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병장이 총기를 난사한 후 탈영해 도주 중이던 6월 말 영관·위관급 장교들과 함께 숙식하며 대화할 일이 있었다. “문제 병사가 행한 개인적인 일”이라는 게 장교들의 대체적 견해였다. 김관진 당시 국방부 장관(현 대통령국가안보실장)도 6월 25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본질은 ‘개인의 문제’라고 규정하는 모양을 취했다.
8월 1일 군인권센터(민간단체)가 28사단 윤 일병 사망 사건 전모를 공개했다. 여론이 들끓었다. “욱하면 임 병장, 참으면 윤 일병”이란 한탄이 나돌았다. ‘소변기 핥기’ ‘치약 먹이기’ ‘계급 열외’ ‘왕따 놀이’ 같은 병사들 간의 ‘잡군기’와 끼리끼리 문화도 드러났다. 이쯤 되면 ‘악마 같은’ 일부 장병에 의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거나 ‘구조’가 개인의 일탈을 부추기거나 막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한다.
총기 사고 대부분이 GOP, GP 같은 격오지(隔奧地)에서 일어난다. GOP부대는 남방한계선 철책을 지킨다. GP는 군사분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의 비무장지대에 있다. 윤 일병이 군홧발 아래 스러진 28사단 포병연대 의무대도 본부대와 물리적으로 떨어진 ‘고립 지역’이다.
참혹한 병영 사고가 잇따르면서 여론이 들끓던 8월 4일, 5일 육군 12사단 ○○연대 GOP대대 ◇◇소초에서 숙식했다. 소초는 최전방을 지키는 장병이 소대 규모로 생활하는 곳이다.
날 세운 병사들
12사단 GOP대대 ◇◇소초가 경계하는 지역도 서남방에서 동북방으로 군사분계선이 휘어 올라간다. 서쪽에도, 북쪽에도 북한군 초소가 있어 군사적 긴박감이 높다. 산악이 험준해 고립감 또한 다른 사단 GOP 지역보다 심하다. ◇◇소초는 고성군의 해발 900m 넘는 곳에 위치해 있다. 경계 초소의 위치는 해발 1000m가 넘는다. 12사단 동쪽 맨 끝 GOP소초는 임 병장 사건이 발생한 22사단 서쪽 맨 끝 GOP소초와 이웃해 있다
8월 4일 오후 2시 ◇◇소초 병사들이 ‘즉각 조치 사격’ 훈련을 한다. 사격 훈련하는 이들은 지난밤 ○○○조 근무를 마친 병사들이다. 남쪽 지뢰지역을 향해 실탄을 쏘는 병사들의 표정에는 날이 서 있다. 순찰 및 경계 근무는 전반야(前半夜)조, 후반야(後半夜)조, 주간(晝間·낮)조로 나뉘어 이뤄진다. 교대 시각은 비밀인 터라 기사에 공개하지 않는다.
사격 훈련이 한창이던 시각, 소초 생활관에서는 병사들이 TV를 보고 있다. 도시의 케이블TV와 똑같다. 공중파, 종합편성, 영화, 스포츠를 골라 본다. TV를 시청하는 분대는 후반야조에 근무했다. 생활관의 병사들은 체육복(반팔 T셔츠와 반바지) 차림이다. TV를 보는 대신 편지를 읽던 김홍식(20) 일병은 “휴식 여건이 잘 보장돼 경계작전에 집중하면서도 불편함 없이 근무한다. 임 병장 사건은,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 12사단 GOP대대 작전과장(소령)은 “근무를 마친 인원은 휴식을 보장한다. 야간에 임무를 수행한 용사들이 온전하게 쉬게끔 하고자 훈련, 교육을 제외한 때는 낮 시간에도 전투복을 입지 않는다”고 말했다.
7월 8일 육군은 GOP대대의 경우 다른 훈련을 없애고 즉각 조치 사격과 상황 조치 훈련만 실시하기로 했다. 또한 GOP 병사들이 경계 작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시설물 보수, 도로 정비 등의 작업은 사단급 이상 부대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소초 박대민 병장은 “근무 간 휴식 여건이 보장돼 경계 작전에만 집중한다”고 말했다.
