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최규선 게이트’의 당사자가 된 최규선이라는 젊은이가 내게는 바로 그 악연의 하나였다.
아직 내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본 게이오대에서 공부하고 있던 1998년, 최규선이 미국에서 나를 불쑥 찾아왔다.
“고문님, 저 억울합니다.”
도쿄 뉴오타니 호텔에서 최규선은 인사가 끝나자 다짜고짜 내게 그런 말부터 했다.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는 잘 몰랐지만, 그가 국민회의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국제담당 보좌역을 하다가 1997년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이강래, 장성민, 고재방, 박금옥 씨와 함께 당에서 청와대 비서관으로 데려가려한 다섯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듣고 있었다.
대통령이 비서관에 발탁한 인물이었다니까 나도 그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만난 것이었다. 최규선은 자기가 전남고등학교와 한국외국어대를 거쳐 미국 버클리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스칼라피노 교수와 가깝게 지내다가 귀국 후 존경하던 김대중 후보의 캠프에 합류했노라고 말했다.
나중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최규선의 학력은 자기가 말한 것과 조금 다른 것 같았고, 스칼라피노 교수도 최규선이 버클리대의 학부생이었지 자신의 조교를 한 적은 없다고 밝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규선이 세계적인 학자 스칼라피노 교수를 잘 알았던 것만큼은 사실인 듯했다.
“마이클 잭슨도 제가 오게 한 겁니다.”
최규선이 말했다.
그가 대선이 있기 직전인 그해 11월 21일 세계적인 팝스타 마이클 잭슨을 일산의 김대중 후보 집에 데려간 것은 사실이다. 당시 신문에는 미국 출신의 유종근 전북지사가 마이클 잭슨을 데려온 것처럼 보도되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의 방한을 주선한 것은 최규선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김대중 당선자를 만나기 전 무주리조트를 방문해 그곳에 투자할 계획이 있음을 시사하는 보도가 나갔는데, 이것은 당시 외환 위기를 만나 허우적거리고 있던 한국경제에 심적인 활력소를 주었던 것이 사실이고, 또 그를 만난 김대중 후보가 ‘경제를 되살리는 대통령 후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일조했던 것도 사실이다.
“소로스도 제가 데려왔습니다.”
최규선이 힘주어 말했다.
그것도 사실이었다.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인 1998년 1월 3일의 일이지만, 세계 금융계의 큰손인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 회장이 김대중 당선자를 방문한 것도 외환 위기로 위축돼 있던 국민들에게 위로가 됐으며, 또한 외국계 ‘큰손’들의 한국 투자재개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던 것도 사실이다.
○만화 주인공 뽀빠이
그는 대선 직전부터 김대중 후보와 마이클 잭슨, 조지 소로스, 미키 캔터 전 미국 상무장관 간의 화상회의를 성사시켜 주목을 받았다. 김대중 후보의 기쁨은 컸을 것이다.
최규선은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 날 아침 자기에게 “앞으로 자네는 정치적으로 대성할 것이네” 하는 말을 듣고 만화 주인공 뽀빠이가 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저는 위스콘신주립대에 다니던 1984년부터 대통령을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캠프에 합류하고 난 뒤에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힘껏 뛰었습니다. 제가 대통령의 총애를 받자 주변에서 저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 가운데 결정적으로 중간에서 장난을 친 놈이 있습니다. 그 바람에 그만….”
“그게 누구야?”
“저와 형님 아우하고 지내던 고향 후배 C입니다.”
나는 대선 전부터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선을 전후하여 발생한 당 내부사정은 잘 알지 못했다. 최규선의 말대로 청와대에 입성한 C가 나쁘게 보고하여 청와대 비서관 임용에 탈락하게 되었다는 것이지만, 나중에 내가 귀국해서 들은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당에서 차출된 5명의 비서관 내정자 가운데 유독 최규선만 탈락하게 된 배경은 그의 ‘튀는’ 성격과 가벼운 입놀림 때문이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극도로 위축된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남북문제도 호전시킬 정책의 하나로 북한관광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당시는 환란(換亂)으로 외자가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래서 마이클 잭슨을 설득해 북한관광 사업에 투자토록 하는 계획을 세우고 최규선에게 은밀히 추진해보라고 일렀는데, 최규선이 그만 공명심에 못 이겨 이 계획을 언론에 흘렸던 것이다.
