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치소로 가면서 박영관 특수1부장에게 “내가 금감원 조사 무마명목으로 돈을 받았다면 그 후 김은성이나 진승현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했을 것 아닌가? 또 금감원 누구에게 부탁을 했는지 조사하면 밝혀질 것 아닌가? 그런 것도 조사하지 않고 나를 구속하느냐?”고 지적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를 밝혀내지 못했다.
당시 이틀 동안 나를 조사한 서울지검 특수1부의 홍만표 부부장검사는 “권고문님을 만나보기 전에는 머리에 뿔 달린 악마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좋은 분이시군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2002년 7월 25일 1심 공판에서 박영화 부장판사는 김은성 차장으로부터 금융감독원 조사무마 청탁과 함께 진승현의 돈 5000만 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나에게 징역 1년의 실형과 추징금 5000만 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보석신청도 기각했다.
기가 막혔다.
나를 조사했던 홍만표 검사는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기 전날 구치소로 찾아와 “집행유예로 나가실 줄 알았는데 참 유감입니다”하고 나를 위로했다. 교정당국 관계자들에 따르면 담당 부부장검사가 구치소에 찾아와 피의자를 만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동안 수많은 민주당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
측근인 이훈평, 박양수 의원은 면회실을 날마다 드나들다시피 했다. 첫 공판 전에 김원기 고문과 함께 면회 온 정대철 최고위원이 내 긴 머리를 보고 “형님! 머리 좀 깎으소”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왜 여기서 머리 깎는가? 무죄로 나가면 단골 이발사한테 깎지”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또 한화갑 대표가 와서 “형님, 곧 한 번 더 오겠습니다”라고 했지만 “내일 나가니까 앞으로 면회 올 필요 없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나에게 ‘징역 1년, 추징금 5000만 원’을 선고한 것이다. 한 달 뒤 건강이 악화되어 구속집행정지 명령으로 일시 석방되었을 때, 집사람은 “이제 더러운 꼴 그만 보시고 이민이나 가요”하고 조르기도 했다.
○오지 않았던 진승현
나는 다시 항소했다.
사건 심리에서 핵심은 진승현이 과연 우리 집에 왔었느냐, 안 왔었느냐 하는 문제였다.
내가 살던 평창동 S빌라는 입구에 초소가 있어 외부 방문객은 누구나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그날 진승현은 김은성 차장보다 먼저 우리 집에 도착해 집 앞 도로변에 차를 대놓고 있다가 김은성 차장의 차가 도착하자 뒤따라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이때의 광경을 증언한 이는 모두 세 사람이다. 첫째는 김은성을 우리 집으로 안내한 국정원 직원 문모 씨, 둘째는 김은성의 운전기사 박모 씨, 그리고 나를 태우고 골프장에 가려고 대기하고 있던 밴 운전기사 정모 씨다.
진승현은 자기 차도, 김은성 차장의 차도 초소 검문을 받지 않고 빌라 입구에서 우회전한 후 논스톱으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은성 차장의 운전기사 박 씨는 빌라 입구에 도착해 좌회전한 후 경비초소에서 1차 제지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큰길에서 들어오려면 박 씨의 증언이 맞다.
진승현은 또 김은성 차장의 차가 빌라 앞마당에 도착한 후 김은성 차장이 반쯤 돌아서서 자기에게 뒤따라오라고 손짓해 우리 집으로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은성 차장의 운전기사 박 씨에 따르면 김은성 차장은 경비초소 앞에서 제지를 받고 하차했으며, 국정원 직원 문 씨가 우리 집까지 안내했다고 했다. 문 씨의 증언도 같았다.
그런데 국정원 직원 문 씨나 김은성 차장의 운전기사 박 씨가 키 178cm에 몸무게 100kg의 거구인 진승현을 현장에서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더구나 진승현이 검찰 수사과정에서 작성해 증거로 제출한 우리 집 내부 약도가 실제 구조와 완전히 달랐다.
○무죄 선고
현장 검증을 마친 서울지법 형사항소8부(재판장 고의영 부장판사)는 2003년 7월 2일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권 고문에 대한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근거는 김은성과 진승현 씨 두 사람의 진술뿐인데, 사건 당시 권 고문은 김 씨와 좋은 관계가 아니었고, 진 씨는 알지도 못했던 사이인 만큼 청탁을 받을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더구나 진 씨가 자신이 돈을 건넸다는 권 고문 자택 내부구조에 대한 진술이 사실과 달라 신빙성이 없다”고 무죄 이유를 밝혔다.
나는 출옥 후 동교동을 찾아가 “무죄선고를 받은 뒤 만나 뵈려 했고, 그래서 이렇게 늦어졌습니다”라고 말한 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러자 김대중 전 대통령도 “고생했다. 자네를 믿었다”며 눈시울이 뜨거워진 얼굴로 말했다. 여기서 악운은 끝난 것인가 했다.
그러나 악운은 겹쳐온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 ‘동교동 금고’와 정치자금 ▼ “노갑이 형님 돈은 먼저 보는 놈이 임자”
‘노갑이 형님의 돈은 먼저 보는 놈이 임자.’
동교동계와 옛 민주당을 출입한 기자들치고 이 말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웃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 속엔 ‘권노갑의 정치자금 철학’이 담겨 있다.
권 고문의 첫 번째 회고록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1999)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나를 부르는 별칭의 하나에 ‘동교동 금고’라는 것이 있다. 굳이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실제로 나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이나 어려운 환경에서 김대중 총재를 위해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역할을 맡아온 것이 사실이다. 돈 문제는 부부간에도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미묘한 것이다. 확고한 신뢰가 있지 않으면 맡기지 않는 것이다.(중략) 돈을 만지면 이중적인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다. 첫째는 한 개인을 보좌하는 것도 여의치 않은데 자금까지 책임진다는 것이 때로는 버거운 일이라는 점이다. 특히 ‘혹시’ 하는 주변 사람들의 의혹의 눈초리가 나를 항상 괴롭게 만들었다. 둘째는 골고루 쓰는 일이다.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한다면 분배의 정의를 어떻게 실현하느냐 하는 테크닉상의 어려움이다.”
정치자금 분배는 확실히 ‘기술적 어려움’이 있는 일이다. ‘금고’에 돈이 있는 줄 알고 찾아와 어려움을 호소하는 동지들을 외면하지 못하다 보니 ‘노갑이 형님 돈은 먼저 보는 놈이 임자’라는 말까지 나온 것이다.
DJ는 권노갑에게 단 한 가지만 주문했다. ‘조건이 있는 돈은 받지 말라.’ 권력의 감시가 극심했던 야당 시절 그건, 철학 이전에 생존과 관련된 것이었다. 권노갑은 거기에 자신만의 원칙 하나를 더했다. ‘연락처를 적은 수첩이나 경리 장부 등 모든 걸 다 머릿속에 입력하고 다닌다.’ 수첩이나 장부가 빌미가 되어 고문을 당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중에 걸어 다니는 인명사전, 걸어 다니는 수첩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DJ는 심지어 자금의 출처를 묻지 않았고, 권노갑도 구체적인 내용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DJ가 아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완벽하게 신뢰했다. DJ가 대통령이 된 직후, 대선 때 미뤄졌던 선거자금 수사가 재개됐다. 국세청을 동원한 이회창 후보 측의 ‘차떼기 모금’을 조사하는 게 초점이었지만, DJ 측도 어떤 식으로든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중앙당 후원회장이었던 김봉호 의원과 재정위원장인 장재식 의원이 검찰 출두를 꺼렸다. 두 사람은 15대 대선 당시 선거자금 모금의 공식 창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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