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서울청사(옛 정부종합청사)는 우뚝하다. 서울 광화문 앞 세종대로 왼쪽으로 한발 비껴 선 수직건물이다. 그로 인해 인왕산의 울퉁불퉁 뼈마디 굵은 선이 종로 쪽 시야에서 대부분 지워졌다. 언뜻 보면 인왕산잔등에 길쭉하고 갸름한 육면체 탑이 서있는 모습이다. 84m 높이(19층). 1970년에 문을 열었으니 사람 나이로 치면 벌써 40대 중반이다.
박철곤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62·현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에게 정부서울청사는 그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딱 25년 7개월 동안(1983.6∼2009.1) ‘풋풋한 젊음과 희끗희끗한 장년’을 송두리째 이 청사에서 보냈다. ‘가장 먼저 나왔다가, 가장 늦게 집에 들어가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며칠씩 밤새우는 것은 흔한 일. 그에게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은 하숙집이었고, 본집이 바로 이 정부서울청사였다.
“지금도 가끔 광화문에 차를 몰고 나가면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청사 쪽으로 향한다. 그곳에 아직 내 책상이 있을 것 같고, 누군가가 꼭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방금 떠나온 고향집 같다고나 할까. 1983년 6월부터 청사 9, 10층 오른쪽 귀퉁이(908, 909, 1009호)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수습사무관을 거쳐 청사생활은 1109호에서 시작했지만, 옷을 벗을 땐 1003호실에서 근무했었다. 9층 남동쪽 머리에 총리집무실이 있었고, 보통 내 방은 같은 층 북동쪽 코너(경복궁 방향)에 있었다. 경복궁과 세종대로가 한눈에 보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땐 경찰의 세종로방어선이 내 방과 거의 일직선상에 있었다. 발아래 경찰과 데모대의 일진일퇴가 빤히 내려다보였다. 어느 풍수전문 교수는 ‘청사에서도 그 귀퉁이자리가 엄청 기가 센 자리라서 보통 사람 같으면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끄떡없었다. 2008년 쇠고기광우병 사태 땐 건물 좌우 중간쯤에 있는 1003호실에서 촛불시위를 밤새도록 지켜봤다. 만약 불상사라도 일어나면 총리주재 대책회의를 준비해야 했다. 총리도 사무실에서 밤을 새웠고, 나야 당연히 대기했다.”
그의 고향은 전북 진안 두메산골. 찢어지게 가난했다. 땅 한 뙈기 없었다. 아버지(1911∼1968)는 일제 강제징용으로 탄광일 하다가 몸을 다쳐 자리보전하고 있었다. 어머니(1921∼1991) 홀로 품팔이와 행상으로 칠남매(4남 3녀· 셋째아들이 박철곤)를 키워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박철곤만은 어떻게 하든 공부를 시키려 했다. 마침 박철곤이 전주의 한 사립중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학비는 무료였지만 ‘먹고, 자는’ 생활비가 문제였다. 한 부자친척 어른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머슴이나 보내지, 공부는 무슨…”하며 힐난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을 깨는 소리였다. 그 말이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어머니는 마루에 주저앉아 오랫동안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박철곤은 전주 외곽 허름한 집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겨울엔 냉골 방에서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면 한동안 등이 펴지지 않아 이렇게 영원히 굳어버리는 것 아닌가 두려움에 떨었다. 버스요금이 없어 학교는 기찻길을 따라 걸어 다녔다. 어머니가 쌀을 가져다주면, 얼른 싸전에 가서 양이 많은 보리쌀로 바꿔왔다. 맹물에 소금을 넣어 끓인 소금국도 먹고, 사흘을 굶어 어찔어찔한 머리로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중학1학년 때 키가 131cm(현 13세 평균 155∼160cm)밖에 안 됐다. 그래도 악착같이 새벽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했다. 그러나 그런 생활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2학년 2학기 기말시험을 보고 있는데, 서무과 직원이 시험지를 빼앗아갔다. 장학금을 받아도 따로 내야 하는 재건학생회비 33원(당시 짜장면 한 그릇 30원)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자격이 없다는 거였다. 황당함, 억울함 그리고 모멸감, 분노가 뒤엉켜 치를 떨었다. 그 다음 시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학교를 쫓겨나듯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고시 3관왕’으로 그 ‘춥고 배고픈 절망의 시절’을 뚫고 나왔다. 고입검정고시와 대학편입자격검정고시(방송통신대 2년 후 한양대 편입), 그리고 행정고시(25회)가 바로 그렇다.”
