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
년 3월 이해찬 의원 후원회 행사에 참석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왼쪽)와 조순 서울시장(가운데). DJ는 이해찬과 정대철
의원(오른쪽)을 각각 선거대책본부장과 위원장으로 보내 조순 시장 선거를 돕게 했었다.권노갑은 조순 영입에서 당내 경선, 그리고
선거자금까지 ‘막후 코디네이터’를 맡았다. 동아일보DB
1992년 12월에 대선이 있었다. 그해 민주당은 선대위 대변인을 물색 중이었다. 재선급 이상에서 대변인을 맡아줘야 하는데, 대선을 위해서는 호남 출신의 대변인보다 경북 출신의 홍사덕 의원이 바람직했다.
홍 의원은 1991년 꼬마민주당이 평민당과 합당해 민주당이 될 때 우리 당으로 들어왔고, 이후 나와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내가 나서 부탁했더니 쾌히 수락해주었다.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실패했지만, 부드러운 성격에 세련된 어휘력을 구사하던 홍 대변인의 활약은 평가받을 만했다. 이러한 자질을 바탕으로 홍 의원은 1995년 서울시장에 출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후보 경선에서 조순, 조세형, 이철 후보와 맞붙어 3등을 하는 바람에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홍 의원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4선의원이 되었다. 우리와 정견이 달라서 탈당한 것이 아니고, 그의 지역구인 강남 아파트 지역에서 민주당 간판으로는 당선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홍 의원은 다음해 8월 5일 김영삼 정권의 마지막 개각 때 정무1장관이 되었다. 당시 그의 기용은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무소속 의원이 정무장관에 발탁된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김영삼 대통령과는 야당 시절에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92년 대선 때 ‘김대중맨’으로 관계를 다진 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의 여권행은 국민회의 측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 총재는 홍 의원의 입각에 대해 “야당과 대화가 필요할 때 쓰려는 것일 것”이라고 논평했다. 과연 홍사덕 정무장관은 취임 후 “공정한 대선관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그동안 정무장관이 참석하던 여당의 당직자 회의나 당무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당시 신한국당사에 있는 정무장관실도 폐쇄했다.
대선을 치른 김대중 당선자는 1998년 1월 30일 오후 삼청동 안가에 홍 장관을 불러 정부조직법 개편방향 등 정국현안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홍 장관은 정부조직개편 심의위원회에서 폐지키로 한 정무1장관실을 존치해 둘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고, 김대중 당선자는 “잘 알았다. 역대 정무장관이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았으나 당신에게는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통일부 장관에 내정
1999년 말 홍 의원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회의의 이종찬·노무현·김근태·이인제 의원, 한나라당 이회창 의원, 그리고 무소속 정몽준 의원과 함께 2002년 대선주자의 한 사람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홍 의원은 2000년 1월 장기표 씨와 함께 ‘무지개연합’이라는 신당을 창당하겠다며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삼환카뮤 빌딩 9층에 180평짜리 당사를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민심이 뒷받침되지 않았던지 당 창당을 중단하고 어느 날 불쑥 나를 찾아왔다.
당시 그는 김희완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대동하고 나를 만나러 왔다. 홍 의원은 자기가 김대중 대통령 밑에서 통일부 장관을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무소속인 그의 합류는 전국정당을 지향하고 있던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세력 확장에 도움이 되겠기에 나는 그 의사를 청와대에 전달했다. 1992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를 도와 선대위 대변인을 흔쾌히 맡아주었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던 까닭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4선의원에 정무장관을 지낸 홍 의원의 경력을 높이 사서 사실상 통일부 장관에 기용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그런데 2000년 2월 홍 의원은 한나라당에 전격 입당해 16대 총선 선대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를 통일부 장관에 임명하려던 청와대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김희완 정무부시장
홍 의원이 한나라당 선대위원장을 맡으면서 지역구인 강남을구를 반납하고 비례대표로 출마하는 것으로 결정되자, 그와 가까운 김희완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도 홍 의원을 따라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그는 당초 홍사덕 선대위원장의 비서실장으로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이회창 총재로부터 비례대표 14번을 약속받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작 한나라당 공천 발표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갈 곳이 없어진 김희완 씨가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그는 조순 교수가 서울시장으로 출마할 때 그 캠프의 기획단장으로 일하다가 나중에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하게 된 인물로, 인상도 좋고 재주도 있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같이 일하고 싶다는 그의 요구를 수용했다.
