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 면세점 화장품 매장에 근무하는 20대 여성 판매사원 A 씨는 립스틱을 사러 온 남성 고객에게서 황당한 일을 경험했다. 연인에게 선물할 립스틱을 추천해 달라고 했던 남성 고객은 A 씨에게 “입 맞출 때 결국 립스틱을 내가 다 먹는다”며 짓궂은 농담을 건넨 것. A 씨는 애써 웃어넘기며 손등에 립스틱을 발라 색상을 설명했지만 이 고객은 A 씨의 손을 꼭 잡은 채 매장을 떠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비슷한 경험이 몇 차례 반복되자 A 씨는 남성 고객만 오면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쿵쿵거리고 호흡이 곤란해지는 불안증세를 겪기 시작했다. 함께 근무하는 팀장에게 불편함을 호소했지만 “우리도 다 똑같다”며 참으라는 말만 돌아왔다. 불쾌함을 참아가며 언제나 미소만 지어야 하는 근무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진 A 씨는 이직을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A 씨처럼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을 ‘감정노동자(emotional labor)’라고 부른다. 안전보건공단은 감정노동자가 국내 임금근로자 약 1770만 명 중 560만∼740만 명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표적인 감정노동자로 꼽히는 항공기 승무원, 매장 판매원, 콜센터 근로자를 비롯해 넓게는 사회복지 관련 직종이나 간호사 등 의료직 근로자도 감정노동자에 포함될 수 있다.
전체 근로자 10명 중 3명이 감정노동자로 분류될 수 있지만 현행 근로기준법 등 관련 법률에서는 감정노동자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감정노동 과정에서 생긴 질병은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새누리당이 법률적 사각지대에 놓인 감정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감정노동자법’을 7일 마련했다. 새누리당 윤재옥 의원(초선·대구 달서을)이 이날 대표 발의한 근로기준법 등 3개 법률 개정안은 법적으로 감정노동자를 명확하게 규정해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매장판매원-간호사 등 감정노동자 스트레스 줄일 환경 업주가 조성해야 ▼
지난해 4월 한 대기업 임원이 “라면을 짜게 끓였다”는 이유로 항공기 여성 승무원을 폭행한 사건 이후 감정노동자 문제는 사회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후 국회에서 감정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법률은 발의됐지만, 근본적으로 감정노동자를 규정할 수 있는 법률이 없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았다.
현재 근로기준법에는 ‘근로’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으로만 정의하고 있다. 윤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정신노동에 ‘업무수행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자신이 실제 느끼는 감정과는 다른 특정 감정을 표현하도록 업무상 요구되는 노동인 감정노동을 포함한다’는 문구를 새로 넣었다. 감정노동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 밖에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 ‘업무상 재해의 인정 기준’을 규정하는 37조에 ‘감정노동’ 항목을 새로 만들어 감정노동으로 인한 질병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법률적 토대를 마련했다.
또 산업안전보건법에는 ‘감정노동으로 인한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안전성 평가 및 개선’ 항목을 신설해 감정노동자를 보호해야 하는 정부의 책임을 강화했다. 사업주에게도 감정노동으로 발생할 수 있는 건강 장애를 예방하도록 규정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사업주는 감정노동자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작업환경을 조성하고 근로조건을 개선해야 한다. 앞서 A 씨가 스트레스에 시달려 질병을 얻게 됐다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아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윤 의원은 “소비자의 권리만 강조하면서 감정노동자의 권익에는 무관심했던 법률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며 “일회성 관심으로 그치지 않고 제도적으로 감정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감정노동자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악성 소비자(블랙컨슈머)를 제재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서울시 다산콜센터는 전화로 폭언과 성희롱을 일삼은 악성 민원인을 고소해 벌금 400만 원이 선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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