소초 병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경계 근무의 지루함이다. 1997년 이후 비무장지대에서 남북 간 교전이 발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1992년 3사단 수색대가 남쪽으로 침투한 북한군을 사살한 데 이어 1997년 3사단 관할 지역에서 교전이 발생한 것이 마지막이다.
8월 4일 오후 ○○시, 전반야조·후반야조 근무자의 군장 검사가 이뤄진다. ◇◇소초장 백진선(23) 소위의 눈이 살아 있다. 군장 검사를 하면서 한 병사에게 귀순자 발견 시 대처 요령을 묻는다. 지목 받은 병사가 우렁찬 목소리로 답한다. GOP 경계근무의 군장은 소총, 실탄 ○○발, 수류탄, 대검, 야시(夜視)장비로 이뤄져 있다. ◇◇소초가 초임지인데도 백 소위의 리더십은 뛰어나 보였다. 소초장의 얼굴은 병사들과 구분되지 않을 만큼 앳되다. 군장검사를 받는 병사들의 모습은 결의에 차 있었다.
초급 장교의 질 저하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현재 전체 소대장(중·소위) 가운데 학군장교(ROTC) 등 단기 복무장교 비율이 89%에 달한다. 중대장(대위)의 단기복무 장교 비율도 35.6%에 달한다. 단기 장교는 사명감, 책임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초급 장교는 최일선에서 병사를 관리한다. 갓 부임한 부사관은 병사와 나이가 비슷한 데다, 학력 수준도 병사들보다 낮은 경우가 많다.
임 병장 총기난사 사건 때 전역을 3개월 앞둔 22사단 강모(27) 중위(소초장)는 무기고 열쇠를 상황병에게 맡기고 다른 소초로 사라졌다. 선임분대장 임모 하사는 열쇠를 찾지 못하자 무기고 자물통에 소총을 들이대고 10발가량 쐈다. 28사단 윤 일병 사건 때 유모(23) 하사는 이모(25) 병장을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폭행을 묵인했다. 임 병장 사건 때도 부소초장 이모(24) 중사가 임 병장을 놀리고 별명을 부르는 등 오히려 갈등을 부추긴 것으로 알려졌다.
육군은 이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선(先) 참모, 후(後) 소대장’ 개념을 적용하기로 했다. 우선 참모로 기용해 부대 생활, 리더십을
평가한 뒤 그 결과에 따라 GP·GOP 소대장을 선발하겠다는 것. 소대장, 중대장 임무를 잘 수행한 이들에게 진급과 각종 선발 시 우대하는
조치도 시행하기로 했다.
◇◇소초에 이웃한 사천리중대 △△소초의 병사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동부전선의 심장’을 지킨다고 여긴다. △△소초가 속한 사천리중대의 소초와 소초 사이 특정 구간은 4983개 계단으로 이뤄졌다. 병사들은 이를 ‘4000 계단’이라고 칭한다. 조상권 사천리중대장(대위)은 부임 후 체중이 8㎏ 빠졌다. 날마다 ‘4000 계단’을 오르내려서다. 조 대위는 “가장 고된 곳에서 근무한다는 자부심을 가진 터라 경계 근무의 질이 다른 곳보다 더 높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12사단 GOP대대장(중령)은 “구태의연한 경계 작전에서 벗어나 경계의 질을 향상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작전을 수행한다”고 말했다. GOP대대장도 최전방에 올라온 후 체중이 8㎏ 빠졌다. 그는 “날마다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의 체중이 빠지는 한계점이 6~8kg인 것 같다”고 말했다.
◇◇소초 병사들도 GOP 투입 후 대부분 6~8kg이 줄었다. 지방이 탄 후 다리에 근육이 붙어 더는 체중이 줄지 않는다고 한다. 철책을 따라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다보니 무릎 통증을 호소하는 병사가 적지 않다. 한 병사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면서 “혹한과 혹서의 날씨,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 배고픔을 GOP의 3대 적(敵)” 으로 꼽았다.
최전방 부대는 보급이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다. 라면, 빵 등 부식도 넉넉하게 나온다. 식사 또한 나쁘지 않았다. 병사들은 식탁 앞에 놓인 TV를 시청하면서 양껏, 맛있게 먹었다. 다만, 1인당 국민소득 2만6000달러, GDP 세계 15위, 무역 규모 세계 9위 국가의 군대 식사로는 미흡하다. 오래전과 비교해 보급은 비약적으로 개선됐지만, 요즘 자식 키우는 부모의 기대 수준과는 격차가 있어 보였다. 국회에서도 군 예산 중 급량비 인상분을 삭감할 때가 많다.
