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한 두 손에 바나나를 쥔 이복 여동생은 먹는 방법을 몰랐다. 바나나를 태어나서 처음 봤다고 했다. 1972년 6월 동해에서 조업을 하다 납북된 남정렬 씨(81)의 아들 남장호 씨(49)가 들려준 일화다. 2001년 7월 중국 옌지(延吉)에서 아버지가 북한에서 결혼해 낳은 남춘선 씨(40)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남춘선 씨는 당시 160cm도 안 되는 키에 몸무게는 겨우 40kg 정도 되는 체형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도 저렇게 잘 먹지 못하고 계시겠구나….” 남장호 씨는 이날 밤새도록 이복 여동생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바나나 처음본다는 北이복동생
아버지가 납북된 뒤 생계가 막막해진 남 씨의 어머니와 4남매는 뿔뿔이 흩어졌다. 장호 씨는 초등학교 졸업 한 학기를 남기고 학교를 그만 두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일했던 식당마다 힘들어서 오래 버티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대만 화교가 운영하는 한식당에서 일하게 됐는데 제 사정을 듣더니 양자로 삼길 원하더군요. 가족들이 반대했지만 그때 심정은 양자로 갔으면 했어요. 그 정도로 먹고 사는 게 힘들었거든요.”
이후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온갖 허드렛일을 해가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북으로 붙들려간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소식에 못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1000만 원을 모아 중국으로 갔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없었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해서였다. 대신 이복 여동생이 나왔는데 한눈에 아버지를 느낄 수 있었다. 혈육의 힘이란…. 남파간첩 입에서 형의 이름이…
1978년 8월 홍도 해수욕장에서 납북된 홍건표 씨(53)의 동생 홍광표 씨(47)는 1995년 검거된 남파 북한 간첩의 기자회견을 잊지 못한다. 같이 지켜보던 어머니 김순례 씨(84)도 얼어붙었다.
“광표야. 지금 저 사람이 홍근표라고 했어?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예, 어머니. 저희가 집에서 부르던 둘째형 이름이잖아요.”
남파 간첩의 입을 통해 17년 전 실종된 형의 생사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1978년 당시 여름방학 때 동네 친구와 홍도에 놀러간다며 버스에 올라타던 형한테 “맛있는 거 사오라”며 배웅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36년이 지난 오늘도 형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개학일이 지났는데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서울 수유동에서 주방세정제 중소업체를 운영했던 아버지는 한달음에 가족들이 있는 충남 천안으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지역 신문에 광고도 내면서 충남 지역과 전라도 지역을 이 잡듯이 뒤졌어요. 아버지가 일을 못하게 되면서 가정형편도 급격히 어려워지고 둘째, 셋째누나는 고등학교와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어요. 아버지는 식사도 거르시고 담배만 피우시다가 폐결핵까지 얻었어요.”
1999년 교통사고를 당한 뒤 병세가 악화된 부친 홍사운 씨는 74세가 되던 2001년 끝내 아들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혹시나 돌아올까” 36년 이사 못가
김순례 씨는 아직도 홍건표 씨가 살았던 충남 천안시 입장면 도림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혹시라도 아들이 돌아왔는데 집을 못 찾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다. 그런데 요새는 정작 어머니 본인이 외출을 한 뒤 집을 찾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다. 치매가 온 것이다.
광표 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끼고 계시던 금반지를 주셨어요. 형 만나면 꼭 주라고…. 어머니 살아생전에 이 반지를 형한테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노력을 다하고 있느냐고 묻자 그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형과 생이별한 슬픔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너무나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입대해서 정신교육을 담당하는 정훈병과로 배정받았는데 인사 담당 소령이 형에 대해 질문을 하더라고요. 결국 정훈병과에서 일반 보병병과로 바뀌었습니다. 마치 저희 형이 간첩인 것처럼 대하더군요. 나라에서 언론을 통해 납북자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으니 이런 오해가 팽배해 있는 것 같아요. 형이 살아 있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도 가족들에게 속 시원히 설명조차 해주지 않는 정부가 원망스럽습니다.” “납북자-국군포로 회담 제의해야”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는 “박근혜 정부가 이산가족 납북자 국군포로의 전면적 생사확인을 위한 별도의 남북회담을 북한에 제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희 씨(54)는 46년이 지났는데도 납북된 아버지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부길호’ 어선의 기관장이었던 아버지 김경두 씨(81)는 1968년 6월 연평도 인근 앞바다에서 북한 경비정에 납치됐다. 며칠씩 조업을 나가면 하나밖에 없는 딸을 못 보는 게 아쉬워 이번이 마지막으로 배를 타는 거라고 말하곤 했던 아버지였다.
