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교동계의 (반대) 여론을 주지시키기 위해 서울 창천동 자택으로 김상현 씨를 찾아갔다.
“후농, 내가 이런 말 한다고 오해하지는 말게. 우리에게 기회는 많이 있고, 김대중 선생과의 관계도 변하지 않네. 그런데 이번 국립묘지 참배는 김대중 선생이 사면복권 된 후 첫 나들이인데, 후농이 앞장을 서면 국민들 보기에 모양이 안 좋아. 그러니 양보를 하소.”
그러자 김상현 씨는 매우 당혹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1961년도부터 동교동계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던 자기가 배제되는 날벼락을 맞으니 내가 언제 이런 신세가 되었는가 하는 표정이었다.
“누구 뜻이오?”
“내가 보는 관점일세.”
나도 그에게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김상현 씨는 다음 날 국립묘지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언론에는 비호남권 사람들이 김대중 선생을 둘러싸고 있는 사진이 실렸다. 사진 모양은 좋았으나, 이 사건 이후 김상현 씨는 우리 당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나는 그때 그에게 뼈아픈 말을 전달한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민주당 대표경선
김상현 씨는 우리가 평민당을 창당할 때 따라오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YS(김영삼)가 이끌던 통일민주당에 그대로 남아 부총재를 하면서 1987년도 대선에서는 YS 선거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13대 총선에서 김상현 씨는 통일민주당 후보로 서대문 갑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말았다.
반면에 평민당은 제2당이 되는 쾌거를 올렸다. 이렇게 되자 YS는 자신이 이끌던 통일민주당을 민정당, 공화당과 합당한 뒤 민자당을 발족시켰다.
YS 휘하에 있던 정치인들 가운데는 3당 합당이 야합이라면서 따라가지 않고 그대로 잔류한 정치인들이 있었다. 잔류파들로만 이뤄진 통일민주당을 당시엔 ‘꼬마민주당’이라 불렀다.
평민당은 거대 여당이 된 민자당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 ‘꼬마민주당’과 5:5 지분으로 합당해 민주당을 새로 창당했다. 이때 김상현 의원도 이기택, 홍사덕, 김정길, 노무현 의원 등과 함께 민주당에 합류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표는 1992년 실시된 대선에서 다시 낙선해 그해 12월 30일 정계 은퇴성명을 발표한 뒤 다음해 영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떠나기 전 이기택 의원에게 민주당을 맡긴다고 약속했다.
이에 반발한 사람이 김상현 의원이었다.
동교동계의 본류라 할 수 있는 그는 자신이 민주당을 이끄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기택 의원 대신 자기에게 당을 맡겨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김대중 대표는 달랐다. 민주당이 본래 이기택 의원의 ‘꼬마민주당’과 합당해 창립된 당인 만큼 이기택 의원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표는 만일 김상현 의원을 당 대표로 한다면 정치적 신의에 문제가 생긴다면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기택 후보를 밀어주라고 내게 당부한 뒤 영국으로 떠났다.
실정은 그랬지만 김상현 후보는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표가 영국으로 간 것은 불편한 입장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면서 “김심(金心)은 내게 있다”고 당원을 설득했다. 그대로 놔두면 이기택 후보가 낙선할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김대중 전 대표의 당부를 받은 지라 “김대중 전 대표는 이기택 후보를 민다”면서 김상현 후보의 주장이 허위라는 것을 유세하고 다녔다.
민주당 대표경선은 1993년 3월 11일에 실시됐다. 거기서 이기택 후보가 1위, 김상현 후보가 2위, 정대철 후보가 3위를 했다. 그러나 이기택 후보의 표가 과반수에 미달해 투표는 다시 하게 되었고 2차 투표에서 이기택 후보가 민주당 대표로 결정되었다.
○포용력 큰 大人
그런데 김상현 의원은 지금까지도 그때 일을 내색하지 않고 있다. 나와 관계도 친형제처럼 사이가 좋다. 우리의 신의와 애정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2005년도 민주당 전당대회가 치러지게 되었을 때 김상현 의원은 삼성제일병원에 입원 중인 나를 다시 찾아와 이번만은 자기가 당 대표가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안타까웠다.