김희완 씨는 한동안 내 스피치 라이터로 일했다. 일할 사무실이 따로 필요하다고 하여 서울 구기동에 사무실을 얻어 주고 전화 받는 여직원도 구해주었다. 그 사무실에서 김희완 씨가 데리고 일하던 인물이 뒤에 참여정부의 실세로 등장하는 이광재 씨다.
나는 그들이 있던 구기동 사무실에 하루 한 번 정도 들러 당시 여러 군데서 내게 요청하는 강연이나 연설 또는 축사 같은 스피치의 내용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정세도 분석하곤 했다.
이렇게 나를 돕던 김희완 씨는 그 후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됨으로써 자신의 아까운 재능을 살리지 못하게 되었다. ▼ 대권의 꿈, 조순의 착각 ▼
‘포청천’ 이미지 DJ가 만들어줬는데…
서울시장이라는 자리가 대통령직(職)에 도전하는 주요 ‘스펙’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아마 1995년 민선 1기 조순 시장 때부터였을 것이다. 유권자 수만 해도 ‘작은 대선’이라 할 만했고, 조순이라는 사람의 명망도 작용했다.
‘서울은 조순, 경기는 이종찬’. 당시 민주당 평당원이었던 DJ는 지방선거 전략을 이렇게 짜고 스스로 ‘환상의 구도’라고 자평했다. 1992년 대선 때 대변인을 맡아 DJ를 헌신적으로 도운 사람이 홍사덕이었지만, 그런 ‘환상의 구도’엔 낄 자리가 없었다.
이종찬 경기지사 카드는 이기택 민주당 총재의 극력 반대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거는 야당의 압승이었다. YS의 민자당은 특히 서울에서 괴멸했다. ‘포청천 조순’은 엄청난 인기로 당선했고, 민주당은 구청장도 25개 중 23개를 휩쓸었다.
조순은 착각했다. 그의 아이콘이 됐던 포청천도, 야구모자도 모두 DJ가 만들어준 것이라는 사실을. 조순은 그걸 자기 옷, 자기 모자로 착각했다. 그리고 대권을 생각했다.
아태재단(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에서 DJ의 정계복귀 태스크포스(TF)를 맡고 있던 이종찬이 서울시장실로 조순을 찾아갔다. 이종찬은 조순의 경기고 후배.
“그러다간 이민우 총재처럼 될 수 있습니다.” 답답한 나머지 이종찬은 그런 말까지 하고 말았다. 1980년대 양김이 ‘대리인’으로 내세운 신민당 이민우 총재가 독자노선을 추구하다 버림받은 것처럼, 조순도 그런 신세가 될지 모른다는 경고였다. 정치판에서 ‘이민우’란 이름은 ‘자기 분수를 모르는 노욕(老慾)’과 동의어였다. 조순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격노했다.
조순은 반(反) DJ의 길을 갔다. DJ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4번째 출마를 공식화하자 조순은 ‘잔류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DJ, 이회창, 이인제 후보에 비해 지지도가 한참 떨어지는 한 자릿수에 머물자 결국 ‘이회창 대권, 조순 당권’을 조건으로 신한국당과 합당해 한나라당 총재가 된다.
대선은 DJP의 승리였다. 은인자중하던 이회창까지 다시 한나라당 당권 장악에 나섰다. 조순은 ‘뒷방 노인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권노갑은 조순의 전화를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건의할 게 있으니 자리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권노갑이 “경제 문제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DJ의 허락을 받은 권노갑은 극비전략을 짰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대당 총재를 지냈던 인물이니만큼 후폭풍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와대 경호팀엔 ‘권노갑의 승용차가 나타나면 확인 말고 그냥 통과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DJ와 조순, 권노갑은 그렇게 다시 마주 앉았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경제현안에 관한 건의는 부차적인 것 같았다. 직접 말은 안했지만, 국무총리 자리를 희망하는 것처럼 들렸다. DJ도 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DJ가 권노갑에게 눈짓을 했다. 모시고 나가라는 사인이었다. 권노갑은 서둘러 조순을 데리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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