이 사실이 보도되자 최규선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상은 그랬지만, 당시 국내 사정을 모르던 나는 최규선의 말을 액면 그대로만 들었다. ‘재능 있는 한 젊은이가 중상모략으로 앞길을 잃었으니 얼마나 좌절했겠는가’ 하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네의 어려운 입장은 충분히 알아들었네. 앞으로 내가 귀국하면 기회를 보아 자네를 도와주겠네.”
이렇게 차 한 잔을 마시며 덕담을 나눈 뒤 나는 그와 헤어졌다. 그와의 만남도 인연도 그것뿐이었다.
그때 내가 측은한 마음에 해준 이 한 마디가 그 후 나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 “이걸 콱… 네가 대통령이냐!” ▼ 너무 튄 ‘동교동계 신인류’ 최규선
최규선은 뭐랄까, DJ(김대중)의 동교동계에 등장한 ‘신인류(新人類)’였다.
DJ를 당선시킨 1997년 12월 대선은 최규선의 무대이기도 했다. 외환위기로 나라가 곧 결딴날 것 같은 시기였다. 그해 초 37세의 나이로 DJ의 보좌역이 된 최규선은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의 딸 진지 만델라 부부를 초청해 ‘DJ=한국의 만델라’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월가의 억만장자 투자자’로 유명한 조지 소로스와 알 왈리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자의 투자도 이끌어냈다. 마이클 잭슨을 초청해 DJ를 만나게 한 것도 그였다. 최규선은 동교동계, 아니 한국 정재계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성큼성큼 해냈다.
마이클 잭슨의 방한을 성사시켰을 때는 ‘최규선이 매일 아침 자기 아이를 안고 한 달 내내 잭슨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더라’라는 식의 루머까지 떠돌았다. 하지만 난센스였다. 최규선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이웃에 잭슨의 큰형이 살고 있었고, 그 부인이 한국계 입양아 출신이어서 만들어진 인연이었다.
그렇게 맺어진 잭슨은 최규선에게 만델라 대통령도 소개해줬고, 알 왈리드 왕자와도 연결시켜줬다. 알 왈리드 왕자가 또 나중에 이라크의 잘랄 탈라바니 대통령을 소개해주고…. 최규선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최규선은 한국정치의 문법, 동교동계의 가법(家法)을 몰랐다. ‘튀면 죽는다’는….
DJ가 당선 직후 서울 삼청동 안가로 최규선을 불러들였다.
DJ=“어이, 소로스는 서울증권 인수하러 언제 들어오는가?”
최규선=“당선자님, 그분은 1년 전부터 일정을 정해놓고 움직입니다. 현재 조정 중이니 기다리십시오.”
DJ를 ‘선생님’으로 모셔온 동교동계의 눈과 귀에는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교동계의 행동대장’인 김옥두 의원이 최규선을 옆방으로 불렀다. “이걸 콱∼. 이 조막만 한 것이…, 아주 죽여불랑게.” 김옥두 의원이 주먹을 들더니 그렇게 으름장을 놨다고 한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외자유치를 도와달라며 몇 차례 자가용 비행기를 내주자 이번엔 동교동계의 최재승 의원이 나섰다. “넌 이제 죽었다. 지금 재벌 버르장머리 고치겠다고 하는데 네가 그 사람 자가용 비행기 타고 사우디아라비아 가서 난리법석을 떨면 위에 있는 사람들은 뭐가 되겠냐. 네가 대통령이냐!”
무엇보다 DJ의 장남 김홍일 전 의원이 최규선을 곱지 않게 봤다.
2002년, 그가 DJ의 3남 홍걸 씨와 함께 스포츠 토토 사업자 선정 과정 등에 개입해 이권을 챙겼다는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가 터졌을 때,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14일 낮 서울 플라자 호텔에서 유아이(UI) 에너지 회장으로 재기한 그를 만났다. “권 고문이 그래도 ‘최규선이 난놈은 난놈’이라고 하더라”고 전해주자 “내가 그때 몰라도 뭘 너무 몰랐다”며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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