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옥중생활을 같이했던 정대철 의원은 하루에 책을 3, 4권씩 독파하는 학구파였다. 속독술이 있어 그런지 그는 수감생활 중 1000여 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읽었다. 그 가운데서도 성경책을 자주 보는 것 같았는데, 실제 옥중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가 그토록 독서에 열중한 것은 회한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2003년 7월 윤창열의 굿모닝시티 비리사건이 터지면서 이듬해 1월에 구속 수감되었는데, 거기에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대선자금을 모금한 혐의가 덧붙어 복역을 하다가 2005년 5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는 당초 2002년 대선의 민주당 선대본부장을 맡았고,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1등공신의 역할을 했으나, 대선자금 문제와 관련해서는 나름대로 억울한 점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수감생활을 하면서 그 불만을 자주 토로했고, 그러한 불편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의 하나로 많은 책을 읽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명문가의 아들
그러나 그의 인간다운 모습은 그가 석방된 뒤에 확연히 나타났다. 보통은 석방된 뒤 자기가 수감생활을 할 때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은 다 잊어버린 채 교도소 쪽으로는 얼굴도 돌리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정대철 의원은 출옥 후에도 옥중에 함께 있던 정치인이나 선후배에게 편지나 엽서를 보냈다. 또 면회를 가서는 위로해주고 책을 넣어주는 등 뒷바라지를 계속했다.
이런 정치인은 내가 알기론 정대철 의원이 유일하다.
사실 내가 볼 때도 정대철 의원은 욕심이 없고 정직한 정치인이다. 그는 집안이 좋은데다 공부도 많이 했고 여러 면에서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1992년 김대중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앞으로 정대철 의원을 정치적으로 키워야겠다”는 공언까지 했다. 수도권 출신인 정대철 의원은 비호남이라는 점에서 당세 확장에 도움이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는 저명한 정치인이었던 정일형 박사와 한국 여성변호사 1호인 이태영 여사를 부모로 둔 명문가의 아들로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거쳐 미국 미주리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까지 받은 엘리트였다.
나는 당시 정대철 의원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정 의원이 앞으로 큰 뜻을 펼치려면 김대중 선생의 장점이 무엇인가를 연구해서 이를 본받고, 몸가짐을 조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호방한 성격의 정대철 의원은 술을 좋아했고, 잘 생긴 탓이었겠지만 소소한 스캔들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대권 후보의 가능성이 높은 그의 앞날을 생각해 나는 작은 흠집 때문에 발목이 잡히는 우려를 범하지 말라는 뜻에서 그런 충고를 한 것이다.
○정치발전연구회
당내에서도 정대철 의원의 앞날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14대 대선을 앞둔 1991년 조윤형, 이상수 의원 등과 함께 이른바 ‘정치발전연구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김대중 총재에게 반기를 들었고, 15대 대선을 앞둔 1996년 김상현 의원의 지원을 받아 새정치국민회의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
그의 논리는 김대중 총재 단독으로 출마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경선에 나가는 것이 흥행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대중 총재의 영향력에 손상을 줬다.
그가 자신을 키워주려고 마음먹었던 김대중 총재에게 2번이나 반기를 든 배경엔 다른 것도 있었겠지만, 그 중심에는 늘 “김대중 총재는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DJ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그의 교우관계가 경기고-서울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들의 성향은 대체로 친여적(親與的)이고 반DJ, 반호남 세력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들은 “네가 왜 DJ를 따라다니느냐? 차라리 네가 대선에 나가라”고 부추겼다. 정대철 의원의 주변에서는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총재를 전면에 내세운 정권교체는 어려운 것 아니냐. 뭔가 비상한 수단을 찾아봐야 한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 비상한 수단이란 결국 정대철 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내보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시 정대철 의원의 뒷심이 되어 주었던 정치인은 김상현 의원이었다.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김상현 의원은 당시 정대철 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만들고, 자신은 당권을 맡는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정대철 의원은 국민의 정부에서 한국프로야구협회 총재로 부임(1998년 5월)했다. 경성그룹 로비 사건으로 구속됐고, 그해 말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2000년 4월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그해 8월 민주당 최고위원에 오름으로써 다시 명예회복을 하게 되었다.
▼ 서울 목동 아파트에서 마주앉은 DJ와 정대철 ▼
“꼬마 민주당 끌어안지 않으면 정계 은퇴하겠습니다” 한참 침묵이 흐른뒤… “알았다 정의원 말대로 하겠다”
정치발전연구회(정발연)의 등장은 ‘동교동 정치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1991년 7월 출범한 정발연의 회장은 24일 타계한 노승환 전 국회부의장. 멤버는 ‘미스터 쓴소리’ 조순형 전 의원의 형인 조윤형(작고), 김종완(작고), 박실, 김덕규, 이상수, 그리고 정대철 의원이었다. 모두 서울에 지역구를 둔 정치인들로, 개혁성향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1990년 2월 노태우 민정당, 김영삼 통일민주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의 합당(민자당)으로 정국은 보수대연합 구도가 지배하고 있었다. 전체 의석 299석 중 민자당이 218석을 차지했다. 정발연 내에서 “DJ로는 14대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어렵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때만 해도 DJ는 1992년 대선을 ‘마지막 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DJ 지지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절박했다.
정발연 멤버들은 마포 당사를 출입하는 것조차 ‘위험’이 따랐다. 궁여지책으로 방송사 카메라 취재진에 부탁해 함께 묻어 들어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상수는 당원들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DJ가 정대철을 서울 목동의 아파트로 불렀다. 안가(安家)처럼 사용하던 손아래 동서의 집이었다.
거실 찬장에서 양주를 꺼내오더니 온 더 록스 잔(얼음이 채워진 잔)에 콸콸 부었다. 정대철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했다.
“다 먹어!” 정대철이 술잔을 입에 댔다가 다시 놓자 DJ는 그렇게 말했다. “사실 DJ가 부를 때만 해도 나는 정치생명을 건 담판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권교체를 할 수 없는 당이라면 그 당에서 국회의원 몇 번 더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차마 DJ에게 그만 포기하라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부친(고 정일형 박사)을 뵈러 올 때마다 대학생 정대철의 방에 들러 담배를 나눠 피우곤 하던 DJ였다. 정대철은 그때부터 DJ와 ‘맞담배’를 했다. 정대철에게 DJ는, 비판은 할 수 있어도 배신은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무렵, YS가 “니는 김대중하고는 안 된다. 나하고 같이 하자. 내가 니 국무총리 시킨다”라며 ‘국무총리+전국구 5인 공천권’을 제시했을 때도 DJ에게 등을 돌리지 않은 정대철이었다.
DJ에게 차마 2선 후퇴 얘기를 꺼내지 못한 정대철은 대신 ‘꼬마 민주당’과의 통합을 종용했다. YS의 3당 합당을 따르지 않고 따로 민주당을 건설한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이철 의원의 당은 그때 ‘꼬마 민주당’으로 불리고 있었다.
“꼬마 민주당을 끌어안아 야권통합을 이루지 못하면 제가 정계를 은퇴하겠습니다. 50 대 50이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DJ는 말이 없었다. 정대철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다음에야 DJ 입에서 “알았다. 정 의원 말대로 하겠다”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훗날 정대철이 ‘가문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민주당을 탈당해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에 몸을 담은 이유도, 아니 뿌리도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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