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권모 과장(대공수사국 전 파트장·4급)이 자필로 쓴 A4 용지 10장 분량의 유서에는 검사의 반말 투의 발언 등 조사 태도와 수사 방식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권 과장은 유서에서 국정원 베테랑 대공수사요원으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진 것에 대한 괴로움과 억울함, 조직에 대한 걱정 등을 토로했다. 사건의 핵심 연루자인 권 과장의 자살 시도로 이달 7일 정식 수사 전환 이후 2주 동안 속도를 내며 달려왔던 검찰 수사 일정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 국정원 “권 과장 마음이 직원 전체의 마음”
권 과장은 유서에 검찰 수사에 대한 불만뿐 아니라 남재준 국정원장에 대한 사죄, 이 사건의 실체와 대공수사요원으로서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겠다는 내용을 남겼다. 권 과장은 간첩 혐의로 기소된 유우성(본명 류자강·34) 씨에 대해 앞서 자살을 시도한 조선족 협조자 김모 씨(61·구속)가 밝힌 대로 간첩임을 분명히 했다. 국정원 내부에서도 고민을 거듭하다 비밀에 속하는 전문을 공개해 혐의를 벗으라는 제안을 했지만 권 과장이 거절한 것도 유서에 드러났다. “(비밀을) 공개하면 내가 살겠지만 평생 일한 조직을 위해서는 맞지 않다”는 이유였다.
권 과장 소식이 알려지자 국정원 내부는 “권 과장 마음이 직원 전체의 마음과 같다”며 검찰 수사에 대한 불만으로 들끓고 있다. 유 씨에 대한 검찰의 공소유지를 도우려 위험을 무릅쓰고 어렵게 문서를 입수해 왔는데 검찰이 자신들의 책임은 회피한 채 모든 걸 국정원에 떠넘기려 한다는 것이다. 유 씨 사건의 공소 유지를 담당했던 검사들에 대해 내부 감찰이 아니라 수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수사팀은 당초 검사들이 위조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보고 내부 감찰을 하는 방안을 검토해 왔다.
○ 속도 내던 수사 ‘브레이크’ 불가피
국정원 협조자 김 씨에 이어 권 과장까지 조사 직후 자살을 시도하자 수사팀과 검찰 지휘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초 이번 사건에 대해 “한 점 의혹 없이 수사하라”고 지시한 김진태 검찰총장은 24일 동아일보에 보도된 권 과장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받고 이날 오전 대검 간부들을 강도 높게 질책한 것으로 전해졌다. 수사팀을 지휘하는 윤갑근 대검 강력부장은 이날 기자단과 만난 자리에서 미리 준비한 서면을 읽으며 “대공수사요원들의 헌신과 희생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며 이를 과소평가하거나 훼손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밝혔다.
검찰은 유 씨에 대한 결심 공판이 열리는 28일 전에 수사를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과잉 수사 논란이 불거지면서 일정에 차질을 빚게 됐다. 증거 조작 의혹의 실체를 밝혀야 하는 것과 동시에 국정원의 대공수사망을 붕괴시키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면서 진퇴양난에 빠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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