그는 누가 그의 보고서에 조금이라도 손을 대면 씩씩대며 속상해했다. 눈앞에 일이 보이는 데 안하면 못 견뎠다. ‘적당히’나 ‘구렁이 담 넘는 식’은 직무유기로 생각했다. ‘알면서도 안하는 사람은 월급도둑놈’으로 보였다. 그는 사무관 때부터 스스로 ‘총리의 눈으로 일한다’고 자부했다. 그 정도의 자존심과 명예를 걸고 일을 해야 성이 찼다.
그는 총리(서리 포함)를 스물다섯 분이나 모셨다. 모두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들 각각의 면모를 물어봤다. 그랬더니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아랫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거듭 ‘공직자로서 닮고 싶은 분’이 있었을 것 아니냐고 묻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냥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정말 예외 없이 ‘총리가 될 만한 특출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고건 총리는 두 번이나 모셨다. 말씀이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행정 감각이 뛰어났다. 타이밍이 정확하고, 뭐든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았다. 정갈하고 깔끔하다고나 할까. JP(김종필) 총리는 한마디로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분이었다. 고사성어, 시문, 인문학 등 깊이가 어디까지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옛날 한량이랄까, 멋쟁이랄까, 멋을 잘 아는 분이었다. 낮고 굵은 목소리로 하는 이야기를 기울여 듣다보면 한순간 ‘빵’ 폭소가 터졌다. 농담과 유머감각이 탁월했다. 아는 듯 모르는 듯, 조는 듯이 듣고 있지만, 나중에 보면 작은 수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강영훈 총리는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딱 맞는 분이었다. 겉으론 손자 대하듯 부드러웠지만, 공권력 확립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노태우 정부 2기 총리(1989∼90)로서 민주화 욕구가 분출하는 시기에 국가중심을 잘 잡았다. 오죽하면 ‘强(강)’총리, ‘公(공)’총리라고 불렸을까.”
그는 ‘총리실 해결사’로 통했다. 뭐든 맡으면 기어코 해냈다. 2003년 봄 사스(SARS) 퇴치가 좋은 예다. 중국에서 사스 사태가 발생하자마자 즉각 총리실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관계부처 모두가 달려들도록 했다. 그리고 인천공항에 달려가 ‘내 집을 팔아서라도 돈을 대줄테니 빨리 구입하라’며 열 감지카메라(10대)를 긴급 발주하도록 했다. 사스 의심 탑승객들부터 격리시키는 게 급선무였던 것이다. 결국 세계 32개국에서 8096명의 감염자가 발생(774명 사망)했지만 우리나라는 말끔했다.
박철곤은 이 세상에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믿는다. 전형적인 행정가다. 최근 철도파업이나 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 대응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은 눈치다. 하지만 “호미로 막을 일을…좀 아쉽다”는 말로 입을 다문다. 고건 전 총리도 회고록에서 ‘박철곤은 여러 부처나 이해당사자가 복잡하게 얽힌 일을 잘 풀어내는 사람’이라고 했을 정도다.
그는 그렇게 손잡아주고, 등 두드려주는 사람들에 힘입어 무사히 공무원생활을 마쳤다고 생각한다. 그는 2009년 1월 19일 국무차장 10개월 만에 느닷없이 옷을 벗었다. 후임은 당시 이명박 정부의 실세로 꼽혔던 박영준 씨.
