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고압가스와 하수처리 설비 등을 만드는 코스피 상장업체 엔케이의 주가가 갑자기 급등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3분기(7∼9월) 실적이 적자로 나오면서 계속 주가가 떨어지던 회사였다. 딱히 호재로 볼 만한 공시나 뉴스도 없었다.
단 한 가지, 이 회사의 박윤소 대표가 김무성 의원과 사돈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던 게 새 소식이라면 소식이었다. 김 의원이 지난해 말 철도파업 종료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차기 대선후보’로 입지를 굳혔다는 일각의 분석이 나오자 인터넷 주식카페 등을 중심으로 ‘김무성 테마주’가 떠올랐다. 엔케이가 이 흐름을 탄 것이다.
엔케이 측은 “사돈 관계는 맞다”면서도 “테마주로 분류된 줄은 전혀 몰랐고 그럴 이유도 없다”며 뜬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엔케이의 주가는 약 보름간 들썩인 뒤 다시 평소 수준인 3000원대 중반으로 떨어져 거래되고 있다.
선거철마다 극성을 부리는 ‘정치인 테마주’가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예측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나타나고, ‘잡으려는’ 투자자나 금융당국을 골탕 먹인 뒤 허망하게 사라진다는 점에서 테마주는 ‘두더지 게임’을 닮았다. “테마주라기보단 사돈의 팔촌주, 동창회장주”
사돈 관계라도 얽혀 있으면 그나마 양반이다. 정치인 테마주는 해당 정치인과 사실상 거의 관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2년 8월 중순 ‘우리들병원’의 관계사인 우리들생명과학과 우리들제약 두 종목의 주가가 갑자기 3배로 치솟았다. 대선을 앞두고 이 두 회사가 문재인 당시 대선후보의 테마주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이 종목이 문재인 테마주로 거론된 이유는 단순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우리들병원에서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은 것이 발단이 됐다. “우리들병원 원장이 노 전 대통령의 주치의였고 문 의원은 노 전 대통령 최측근이었으니 우리들생명이 문재인 테마주다, 이겁니다.” 2012년 6월경부터 정치 테마주에 대해 고강도 조사를 벌인 하은수 금융감독원 특별조사국 테마기획조사팀장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또 서희건설은 이봉관 회장이 문 의원의 모교인 경희대 총동문회장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바른손은 이 회사의 담당 법무법인이 문 의원이 몸담았던 곳이라는 이유로 문재인 테마주가 됐다.
박근혜 테마주로 분류됐던 넥스트칩은 김경수 대표이사가 ‘박사모’ 간부를 맡았다는 이유가, iMBC는 정수장학회가 MBC 지분의 30%를 보유했다는 이유가 다였다.
안철수 테마주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들썩거리고 있어 금감원과 한국거래소 시장감시본부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안랩(안철수연구소)뿐만 아니라 안 의원과 전국을 돌며 ‘청춘콘서트’를 펼쳤던 박경철 씨가 사외이사로 있었던 KT뮤직, 안 의원 모교인 서울대를 졸업한 박재범 사장이 있던 대성엘텍 등이 안철수 테마주로 꼽혔다.
과거에도 정치인 테마주는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정치인 테마주는 대체로 ‘정책’에 따라 움직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2007년 대선 때는 이명박 당시 후보의 4대강 사업 공약과 정동영 당시 후보의 대륙철도 공약 등에 따라 뜨고 지는 테마주들이 있었다. 2002년 대선 때도 테마주로 분류된 것은 ‘충청권 수도 이전’ 공약의 수혜가 예상되는 종목이었다.
하 팀장은 “당시의 테마주와 비교하면 2012년 말 대선 국면의 테마주는 ‘정치인 테마주’가 아니라 ‘사돈의 팔촌주’, ‘동창회장주’라고 불러야 한다”고 꼬집었다. 산업 테마주, 다르다 vs 다를 것 없다
테마주가 정치인의 전유물은 아니다. 주로 정부 정책이나 신기술과의 관련성에 의해 부각되는 산업 테마주도 존재한다. 지난해 하반기 남북관계가 경색 상태에 빠지자 방위산업 주가 주목받았고, 긴장이 완화될 조짐이 보이면 남북경협 주가 상승했다. 태양광 주, 전기차 주, 신재생에너지 주, 3D프린터 주도 번갈아가며 지난해 증시를 뜨겁게 달궜다. 중국발 초미세먼지가 심해지면 ‘미세먼지 주’라는 하루살이 테마주가 나타나기도 한다. 최근에는 빛에 디지털 정보를 실어 보내는 ‘라이파이(Li-fi)’ 기술이 개발되면서 라이파이 주가 들썩거리고 있다.
이 같은 산업 테마주들은 어느 정도의 근거를 가지고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정치 테마주와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직접 테마주를 기획하고 만들어 이 정보를 판매하는 증권정보 제공 업체까지 있기 때문이다.
