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체류 고려인들이 7, 8월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평양을 거쳐 부산까지 갈 계획이라는 동아일보 보도와 관련해 통일부 당국자는
17일 “러시아 정부 등과 행사 지원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직접 지원 의사를 밝히면서 행사의
실현 가능성도 한층 높아졌다. 이 당국자는 “아직 북한의 (국경 통과) 동의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북한의 화답을 촉구했다. 》
러시아 체류 고려인들로 구성된 ‘랠리조직위원회’가 다음 달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를 관통하는 대장정 계획을 세운 것은 고려인의 아픔의 역사를 재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시베리아 횡단 루트는 150년 전 강제 이주를 당했던 고려인의 피눈물이 담겨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김주원 서울대 교수는 17일 “이번 고려인의 대장정은 강제 이주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는 동시에 구(舊)소련 각지에 흩어졌던 고려인이 한반도까지 보내졌던 루트를 답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채록한 고려인 장학봉 옹의 증언에는 고려인들의 신산(辛酸)했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장 옹은 1917년 연해주에서 태어나 20세가 되던 1937년 중앙아시아(우즈베키스탄)로 강제 이주됐다. 조선인이 일본의 간첩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스탈린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우려 때문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길이는 9300km. 서울과 부산을 20번 오갈 수 있는 거리다. 40여 일을 씻지도 못하고 화물칸에 부려졌던 가족들은 집 한 채 없는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졌다. 아이와 노인들은 죽어나갔지만 맨손으로 집을 짓고 돌밭을 일구는 것 외에 도리가 없었다.
2차 대전 막바지였던 1945년 7월 군사동원부에서 군인으로 징발하겠다는 통지가 왔을 때 장 옹은 “전쟁터에 보낸다는 소식이 기뻤다”고 말했다. 드디어 소련 공민으로 인정받았다는 생각에서다. 그동안 고려인은 성향을 의심받아 전선이 아닌 산업현장에만 배치됐다. 그는 고려인 428명과 함께 시베리아를 거쳐 극동 하바롭스크로 되돌아왔다. 강제 이주 8년 만이다. 그리고 중-러 접경인 훈춘을 거쳐 부모님 고향 땅인 신의주, 평양까지 들어갔다. 곧 전쟁은 끝났고 북한 정권이 세워진 뒤 소련군은 1948년 한반도를 떠났다. 남겨진 고려인은 인민군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장 옹은 인민군 인천여단 정치부장 자격으로 남한까지 내려왔고 인천상륙작전도 현장에서 지켜봤다. 하지만 대가는 가혹했다. 1956년 북한에서는 대대적인 소련파 숙청이 이뤄졌다. 전후복구에 자신감을 보인 김일성의 권력 공고화 작업 때문이었다. 장 옹은 모스크바에 ‘북조선에 온 지 13년이 넘었다. 지금 북조선은 소련에서 온 사람들을 철직, 투옥하고 심지어 총살한다. 늙은 부모님이 계신 중앙아로 보내달라’는 청원서를 썼다. 그리고 해가 바뀐 1958년 다시 우즈베크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김 교수는 “당초 고려말 연구를 위해 장 옹을 만났지만 증언을 통해 죄인이자 조국 통일을 꿈꾸던 동포로서의 고려인 모습을 보게 됐다”며 “그들의 삶 속에 우리 근대사의 한 측면이 그대로 녹아 있다”고 말했다. 장 옹은 그리던 조국통일을 보지 못한 채 2009년 눈을 감았다. 김 교수의 채록 내용은 ‘어느 고려인 소련 장교의 생애사’(가제)라는 제목으로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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