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심층 취재] 장성택-김경희 라인 vs 노동당 조직부 대결…김정은, 황병서 내세우며 권력장악 공식화
김정은 체제의 잦은 권력엘리트 교체는 과연 무엇 때문인가. 2012년 7월 이영호 인민군 총참모장 숙청, 2013년 12월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처형, 올해 4월 말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경질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2인자 교체는 이제 김정은 체제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김정일 사후 2년 반 동안 김일철→김영춘→김정각→김격식→장정남으로 계속해서 교체된 인민무력부장과 김명국→최부일→이영길→변인선으로 이어진 총참모부 작전국장 경질 등 군부 핵심직위도 숨 가쁘게 바뀌었다. 전문가들의 시각은 엇갈린다. 권력엘리트를 끊임없이 교체함으로써 이들의 긴장감과 충성심을 높이려는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세력과 세력이 외화벌이 사업권 같은 경제적 이권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인 결과라는 해석도 나온다. 잦은 엘리트 교체를 ‘권력 안정화의 수단’과 ‘권력 불안정의 징후’로 읽는 양측의 견해 차이는 접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팽팽하다.
김정은 체제 인사 변동 해부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제3의 관점은 1990년대 후반 이래 진행된 후계구도 싸움과 관련해 김정은 체제의 인사 변동을 해부하는 시각이다. 이 시기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이 후계자가 되느냐, 3남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느냐를 두고 권력엘리트들이 편을 나눠 벌인 권력다툼이 오늘날 모든 갈등의 뿌리에 해당한다는 시각이다. 이를테면 왕정국가에서 벌어지는 ‘왕자의 난’ 같은 프레임으로 평양의 권력 변동을 읽으면 한층 명확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얘기다. 흔히 네트워크 분석이라 부르는 기법은 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도구다. 김정일 집권 기간 그의 현지시찰에 동행한 인물의 면면과 횟수를 분석해 특정한 흐름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최근 미국 노스텍사스대 존 이시야마 교수가 미국에서 발행되는 영문 학술지에 발표한 ‘북한 권력승계 고찰(Assessing the leadership transition in North Korea)’이라는 제목의 논문. 1997년부터 2012년 사이 현지시찰 동행자 명단을 분석한 논문은 시기마다 북한 권부의 어느 집단에 무게중심이 실렸는지, 어떤 이들이 최고권력자와 가장 가까웠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그에 못지않게 의미심장한 또 다른 변수는 현지시찰 동행자 명단에 같이 등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다. 함께 수행한 횟수가 많은지 적은지를 놓고 이들 권력엘리트 사이의 친소관계도 유추할 수 있기 때문. 김 전 위원장을 같이 수행한 적이 많았다면 이들을 하나의 파벌로 묶을 수 있고, 각 파벌 주요 인물들의 동행 횟수가 시기별로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통해 세력 흐름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의 권력핵심에서 이뤄진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현미경인 셈이다. 이를 위해 ‘주간동아’는 1994년부터 2009년까지 총 1162회에 달하는 김 전 위원장의 현지시찰 동행자 명단을 전수조사했다.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 등을 통해 공개된 동행자는 연인원으로 따져 총 8900여 명. 이 가운데 누가 누구와 함께 가장 자주 김 전 위원장을 ‘모셨는지’ 수치화하고, 이를 통해 특정 파벌의 존재를 네트워크 분석기법을 통해 확인하는 작업이다. 이를테면 ‘평양 권력엘리트 인맥지도 만들기’다. 전체적으로 보면 김 전 위원장 집권 기간에는 군부 주요 인사가 가장 많이 시찰에 동행했다. 현철해, 김일철, 김영춘, 이명수, 박재경 등 이 시기 최고지휘관들이 함께 시찰을 수행한 경우도 많았지만, 당이나 내각의 민간관료들과 같이 등장하는 경우도 매우 높다. ‘선군정치’를 표방하며 어느 때보다도 군 지위가 높았던 데다, 현지시찰의 상당 부분이 주요 군부대 방문에 집중됐던 이 무렵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다. 눈여겨볼 것은 이들 군부인사를 제외하고 나면 매우 흥미로운 그림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인맥지도가 크게 2개 파벌로 뚜렷하게 나뉘는 것. 하나는 장성택 전 국방위 부위원장과 아내인 김경희 당 경공업부장 세력, 다른 하나는 2005년 이후 장 전 부위원장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노동당 조직지도부의 주요 인물들이다. 특정 시기에 한쪽이 김 전 위원장을 집중적으로 수행하면 다른 한쪽은 동행비율이 눈에 띄게 떨어지다, 1~2년이 지나면 정반대로 역전되는 일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들 가는 곳 이들 가지 않아
예컨대 김경희의 경우 남편 장성택과의 동행비율이 전체 등장 횟수의 절반에 가까운 12회에 이른다. 대표적인 장성택 라인으로 알려진 박명철 전 체육상이나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지재룡 현 주중북한대사 등도 군부인사와의 동행을 제외하면 장성택과의 동행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반면 이들이 이제강, 이용철 전 제1부부장 등 조직지도부의 핵심인물들과 함께 등장한 경우는 아예 없거나 1~2회에 불과하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이들이 가지 않는’ 패턴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4월 말 총정치국장에 임명되면서 순식간에 권력 2인자로 떠오른 황병서다. 2004년까지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던 그는 2005년 갑자기 수행 횟수 31회로 전체 4위를 기록했고, 이듬해에는 42회로 군부 최고지휘관들과 함께 공동 1위에 오른다. 2007년 수행 횟수가 6회로 떨어진 그는 이후 2013년 말까지 거의 모습을 찾기 어려워진다. 공교로운 것은 이처럼 황병서가 ‘잘나가던’ 시기에 장성택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전까지 매년 30회 안팎의 높은 동행 횟수를 기록하던 그는 ‘권력욕에 의한 분파행위’를 이유로 숙청된 2004년 들어 한 차례도 수행자 명단에 들지 못했고, 2006년 말에 이르러서야 6차례 동행한다. 반대로 황병서가 무대에서 사라진 2000년대 후반에 이르면 그의 동행서열은 다시 순위권 안으로 뛰어오른다. 이 때문에 황병서와 장성택이 함께 김 전 위원장을 수행한 것은 15년을 통틀어 단 두 차례뿐. 권력의 시소게임이 만들어낸 거의 완벽한 대칭구조다. 이렇게 나타나는 두 파벌의 득세와 몰락을 시간순으로 정리해 그간 알려진 사실과 조합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투쟁사(史)가 모습을 드러낸다. 2000년대 초까지 장성택-김경희 라인이 김정남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 그러나 2001년 김정남이 일본 나리타국제공항에서 체포돼 ‘국제적 망신’을 사면서 탄탄해 보였던 후계자 지위는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직후 미국으로 망명한 고영희의 여동생 고영숙은 김정남의 체포가 고영희의 작품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김정남을 제거했다는 얘기였다.
