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順命 권노갑 회고록]〈27·끝〉에필로그-연재를 마치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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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가 盧지원” “아니다”… 마침표 찍지 못한 진실 기록

○권노갑과 박지원의 엇갈린 증언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 레이스가 시작되기 직전인 2002년 초, ‘왕특보’로 불리던 박지원 대통령 정책특보와 박권상 KBS 사장, 김근 연합뉴스 사장이 서울 플라자호텔 한식당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화제는 역시 곧 시작될 민주당 경선 판도였다. 그런데 김근이 “노무현이 후보가 돼야 한다”며 그 이유를 역설했다. 박권상은 보수적인 편이라 반대했지만, 박지원은 김근의 얘기를 주의 깊게 경청했다.

박지원은 회동 직후 김대중(DJ)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김근의 논리’를 전했다.

DJ=“(말없이 듣고 난 다음) 일리가 있네.”

박지원=“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는 노무현이 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DJ=“내가 민주당을 탈당하고 중립을 선언한 마당인데…. (밖에서는) 그런 얘기를 일절 하지 말게.”

그러나 박지원은 거기서 단념하지 않았다. DJ와 김근이 따로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김근에게 꼭 ‘그 얘기’를 하라는 주문을 잊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뒤 박지원은 김근을 따로 만났다.

박지원=“대통령한테 얘기 했습니까? 뭐라고 하시던가요?”

김근=“아니 대통령이 따로 묻질 않아서 그 말은 못했습니다.”

박지원은 집요했다. 이번엔 DJ에게 물었다.

박지원=“대통령님, 김 사장에게 왜 그 얘기는 안 물어보셨습니까?”

DJ=“(박지원을 빤히 쳐다보며) 박 실장이 전해줘서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잖아?”

박지원은 박광태 광주시장에게 연락했다. 박광태는 14대 국회에 함께 입성한 목포 문태고 후배였다. “김심(金心·김대중 대통령의 의중)은 노무현이다.”

그런데 ‘順命-권노갑 회고록’ 제26회 ‘이인제와 노무현’ 편에서 권노갑은 “노무현 후보의 광주 돌풍에 대해 당 안팎에서 김대중 대통령이나 동교동계가 지원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회고했다.

기자가 “박지원 의원은 ‘김심(金心)’이 노무현에게 있었다고 공개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도 권 고문은 “아녀, 그건 사실이 아녀!”라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DJ 사후(死後) 출간된 ‘김대중 자서전’에도 권노갑과 박지원의 엇갈린 증언을 바로잡아 줄 만한 기록은 없다. 물론 ‘김심(金心)’이 노무현에게 있었다는 박지원의 증언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말이 곧 ‘DJ의 노무현 지원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권노갑의 눈엔, 김대중 대통령의 속마음이 설사 노무현에게 있었다고 해도 박지원에게 ‘물밑 지원’을 지시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설사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건 ‘박지원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권노갑의 기억력

회고록 연재를 시작한 올해 1월 3일 이후 김창혁 전문기자(오른쪽)와 조수진 정치부 차장(왼쪽)은 매주 월요일 오전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권노갑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가운데)을 만났다. 1980년 권 고문 대신 광주에 잠입해 비극을 전해준 양영두 흥사단민족통일운동본부 대표도 단골 배석자였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회고록 연재를 시작한 올해 1월 3일 이후 김창혁 전문기자(오른쪽)와 조수진 정치부 차장(왼쪽)은 매주 월요일 오전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권노갑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가운데)을 만났다. 1980년 권 고문 대신 광주에 잠입해 비극을 전해준 양영두 흥사단민족통일운동본부 대표도 단골 배석자였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회고록은 이처럼, 일면(一面)의 진실일 수밖에 없다. ‘DJ의 노무현 지원설’도 권노갑 회고록은 물론이고 박지원 회고록, 또 다른 누구의 회고록이 모두 모아져야 대략의 윤곽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그것마저도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1차 사료에 불과하지만….

올해 1월 3일자 신문부터 연재를 시작한 ‘順命-권노갑 회고록’이 끝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DJ 말년에 펴낸 ‘동행’도 있고, DJ 서거 후 발간된 ‘김대중 자서전’도 있지만 권노갑의 눈으로 바라본 김대중과 그의 ‘순명(順命)’ 또한 우리 정치사의 주요한 기록이다.

권노갑은 1930년생이다. 우리 나이로 치면 올해 85세지만, 아직도 정정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기억력은 한마디로 놀라웠다. ‘걸어 다니는 인명사전’이라는 별명 그대로였다.

‘포스트 DJ’를 꿈꾸던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를 신라호텔에서 만나 “(동교동계가) 대권후보로 나서는 것은 안 된다. 대신 당 대표를 해라. 대통령님의 허락까지 받았다”며 주저앉힌 일도 그렇다.(5월 10일자 권노갑 회고록)

한화갑은 “노갑이 형님 말, 그거 다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그러자 권노갑은 “화갑이 그 사람이 늘 그렇게 기억력이 좋지 않아 내가 중요한 얘기를 할 때는 꼭 김옥두 의원을 ‘증인’으로 참석시키곤 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참∼”이라며 혀를 찼다.