◇◇소초의 대기초소에서 김동훈 병장과 이성현 일병이 팥빙수를 먹는다. 선반에는 컵라면이 쌓여 있다.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컵라면을 먹을 수 있도록 해놓았다. 김동훈 병장은 “고되지 않으냐”는 질문에 “허벅지 근육이 단단해졌다”면서 웃었다. 여건 개선 사항 설문조사 때 병사들이 팥빙수를 보급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부대 운영비로 쇄빙기를 구입했다. 배낭형 아이스박스를 구입해 간부들이 순찰 돌 때 얼음을 공급한다. 외진 곳에 위치한 대기초소에는 냉장고를 설치했다. 팥빙수 보급은 작은 배려였지만 병사들의 호응이 생각보다 훨씬 컸다. 이성현 일병은 “졸음을 쫓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경계근무는 인간보다는 기계와 비슷한 양상으로 1년 365일 돌아간다. 고립돼 있으며 하루하루가 똑같은 일상을 견뎌내기 버거워하는 병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천리중대에서도 “계단만 보면 죽어버리고 싶다”고 호소한 병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 병사는 임무를 바꾼 후 군 생활에 적응했다.
육군은 임 병장 사건 이후 복무 부적응자 처리 절차를 간소화하고 관심병사 관리 제도를 개선하기로 했다. 고위험군에 속하는 병사는 식별-관리-처리에 6~8주가 소요되던 것을 1~2주로 단축해 식별 즉시 사단급에서 현역 복무 부적합 심사 후 군사령부에서 전역을 심사하는 것으로 단순화했다.
관심병사 명칭도 ‘사랑이 필요한 병사’로 바꾸기로 했다. 또 A, B, C의 등급명은 ‘믿음’ ‘배려’ ‘용기’로 바꿔 낙인 찍기로 인한 2차 피해를 예방하기로 했다. 인성 검사의 신뢰성을 높일 방안도 마련한다. 현재의 인성 검사는 대인관계 등 집단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육군은 우수한 병력을 GP, GOP에 배치하고자 2015년부터 보상 휴가를 10일에서 24일로 늘리고, 특수지 근무수당을 하사 수준으로 인상하는 것을 검토한다.
8월 5일 오전 8시, 최용훈 대위(목사)가 ◇◇소초를 찾았다. 종교 상담을 해주는 게 그의 일이다. 최전방 소초를 오르내리느라 등산용 폴을 구입했다. 1개 소초에 일주일에 1회 들른다. 연애상담, 진로상담을 주로 한다고 했다.
“GOP에서는 훈련이 고되다, 작전이 힘들다는 호소는 거의 없다. 고립된 곳이다보니 사람과의 관계 문제를 호소하는 예가 많다.”
입대 7개월 차인 이성현 일병은 주기적으로 상담을 받는다. 이 일병은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져 심란하다. 박준호 일병은 “체격이 좋아졌고, 후임도 들어왔다. 소대장님이 잘해준다”고 최용훈 대위에게 말했다.
◇◇소초가 속한 GOP대대의 상급부대인 ▽▽연대 간부들도 연대장의 지시로 GOP를 순찰하면서 계급이 낮은 병사를 직접 만나 애로사항을 듣는다.
8월 9일 의정부시에서 만난 병사들의 설명은 이 부대의 경우와 달랐다. 한 병사는 “지휘관의 병영 폭력에 대한 무관심과 방치가 문제”라고 말했다. 또 다른 병사도 “간부들이 고참병의 후임병 ‘군기 잡기’를 묵인, 방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휘관의 관심과 노력에 따라 상황이 바뀌는 것이다.
육군은 연대급까지 배치 예정이던 병영생활전문상담관을 GOP대대급까지 확대 배치하기로 했다. 격오지 근무 기피로 우수한 상담관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예상돼 GOP대대에 근무하는 상담관에게는 격오지 근무수당을 신설해 지급하기로 했다.