박철곤은 틈만 나면 시를 읊는다. 분위기에 따라 온갖 시가 가슴에서 ‘들명 날명’한다. 유치환, 이영도, 한용운, 윤동주, 조지훈에서부터 고은, 나태주, 류시화까지 건들면 꽃봉오리처럼 터져 나온다.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그렇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박철곤은 지독한 일중독자다. 공무원 첫발부터 ‘일복이 터진 사나이’였다. 다른 동기들은 ‘지방수습 6개월, 중앙부처 수습 6개월’을 마치고 보직을 받았지만, 그는 수습 6개월 만에 총무처 소청심사위행정실에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한 일이 ‘과거 20년 동안의 소청심사 자료 정리’였다. 혼자서 그 방대한 통계와 결정문집을 분석 정리하겠다니. 누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982년 당시는 전산화 초기라 대부분을 손으로 ‘막고 품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일에 꼬박 1년 동안 매달렸다. 그의 퇴근길 품에는 늘 서류뭉치가 한 아름 들려 있었다. 한번은 엉덩방아를 찧는 바람에 그 서류뭉치를 바람에 몽땅 날려버리기도 했다. 그는 아픈 것도 잊고 허겁지겁 그 자료를 정신없이 주웠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같이 줍기 시작했다. 바로 마중 나왔던 그의 아내였다. 결국 그는 ‘소청심사제도 실효성에 관한 분석’과 20년 동안의 주요 결정문자료를 정리한 ‘소청결정 요지집’을 내놓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새내기 사무관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해냈느냐’가 화제였다.
“공직을 성직까지는 아니지만 하나의 명예로 생각했다. 이름을 날리겠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아하, 그 사람!’하며 기분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난 소위 ‘끗발 있는 자리, 돈 생기는 자리’는 일부러라도 피했다. 그저 일하는 게 재밌고 좋았다.”
그 후 실무과장, 국장들은 인사철만 되면 ‘박철곤을 달라’고 요청했다. ‘일 잘하는 사람을 서로 데려가려는 건’ 당연했다. 박철곤(행시 25회)은 빠르게 승진했다. 행정고시 동기들은 물론 선배들까지 제쳤다. 4급과 3급 승진 땐 17기(행시 8회)나 위인 선배를 연거푸 제쳤다. 2급 승진 땐 10기 선배(행시 15회)를 뛰어넘었다. 1급에 올라갔을 땐 그의 밑에 11기나 위인 선배(행시 14회)가 있기도 했다. 그가 차관(국무차장) 땐 그의 고시동기들은 초임 국장, 더러는 과장에 머물고 있었다. ‘승진기록 제조기’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는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한 계단씩 올랐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5급으로 출발해서 노태우 대통령 때 4급, 김영삼 대통령 때 3급, 김대중 대통령 때 2급, 노무현 대통령 때 1급,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때 차관을 지냈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묘한 인연’이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그리 빠르게 승진했을까.
“사람들은 내가 무슨 대단한 ‘빽’이라도 가지고 있는 줄 안다. 난 결코 그 누구에게도 승진을 부탁해본 적이 없다. 그런 건 본능적으로 싫다. 마찬가지로 내가 인사 청탁을 받으면 그 해당 직원에게 철저하게 불이익을 준다. 난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쓴 적이 없다. 인맥을 넓히기 위해 신경써본 적도 없다.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일 똑 부러지게 잘하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고, 나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나의 ‘가장 큰 빽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맡은 ‘(내) 일’을 ‘내 일’처럼 하다보면 ‘내일(Tomorrow)’이 열리더라.”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박철곤 약력
▲학력 ▽1952년 전북 진안 백운면 출생 ▽백운초∼고입검정고시∼부산진고(옛 개성종고·1969∼71) 졸업 ▽육군병장 만기제대 ▽방송통신대(2년제) 행정학과 졸업(1977∼79) ▽대학편입자격검정고시 합격 ▽한양대 법학대학 행정학과(1980∼81) 졸업 ▽한양대 행정학석사(1982∼84) ▽전주대 법학박사(1997∼2003) ▽미 조지타운대 연수(2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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