인포스탁이란 증권정보 제공 업체는 219개 카테고리에 걸쳐 어림잡아 1000개 이상의 테마주를 ‘개발’했다. 이 테마주 목록은 한국증권전산(코스콤)이 운영하는 ‘체크 엑스퍼트’ 단말기와 일부 증권사 홈트레이딩시스템(HTS)에도 제공된다. 어느 정도 공인받은 정보란 뜻이다. 다만 지난해 초부터는 정치 테마주를 분류에서 제외하고 이름도 ‘섹터주’로 바꿔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증시 전문가들은 테마주는 테마주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연관성 면에서 다소 구체적일 뿐이지 기업의 실적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구현이 될지 알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1999년과 2000년에 한국을 들었다 놨던 정보기술(IT) 관련 주식들도 지금 와서 보면 희대의 테마주였다. 인터넷 시대라는 테마는 지금도 유효하지만 당시의 테마주들은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 증권사 팀장급 연구원은 “최근 이슈가 된 신재생에너지 주, 3D프린터 주 등은 개발만 됐지 언제 제대로 수익을 낼 수 있을지 불확실한 기술과 관련이 있거나 해당 회사의 실적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곁다리 사업 분야’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테마주는 사실상 매우 빈약한 기대감만으로 움직이는 ‘잡주(雜株)’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결과는 손실, “그래도 산다”
테마주의 실적은 초라하다. 금감원이 2012년 6월부터 대선 전날인 12월 18일까지 분석한 147개 테마주의 수익률은 평균 0.1%. 같은 기간 코스피 상승률은 8.6%였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가 테마주의 거래 패턴을 분석한 결과 테마주로 분류된 종목의 주가가 최고점을 찍은 날을 전후한 20일 동안에 거래건수의 75.2%가 몰려 있었다. 초단기 투자가 테마주 거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수익률은 극과 극을 달린다. 우리들제약과 우리들생명과학은 100일 남짓한 기간에 주가가 최대 3배로 뛰었다가 결국 10분의 1토막이 났다.
금융당국 분석 결과 테마주 거래에 뛰어들었다가 손실을 본 투자자의 99%가 개인투자자였다. 김 교수는 “개인투자자들은 대부분 주가가 최고점을 찍은 이후에도 매입을 계속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특히 최근에는 부동산이나 주식에 정상적으로 투자해서는 딱히 큰돈을 벌기 어려운 상태가 지속되자 위험한 걸 알면서도 테마주 투자에 뛰어드는 사람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게 금융당국의 시각이다. 이승범 한국거래소 기획감시팀장은 “자신이 투자한 다음에도 어느 정도 거품이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근거 없이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선한 테마주는 없다
증시의 작전 세력들은 이 같은 개인투자자들의 ‘막연한 기대감’을 노리고 테마주를 만든다. 일단 몇 주 또는 몇 달에 걸쳐 주가를 끌어올렸다가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그러면 인터넷 증권카페(약 3만6000개)를 중심으로 소문이 퍼진다. “그 주식은 모 정치인과 관련이 있다더라”, “아는 사람이 거액의 이익을 챙겼다더라” 같은 댓글이 삽시간에 달린다. 소문을 듣고 달려든 개미투자자들은 2차 거품을 만들어낸다.
빈약한 연결고리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도 자주 쓰는 수법이다. 2008년 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직후 인터넷 카페에는 이런 글이 나돌았다. “이번 협상은 명백히 우리나라가 많이 양보한 협상이기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이 뭔가를 얻어내려 할 것이다. 그 ‘뭔가’는 비자 면제 프로그램일 가능성이 크고 앞으로는 전자여권 관련주가 급부상할 것이다.”
결과는 비참했다. 당시 전자여권 관련주로 관심을 모았던 ‘프로제’(현 인테그레이티드에너지)는 2008년 초 5000원 안팎이던 주가가 연말 500원대로 떨어졌고 또 다른 관련주 ‘테스텍’은 이후 거래정지를 거듭하다 결국 상장 폐지됐다.
회사 오너나 최대주주 가운데 일부는 테마주 현상을 은근히 방치하기도 한다. 광풍이 휩쓸고 지나가도 그 전과 비교해 3∼4%가량 주가가 올라 있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일부 주주들은 테마주 열풍을 틈타 자신의 보유지분을 내다팔기도 한다. 이 때문에 내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최대주주나 오너가 주가가 급등했을 때 지분을 일정 한도 이상 매각하지 못하도록 내부자의 주식 매도 수량을 제한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테마주에 거품이 끼는 것을 사전에 막을 방법은 없을까. 금융당국은 “사후 대책 말고는 뚜렷한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누가 테마주를 만들어내는지도 특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전에 차단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승범 팀장은 “주가가 비정상적으로 급등해 투자자 경보(Investor Alert)를 발령하면 이 경보를 오히려 테마주를 사라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투자자도 있다”며 “테마주의 횡포를 막는 근본적인 해법은 한국의 주식투자 문화가 더 성숙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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