오전 9시 30분, ○○○조 근무를 마치고 취침했다가 기상한 병사들이 방공호 앞에서 농구를 한다. 풋살, 농구가 병사들의 오락이다. 구보할 공간이 마땅하지 않아 줄넘기로 스트레스를 푸는 병사도 있다. 주말에는 사이버지식정보망을 통해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업로드는 막혔지만 다운로드는 가능하다. 김준혁 하사(분대장)는 “페이스북을 이용해 전역한 병사들과도 소통한다”고 말했다. 병사들은 ◇◇소초 복도에 설치된 전화기도 자유롭게 사용했다.육군은 2006년부터 15년 동안 1717억 원을 들여 ‘병력’ 위주의 경계 체제를 ‘병력+편제장비+과학화 경계 시스템’으로 전환한다. 중거리감시카메라 외에 철책에 광망센서를 부착하고 근거리감시카메라를 추가 도입한다. 육군은 경계 근무 인원 수요가 40%가량 줄고 1인당 경계근무 시간도 9.1시간에서 5.8시간으로 줄 것으로 예측한다.
◇◇소초에 설치된 중거리감시카메라는 북한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비무장지대 너머의 북한군은 현재 영농 활동이 한창이다. 부식을 자급자족하기 때문이다. 북한군 초소에서 병사들이 판초 우의를 덮고 자는 것까지 관측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시카메라는 GOP 병사들의 근무 태도도 감시한다. “GOP 병사가 적군을 경계하는 게 아니라 간부의 순찰을 경계한다”는 일각의 비판은 옛말이다.
국방부는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개선책을 내놓았으나 결과물은 늘 시원치 않았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일례로 2005년 6월 경기 연천에서 GP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노무현 정부는 병영생활 개선을 국방부의 중심 정책으로 내세웠는데, 이 정책은 인권을 보장한다면서 ‘편한 군대’만을 강조하다 군의 필수요소인 ‘군기’를 희생했다는 비판을 들었다. 바로 서야 할 군기와, 일소해야 할 병사들 간 잡군기는 다르다. 대표적인 잡군기가 28사단 의무대에서 극악을 보여준 후임병 괴롭히기다. 병의 계급은 서열을 나타낼 뿐 상호 명령·복종 관계가 아니며 분대장을 제외하면 명령·지시를 할 수 없다. 구타와 병사 간 얼차려 또한 금지돼 있는데 이 규정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2008년 정권이 바뀐 후 군의 모토는 ‘전투형 군대 육성(fight tonight)’으로 180도 바뀌었다. 이명박 정부 초대 국방부 수장인 이상희 장관은 노무현 정부의 ‘가고 싶은 군대, 보내고 싶은 군대’ 정책을 폐기했다. 앞선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군대다운 군대가 필요하다” “느슨한 군 기강을 바로잡겠다”면서 강한 군대 만들기에 나섰다. 병영 생활 여건 개선과 관련한 부서도 축소됐다.
강한 군대만을 강조하다보니 부작용이 상당했다. 혼란과 사고가 속출했다. 피로를 호소하던 병사들이 사지로 내몰렸다. 2008년 10월엔 한 달 동안에만 13명이 부대 부적응과 업무 부담을 이유로 투신하거나 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한동안 이 같은 흐름이 계속됐다. 김관진 장관은 지휘서신 1호에서 “사고의 유무와 건수로 지휘관과 부대를 평가하는 관행을 없애겠다”고 공언했다.
“군대가 강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으나 “군인의 인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에도 마찬가지로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군대를 재건하면서 군인을 ‘제복 입은 시민’이라고 규정한 이유를 우리 군이 되새겨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병사들은 자원해서 입대(모병제)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징집돼(국민개병제) 복무한다. 모병제 국가의 군인과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국가가 징집했으므로 국가가 복지를 책임져야 한다.
한 영관급 장교는 “강군 육성과 병사의 생활 여건 보장은 군이 동시에 이뤄야 할 목표다.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것을 시소 타듯 절묘하게 관리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8월 5일 오후 군용 차량을 타고 ◇◇소초에서 민간인통제선 이남으로 내려가는 길은 험했다. 오래전 적은 듯 보이는 슬로건이 차창 밖으로 눈에 띈다.
“적에게는 전율을, 전우에게는 사랑을.”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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