국민’으로 감싸 안지 못했다고 은혜 씨는 느끼고 있는 듯했다.

2006년 11월. 은혜 씨 가족은 베이징 UNHCR 사무실에 극적으로 진입해 미국행을 호소했다. 중국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하던 때라는 ‘타이밍’이 큰 힘이 됐다. 이번엔 오히려 한국대사관 관계자들이 찾아와 한국행을 권유했지만 상처 입은 마음은 굳어진 상태였다.

2008년 3월 마침내 도착한 미국에서의 첫날 밤, 세 모녀는 서로 부둥켜안고 벅차오르는 감정에 밤새 울고 또 울었다.

철수 씨 가족은 아예 처음부터 한국행을 고려하지 않았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인근에서 1년 반 정도 숨어 지내는 동안 한국 등 외부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유화적인 대북 정책 기조에 항상 불만이 많았다고 했다.

“아버지와 동생이 중국에 있을 때 미국 방송을 많이 봤어요. 그래서 큰 나라 미국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컸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한국이 ‘대북 퍼주기’를 하고 있지만 북한 주민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 “미국선 잘 살줄 알았는데…” 산산조각 나버린 철수 가족 ▼

동생이 용기를 내 ‘미국의 소리(VOA)’사에 전화를 걸었다. 종종 듣던 한국어 방송에서 불러준 번호였다. 미국행 의사를 밝히자 VOA 관계자는 UNHCR와 다리를 놔줬다. 가족은 관광객으로 위장해 중국 국경을 넘었다. 이 얘기를 할 때 철수 씨의 표정에는 당시의 긴장감이 짙게 묻어났다.

“관광객으로 위장하고 기차를 타고 가던 중이었어요. 갑자기 공안이 다가와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거예요. 그리고 제 신분증을 받아들자마자 손톱으로 한번 쓰윽 긁더니 “가짜잖아!”라고 소리쳤어요, 그때 심장 뛰던 일을 생각하면….”

하지만 공안은 ‘다음부터는 주의하라’는 말만 남긴 채 사라졌다. 철수 씨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2008년 11월. 마침내 철수 씨 가족은 라오스에서 UNHCR 및 미국대사관 관계자들과 만났다.

“왜 한국이 아닌 미국입니까.”(미대사관 관계자)
“아이들에게 보다 안전하고 공평하고 자유로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철수 씨 아버지)
그로부터 7개월 뒤인 2009년 6월. 철수 씨 가족은 미국 땅을 밟았다.

○ 불법체류 탈북자 노린 암시장까지 등장

은혜 씨나 철수 씨처럼 탈북 후 제3국을 경유해 합법적으로 미국에 정착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 정착에 실패한 뒤 자녀와 함께 미국에 밀입국하는 이른바 ‘탈북탈남인’도 상당수다. 그러나 이미 한국 국적을 부여 받은 탈북자들이 미국으로부터 다시 난민 지위를 부여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국이 이들에게 정치적 탄압과 인권침해를 가했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하기 때문이다.

단, 한국 국적을 취득했더라도 미국 법원에 의해 정치적 망명을 승인 받을 경우 합법적인 정착이 가능하다. 도미(渡美)해야 할 만한 절박한 사유가 있거나 미국에 중요한 정보 제공자인 경우가 해당된다. 지금까지 공개된 사례는 1998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뒤 2006년 미국 망명을 승인 받은 북한군 장교 출신의 탈북자 서재석 씨가 유일하다. 그만큼 까다롭고 어려운 과정이다.

결국 한국을 떠나온 상당수의 탈북자는 미국 내 불법체류자로 전락한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망명해야만 하는 절박성을 입증하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하는 데 몇만 달러를 써야 하고 미 당국의 결정을 기다리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7년간 한국에 정착해 살다가 2011년 미국에 온 피터 정 씨(42)는 미국 현지 대북지원단체가 스카우트해 취업비자를 받고 합법적으로 체류 중인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그러나 정 씨는 “내 주변에도 불법체류자로 전전긍긍하며 지내는 안타까운 탈북자가 꽤 있다”며 “이들을 위한 암시장까지 있다”고 말했다.

자녀 취학 등 미국 생활을 위해 필수적인 신분증을 발급받을 수 없는 불법체류자를 위한 운전면허증, 소셜시큐리티카드(한국의 주민등록증) 등을 위조해 판다는 얘기다. 미국 동부지역의 경우 가짜 운전면허증은 3000달러(약 318만 원), 소셜시큐리티카드는 7000달러(약 750만 원) 선에서 거래된다고 한다.

한국과 미국 정착의 장단점을 몸소 체험했다는 정 씨는 상당수의 탈북자가 한국을 등지는 가장 큰 이유로 ‘차별’을 꼽았다.

그는 “천안함 사태나 탈북자 위장간첩사건 등이 터질 때마다 탈북자들은 불안과 심리적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상당수 부모는 자녀들이 자랐을 때 ‘탈북자’가 아닌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편견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 다시 희망을 꿈꾼다

높은 기대감에 비해 냉혹한 현실의 벽에 부닥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가족과 함께 그토록 원하던 미국에 왔을 때만 해도 철수 씨의 아버지는 큰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미국 적응은 고되고 더뎠다. 중국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50대 아버지의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다니던 조그마한 한인 교회에서 ‘탈북자라 무시 받는다’며 괴로워했다.

가정불화도 끊이지 않았다. 2011년 6월. 아버지는 어머니를 자택에서 흉기로 찔러 살해한 뒤 목을 매 자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철수 씨가 그날 저녁 그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

평생 아물기 힘든 그 상처에 대해 철수 씨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가) 너무 주변에 의지하려 했던 거 같아요. 미국에 대한 기대감, 환상이랄까 그런 것도 컸던 거 같고요. 여기도 사람 사는 사회인데. 또 의지하면 할수록 상처도 쉽게 받을 수 있는, 독이 될 수도 있는 거죠.”

철수 씨는 요즘 한인 교회에 매주 나간다. 교인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한인이 운영하는 일식당에서 주방일을 배우는 데 여념이 없다. 철수 씨는 “통일된 한국에 가서 식당을 차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배고픈 친구들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나눠주고 싶어요.”

낮에는 치과에서 아르바이트를, 저녁에는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는 은혜 씨는 지난해 여름 시민권을 취득했다.

삶은 여전히 고단하지만 이제 높은 목표도 세웠다.

“아직은 감히 넘을 수 없는 산이라는 걸 알아요(웃음). 그래도 언젠가는 꼭 로스쿨에 진학해 국제무대에서 탈북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법조인이 되고 싶어요.”

그들은 다시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버지니아=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북한#탈북#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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