홍사덕 전 의원(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 상임의장)의 ‘통일부 장관 내정’ 얘기도 그랬다.(7월 5일자 권노갑 회고록)

‘홍사덕이 찾아와 통일부 장관을 희망하기에 김대중 대통령의 ‘내락’까지 받았는데 한 달 뒤 돌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으로 가더라’는 내용이었다.

회고록이 나간 뒤 2000년 당시 홍사덕의 측근이었던 김희완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기자를 찾아왔다.

“권 고문의 회고록을 보면 선후가 바뀌었다. 통일부 장관 얘기는 홍사덕 의원이 한나라당 선대위원장으로 가고 난 다음이다. 사실 홍 의원과 함께 이회창에게 갔는데 거긴 정말 이상한 곳이더라. 이회창은 불통 그 자체였다. 전국구 의원 순번 14번을 내게 주겠다던 처음 약속도 달라지고…. 그래서 중동고 선배인 한광옥 비서실장을 만났다. 한 실장에게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다가 순간적으로 ‘홍사덕 통일부 장관’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그러니까 한광옥 선배가 ‘그럼 권노갑 고문을 연결시켜 줄 테니 그 쪽을 통해서 얘기해봐라’라고 하더라. 그래서 홍 의원과 나, 그리고 권 고문이 신라호텔에서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통일부 장관 얘기가 잠깐 나왔지만 홍 의원은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홍 의원은 오히려 내 문제 때문에 노심초사했다. 그걸로 끝난 얘기였다.”

김희완의 ‘기억’을 전해주자 권노갑은 “이미 남의 당 선대위원장으로 간 사람을 통일부 장관으로 내정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젊은 사람들이 기억력이 그래서야 원…”하면서 당시 상황을 다시 상세하게 설명했다.

○권서여무(權逝如霧), 권력은 안개와 같다


권노갑은 회고록 서문(序文)에 이런 심회(心懷)를 밝혔다.
『 한번은 ‘월간조선’ 기자가 나를 취재하러 오면서 택시 기사에게 물어봤다고 합니다.

“혹시, 권노갑이란 이름을 들을 때 떠오르는 게 뭡니까?”

그랬더니 그 기사는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뭔가를 뒤에 감추고, 음흉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말도 있지만, 그런 탓인지 내 인생엔 굴곡도 많아서 수감생활을 다섯 번씩이나 해야 했습니다. 민주화 투쟁시대의 감옥생활은 국민과 역사 앞에 떳떳한 것이었지만, 민주화 이후의 수감생활은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택시 기사의 말도 아마 거기서 비롯된 이미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의 희생양이 된 나 자신은 억울했습니다.
천산조비절(千山鳥飛絶)

만경인종멸(萬徑人踪滅)

고주사립옹(孤舟蓑笠翁)

독조한강설(獨釣寒江雪)

산마다 날아오던 새가 끊기고

길마다 발자국도 없어졌는데

외론 배 도롱이에 삿갓 쓴 노인

눈 내린 겨울 강에서 홀로 낚시 드리우네

당나라의 유종원(柳宗元)이 쓴 이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차가운 감방 마룻바닥에 손가락으로 써보면서 끝도 모르는 회한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님이 직접 방문해 눈물로 영세를 주신 후 나는 용기를 되찾았고 다시 새로워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돌이켜보니 내 일생은 총체적으로 행복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본래 안동 권씨입니다. 영남 부모를 두었으나 호남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김대중 선생을 모시고 기나긴 민주화투쟁을 해오면서 평생을 시달렸던 것은 이 땅의 고질적인 지역감정이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마침내 김대중 선생을 대통령에 당선시켰던 일이 내 일생에 가장 보람된 일로 남습니다.

현대비자금 사건으로 수감됐다 풀려난 후 어떤 기자가 내게 물었습니다.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신 적이 있나요?”

“네, 느끼지요.”

나는 ‘권서여무(權逝如霧)’란 네 글자를 써 보였습니다. 권력이란 안개처럼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따지고 보면 내게 있어서 권세는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평생을 모신 김대중 선생을 대통령에 당선시켜야 한다는 목표는 이 땅의 민주화와 맞물린 것이었기에 내 인생의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내 평생의 꿈은 이루어졌고, 가정적으로도 다복하니 나는 결국 행복한 일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고록이 연재되는 동안 오랫동안 소원했던 정동영과 한화갑이 권노갑을 찾아왔다. 박지원은 생일 때 꽃을 보냈다고 한다.

권노갑의 순명(順命)에 대한 경의의 표시가 아니었을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조수진 기자
#권노갑#노무현#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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