이듬해 들어 평양에서는 이른바 ‘고영희 우상화 작업’이 은밀하게 진행된다. 조선인민군출판사가 제작해 주요 부대에 배포한 ‘학습제강’에 ‘존경하는 어머님의 한없는 충성심’이 강조된 것. 고영희의 아들을 후계자로 옹립하려는 의도가 명확한 행동이었다. 김영춘 당시 인민군 총참모장, 정하철 당 선전담당 비서와 함께 이 작업에 참여한 것이 이제강 제1부부장이 이끌던 조직지도부 일부 세력이었고, 당시 조직지도부 과장이던 황병서는 이 작업에 참여했던 핵심멤버다. 그리고 2004년, 앞서 언급한 대로 장성택이 실각하고 이제강, 이용철의 조직지도부 라인은 김 전 위원장의 현지시찰을 독차지하면서 권력 정점에 오른다. 그러나 섣부른 후계 논의가 권력운용에 부담을 준다고 느낀 김 전 위원장이 관련 논의를 중단하라고 지시하고 때마침 고영희가 폐암으로 사망하면서 상황은 교착상태에 접어든다. 군부 주요 지휘관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이뤄진 ‘강요된 휴전’이었다. 장성택이 당 행정부장으로 중앙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한 2000년대 후반, 권력투쟁은 선을 넘는다. 원래 조직지도부 소관이던 인민보안부와 인민내무군 등 무력 사용이 가능한 조직의 관할권이 상당 부분 행정부로 이관되는 등 조직지도부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된 것. 이들 파벌의 수뇌였던 이용철 제1부부장이 2010년 4월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실질적인 리더였던 이제강도 두 달 뒤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장성택 세력의 보복으로 의심하기에 충분한 정황이었다.
젊은 권력자의 선택과 절대 욕망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이 시점이 바로 김정은 후계구도가 공식화되던 무렵이라는 점. 김 전 위원장이 후계체제 구축의 키를 맡긴 것은 애초부터 김정은을 지지한 이들이 아니라 김정남을 지지했던 장성택, 김경희 부부였다. 이러한 흐름은 2011년 김 위원장이 사망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군부 실세로 자리매김한 이영호 총참모장만 해도 1994~2009년 장성택과 함께 김 전 위원장을 수행한 횟수가 다른 이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많다. 이제강이나 이용철과는 단 한 차례도 동행한 적이 없었다. 후계 과정에서 급부상한 최룡해 역시 이제강과 동행한 적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김 전 위원장은 왜 후계구도의 중심축으로 이들을 선택했던 것일까. 한 국책연구기관 전문가는 “김 위원장은 이제강 세력이 ‘애초부터 김정은을 지지했던 공신’이라는 후광을 등에 업고 젊은 지도자를 무력화하는 상황을 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2000년대 초반 이후 후계구도를 두고 벌어진 싸움에서 김정은에게 줄을 서지 않았던 이들은 김정은 권력에 감히 도전할 수 없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는 시각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선사한 마지막 선물이 세력균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김정은 제1비서가 이후 벌인 일들은 알려진 바와 같다. 김 전 위원장이 지목했던 다음 권력의 핵심인사들은 줄줄이 교체되거나 처형당했고, 황병서 등 조직지도부 라인은 그 숙청작업을 주도하며 권력핵심에 오른다. 조연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과 이일환 당 근로단체 부장 등 김정일 시대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순식간에 급부상했고, 장성택을 뒷받침했던 당 행정부는 사실상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제강과 이용철의 죽음을 그 후배들이 3년 만에 되갚았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지난해 12월 장성택 처형과 4월 말 황병서 총정치국장 임명은 각각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 위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10여 년 전 김정남 후계를 밀었던 상대 파벌을 제거한 뒤, 최룡해라는 중간고리를 거쳐, 조직지도부 파벌의 권력장악 공식화로 이어지는 연속선이 그려지는 것. 흡사 1979년 12·12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가 최규하 대통령이라는 중간고리를 거쳐 이듬해 5·17비상계엄으로 쿠데타를 마무리한 것과도 유사해 보인다. 남은 것은 무위로 돌아간 김 전 위원장의 염려다. 일찍부터 김정은을 후계자로 점찍었던 이들이 핵심직위를 독차지한 현재 구도는 향후 김정은 권력에 어떻게 작용할까.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거슬러가며 자신의 사람들로 자신의 세상을 만들려는 젊은 절대 권력자의 욕망은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후계싸움은 이제야 명실공히 막을 내렸지만, 미래는 안갯속처럼 흐릿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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