“한여름처럼 더운 날씨였어요. 할머니와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데 경찰관 2명이 집으로 찾아와 아버지가 납북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이후부터 하루하루가 악몽이었어요.”
경찰관들은 다음 날부터 여수에 살던 김 씨 집에 매일 같이 찾아와 김 씨와 어머니를 감시했다. 1957년 육군 수송부대에서 상사로 제대한 김경두 씨는 발전기를 다룰 줄 알고 불도저 운전 자격증도 있는 기술자였다. 당시 경찰관들은 “아버지가 기술이 많고 똑똑해서 데려갔을 것이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전문기술을 갖고 있는 아버지를 포섭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버지가 내려오면 꼭 신고하라는 말을 하곤 했어요. 그때부터 우리 가족뿐 아니라 사촌들까지도 모두 감시를 당했습니다. 친분이 있는 집에서 TV를 사줬는데 그 집을 찾아가 정말 우리 집에 TV를 사줬는지 확인까지 하더군요.”
당장 먹고 사는 것도 막막해졌다. 김 씨 어머니는 밤새워 한복 수선하는 일을 하며 겨우 생계를 꾸렸다. 북으로 끌려간 아버지와 생이별을 한 김 씨는 결국 어머니와도 떨어져 고아 아닌 고아의 삶을 살아야 했다. 중학교 때 부산으로 혼자 와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간첩 가족 낙인 찍히고 감시받아”
감시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어려운 형편에 대학 진학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취업을 하려고 했지만 정부의 감시를 받는 사람으로 낙인찍혀 취업 길도 막막했다. 사촌들도 마찬가지였다. “육촌 할아버지는 제사 때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해도 안 되고, 취업도 되지 않는다고 길게 한숨을 쉬시곤 했어요. 어떻게 이런 정부가 있을 수 있습니까.” 김 씨는 지금도 누가 자기를 감시하지 않는지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결혼도 포기하고 살던 김 씨는 30세라는 당시로선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부산에서 두 대학생 딸과 고등학생 아들을 두고 있다. 집 거실에는 아버지의 젊었을 적 사진이 걸려 있다. 김 씨는 2006년 이산가족 상봉 때 대상자로 선정됐지만 북측에서 아버지 김경두 씨에 대해 ‘확인불가’라는 답변을 해와 그리운 혈육을 만날 수 없었다. “백발 됐어도 바로 알아볼텐데…”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한눈에 알아볼 자신이 있다. “백발이 되셨어도 알 수 있어요. 어렸을 때 자려고 누우면 어머니가 항상 눈 감고 아버지 얼굴을 그려보라고….” 인터뷰 내내 침착한 태도를 보였던 김 씨는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 흐느껴 울던 김 씨는 어느새 오열하고 있었다.
“정희야, 아버지 얼굴 그려봐라.” “또? 싫어.” “어서 그려봐. 어떻게 생겼니?” “나처럼 눈이 크고 목이 길고요, 그리고….” 아버지를 뵙게 되면 김정희 씨는 이 한마디를 하고 싶다고 한다. “아버지…. 사무치게 보고 싶었습니다.”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자료에 따르면 2014년 현재 북에서 돌아오지 못한 채 억류된 납북자의 수는 517명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살아있는지도 모른다. 북한은 납북자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스스로 ‘공화국’의 품에 안긴 자진 월북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식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