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산업단지 입주 기업의 폐수를 처리하는 시설 162곳 중 67곳은 입주 기업 협의체가 운영하고 있다. 폐수종말처리장의 관리책임자는 지방자치단체지만 실제 업무를 대부분 민간에 위탁하다 보니 감독을 받아야 할 입주 기업들이 운영권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전문적인 폐수 처리가 이뤄지기는커녕 지자체의 감독이 소홀한 틈을 타 민간업체가 수질을 조작하거나 방류수에 대한 수질검사를 빼먹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애초에 단순 업무나 특수기술이 필요한 사무를 민간에 넘기면 ‘작은 정부’를 유지하면서도 업무의 효율성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안전 및 보안 관련 업무 등을 민간에 과감히 넘기기만 했지 사후에 집행 실태를 철저히 관리하지 않아 부실의 싹을 키웠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민간회사에 맡긴 안전
8일 울산 남구 석유화학공단에서 수리 중이던 액화천연가스(LNG) 가열버너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해 근로자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지난해 11월에는 충남 당진시 현대제철 당진공장에서 보일러 가스 관을 점검하던 근로자 9명이 가스에 노출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렇게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가스 안전사고의 원인으로 민간 검사기관 중심으로 이뤄지는 가스안전관리 시스템이 지목되고 있다.
원칙적으로 국내의 가스안전검사는 한국가스안전공사가 전담한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1차 안전검사를 맡는 곳은 한국가스검사기술, 대한냉동산업협회 등 61개 민간회사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마련한 지정 기준에 따라 지자체가 민간회사를 검사대행업체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이들 61개 업체가 각 사업체를 대상으로 1차 안전검사를 실시하면 가스안전공사가 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검사가 이뤄지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민간회사가 안전검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검사 대상 사업체와 사이가 가까워져 철저한 검사가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안전행정부는 어린이 놀이터에 있는 놀이시설에 대한 안전검사를 한국종합유원시설협회에 맡기고 있다. 산업부는 TV 등 전기용품 안전인증 관리 업무를 한국제품안전협회에 위탁하고 있다.
재정정보 유출될까 ‘전전긍긍’
이런 민간위탁사업 때문에 대규모 정보 유출 같은 보안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기획재정부는 3000만 건 이상의 개인정보와 중요 재정정보를 담고 있는 국가전산망인 디지털예산회계 시스템을 민간업체인 삼성SDS에 맡기고 있다.
이 시스템에 구멍이 뚫리면 올해 초 불거진 금융회사의 개인정보 유출 못지않게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게다가 2015년부터 정부 소프트웨어사업에 대기업이 참여할 수 없도록 한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에 따라 다음 달로 예정된 새 사업자 선정 과정에는 중소·중견기업만 참여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검증되지 않은 중소·중견기업들이 사업자로 선정될 경우 심각한 보안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안전문가들은 당장 정보 유출 문제가 생기지 않더라도 민간업체 직원들이 국가재정 시스템의 기밀을 기억해 뒀다가 추후 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기재부 당국자는 “혹시라도 정보 유출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이 태산”이라며 “재정정보를 다루는 전문기관인 재정정보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국회 논의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민간이 관리하는 정보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예컨대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KAIT)는 이동통신사인 SK텔레콤 대표가 회장인 민간협회다. 통신사업자들에게 휴대전화 요금 미납자의 신용정보를 제공해 ‘불량고객’을 가려내도록 하는 등 통신사업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일을 주로 한다. 