김상현 의원은 지금껏 한번도 나를 섭섭하게 대한 적이 없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리고 깍듯하게 나를 ‘형님’으로 대하며 어떤 자리에서도 나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는 법이 없다.
그는 내가 만나본 정치인 가운데 가장 통이 크고 포용력이 큰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원만한 성격은 몸이 작은 그를 대인으로 만든다.
그런 그를 내가 세 번이나 가슴 아프게 만든 것이다. 속사정이야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것이 늘 가슴에 걸린다.
김상현 씨와 마찬가지로 내가 아픔을 준 정치인이 또 있다. 바로 양순직 의원이다.
▼ 權 얘기를 ‘동교동 출입금지’ 통보로 받아들인 김상현… ▼
“그것이 대중이 형님 뜻이오 아니면 노갑이 형님 뜻이오”
1987년 DJ(김대중)의 국립묘지 참배 문제로 후농(後農·김상현의 아호)을 찾아갔다는 권노갑의 ‘아픈 기억’에 대해서는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후농의 기억. “노갑이 형님이 찾아와 ‘앞으로 동교동 출입을 자제하라’고 하기에 내가 ‘그게 대중이 형님 뜻이오, 아니면 형님 뜻이오?’라고 물었다. 노갑이 형님은 아니라고 했지만 DJ의 뜻이 분명했다. 그래서 내가 설날 세배만 빼고 동교동엔 가지 않겠다고 했다.”
권노갑은 ‘소나기만 잠깐 피하자’고 했지만 후농은 국립묘지 참배 문제는 핑계일 뿐 DJ가 사실상 결별 통보를 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후농은 억장이 무너졌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때 주머니를 뒤져보니 20만 원이 있었다. 그 돈을 집사람에게 건네주며 ‘대중이 형님이 보내신 건데, 돈이 없으신 모양’이라 너스레를 떨었다. 불안해하던 집사람은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슬퍼도 웃어야 하는 희극배우처럼 후농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사실 후농과 DJ 사이의 골은 이미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결성 때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는 DJ가 미국에 망명 중이던 때라 동교동계에서 민추협을 주도한 건 후농이었다. DJ는 소극적이었다. 민추협은 이듬해 2·12 총선 참여를 결정하고 신당 창당을 서둘렀지만 DJ는 그것마저도 부정적이었다.
권노갑은 목포 공천까지 확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DJ는 장남 김홍일을 통해 출마하지 말라는 ‘지침’을 보낸다(이 때문에 권노갑의 국회 진출은 1988년 13대 총선으로 미뤄진다).
그러나 2·12 총선은 ‘신당 돌풍’을 불러왔다. 선거 나흘 전 미국에서 전격 귀국한 DJ가 일으킨 바람의 영향도 컸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보면 당시 DJ의 정세판단엔 오류가 많았다.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DJ를 대신해 민추협과 동교동계를 이끌고 있던 후농이 동교동계 몫인 신당의 사무총장으로 이택돈(2012년 작고)을 앉힌 것이다. 이택돈은 DJ가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1971년 8대 국회 때부터 야당 정치를 시작한 판사 출신이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도 함께 투옥된 동지였다. 그런데 법정에서 DJ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는 바람에 그는 동교동계 눈 밖에 나 있던 인물이었다.
귀국 직후 수안보 온천에 머물고 있던 DJ는 후농을 다그쳤다. “이택돈은 안 된다!”
후농의 회고. “이택돈 씨가 법정에서 어떤 진술을 했는지는 나도 옆에서 다 들었다. 하지만 나는 DJ가 그런 사람까지도 끌어안는 포용력 있는 지도자가 되길 바랐다. 아니 만들고 싶었다. 그게 내 꿈이었다.” 불행하게도 후농의 진정성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DJ는 그런 후농을 보며 ‘내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굳혔다.
후농이 다시 DJ 옆으로 돌아온 건 ‘꼬마민주당’과 합당 때였다. 권노갑은 후농에게 공천(14대 총선)을 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후농과 가까운 조승형 비서실장도 적극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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