정부는 이런 KAIT에 2006년부터 정보통신기술(ICT) 관련 통계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기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공공정보인 산업통계 작성 업무를 민간협회에 맡김에 따라 통계의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KAIT 관계자는 “법에 근거해 설립된 단체로 공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통계청에서 ‘통계작성기관’으로 승인을 받아 작업하는 만큼 투명성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일부 민간협회는 정부가 맡긴 사업을 부적절하게 처리해 감사 때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한국정보통신공사협회(KICA)는 공사업자 시공능력 평가정보를 발주처에 주면서 법적 근거가 없는 수수료를 징수하거나 수수료를 임의로 면제해 줬다가 2010년 정부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안전업무 가려내 감독 강화해야
전문가들은 민간에 정부 사업을 위탁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위탁사업에 대한 정부의 관리감독이 허술하게 이뤄져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곽채기 동국대 교수(행정학)는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어떤 업무를 위탁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민간 지원 등 단순 위탁업무는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낫지만 안전이나 검사 등 사회적 파급력이 큰 업무는 정부 환원 등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퇴직 관료가 정부 사업을 대행하는 민간단체의 고위 임원으로 간 뒤 정부가 해당 단체를 사실상 방치하는 악순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정상적인 감독이 힘들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태윤 한양대 교수(행정학)는 ”민간 위탁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정부가 스스로 낙하산 관행을 근절해야 한다”며 “그래야 민간 위탁 사업에 대한 정부의 관리도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황태호 taeho@donga.com·김수연 / 세종=송충현 기자
▼ 美서도 정부업무 민간위탁 잇단 ‘구멍’ ▼ 기밀관리자 신원조회 대행 업체… 정신질환 있는데도 그냥 통과 5년간 제출 자료 40%가 엉터리
지난해 미국 연방정부를 곤경에 빠뜨린 대표적인 사건은 전 국가안보국(NSA) 직원인 에드워드 스노든이 NSA의 불법도청 사실을 폭로한 것과 오바마케어 웹사이트 오류로 건강보험 의무가입 시행이 차질을 빚은 일이었다. 전문가들은 이 두 가지 사건 모두 연방정부가 주요 기능을 민간 부문에 과도하게 위탁하면서 일어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미 법무부는 올 1월 정부의 신원조회 업무를 10여 년간 대행해 온 유에스조사서비스(USIS)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 업체가 66만여 명의 엉터리 조회 결과를 미 정부에 제출한 혐의다. 국방부와 국토안보부 등 국가기밀 취급기관들은 계약 근무자들을 선발할 때 사전 신원조회를 이 업체에 맡겨왔다. 하지만 2008∼2012년에 제출된 신원조회 결과 중 40%는 엉터리였다. 불법 도·감청을 폭로한 스노든과 지난해 9월 정신질환자로 환각 상태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해 12명의 목숨을 앗아간 방산업체 직원 에런 알렉시스도 엉터리 조회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1996년에 국가안보 관련 신분조회 사업을 민간에 위탁하기 시작한 이후 정부 위탁 신분조회 업체들은 급성장을 구가했다. 수주 물량의 90%를 정부에서 받아온 USIS는 공무원과의 유착 관계를 이용해 신원조회를 어설프게 처리해왔고 이런 관행을 미 연방정부의 인사관리를 담당하는 인사관리처(OPM)에까지 숨겨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임에 성공하면서 가장 야심차게 추진했던 미 국민의 건강보험 의무가입 확대를 골자로 한 오바마케어도 엉뚱하게 웹사이트의 접속 장애 문제로 차질을 빚었다. 지난해 10월 1일 오바마케어 가입 웹사이트가 오픈하자 300만 명이 넘는 미국 국민이 신청을 위해 접속했으나 첫날 등록을 완료한 사람은 6명에 불과했다. 웹사이트 문제는 한 달간 지속돼 오바마 대통령의 지지도는 물론이고 정부 정책의 신뢰성에 큰 흠집을 냈다. 미 의회는 청문회를 열어 보건부로부터 웹사이트 제작을 위탁받은 CGI그룹이 실력 없는 인력을 대거 고용한 영향이 큰 것으로 결론 내렸다. 워싱턴포스트는 CGI그룹이 2004년 정보기술(IT)업체인 AMS를 인수한 이후 지난 2년간 최소 25개 연방정부 관련 기관과 23억 달러 상당의 계약을 체결했지만 여러 곳에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오바마 행정부 1기에서 조달정책청장을 맡았던 대니얼 고든 조지워싱턴대 법대 교수는 워싱턴포스트에 “정부의 몸집을 줄이려는 정책이 주요한 업무까지 민간에 위탁하는 경향을 가속화했으며 현재 정부 업무의 최대 절반이 공무원 손을 떠나 있다”며 “(이런 움직임은) 결국 엉터리로 밝혀지고 있으며 중요 업무는 공무원들이 다시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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