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학생들 사이에 일종의 ‘사관학교 붐’이 일어났다. 아마 직접적인 이유는 당시 정계의 제2인자였던 이기붕 국회의장의 장남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 군이 육사를 지원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의 육사 지망은 그것과 상관없었다. 당시 나와 친구들은 나세리즘(Nasserism)에 심취하고 있었다. 낙후된 조국을 건설하는 길은 이집트의 나세르가 조직한 ‘자유장교단’ 같은 것을 만들어서 혁명을 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담임이었던 최흥준 선생께서는 사관학교 진학을 만류했다.
“이것 보게 이군! 군대란 모든 재능을 평준화하고 단일 색깔로 만드는 곳이야. 자네의 재능은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는데 왜 하필 군대로 가려 하는가? 재고하게!”
심지어 어머니까지 학교로 불렀다. 그래도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최 선생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입학시험도 본다는 ‘조건’으로 재학증명원에 결재를 해 주었다.
‘나라의 진로를 개척하는데 행동을 해야지 학문연구가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행동이 없는 학문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같이 육사에 진학하자고 설득했다.
나의 의견에 동의해 준 친구들이 약 30명쯤 됐다. 우리는 서울 양정고등학교로 입학시험을 치르러 갔다. 그런데 서울고등학교에서는 50여 명이 이강석을 에워싸고 수험장에 도착했다. 후에 군의 귀감이 된 강재구 군도 거기에 있었다.
나는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육사에 가서 구술시험을 봐야 했다. 이때 필요한 서류가 추천서였다. 정부의 국장급 이상 공무원이나, 군 장성의 추천이 필요했다. 나는 아버지의 동지이며 광복군 출신인 민영구 제독과 김관오 장군의 추천서를 받았다.
면접관은 생도대장 이용 장군과 참모장이었다. 그분들은 모두가 일본 지원군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민영구 제독과 김관오 장군을 어떻게 아는가?” 참모장이 나에게 물었다.
“그 어른들은 저희 집안과는 중국에서 살던 시절부터 세교가 있었던 분들입니다”라고 주눅이 들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귀관의 집안도 소위 독립운동을 한 집안이란 말이야?” 상당히 경멸조의 반문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나는 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답했다. 내심 뜨거운 분노가 치밀었다. 이 사람들은 독립운동가에 대해 상당히 적의를 갖고 있는 듯했다.
면접시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 말을 부모님께 해야 하나, 아니면 나 혼자 새겨야 하나 고민하였다. 내가 모욕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되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에 들어가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던 자들이 득세하여 장군이 되었고, 해외에서 목숨 바쳐 싸웠던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오히려 멸시를 당하는 이런 모순에 대하여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서울대학교에 시험을 보러 가기 바로 전날 육사에서 합격통지서가 왔다. 나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내가 육사에 가면 집에서는 학비와 내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머니는 너무 고생하셨고, 아버지는 왜놈에게 고문을 당하여 청각을 잃었는데도 보청기조차 없다. 좋다, 군인이 되자. 그렇게 결심을 하고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입학시험 날 당한 모욕이 잊혀지지 않았다. 결국 군대에 가면 왜놈에게 충성을 바쳤던 장군들이 설치는 세상에 살게 될 터인데….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버님에게 내 생각을 글로 써 보여드렸다. 아버님은 한동안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돈이 없어 육사에 간다는 생각은 말고 선조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그 정신에 따라서 간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느냐? 너도 알겠지만 우리나라는 너무 문관에 편중하여 문약해졌기 때문에 남의 나라로부터 침탈을 받았다. 국력이란 바로 나라의 힘이란 뜻 아니냐? 일찍이 할아버님도 문관 우위의 옛 가치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무관을 기르기로 한 것이다. 이제 네가 결심하기 바란다.”
나는 육사 구술시험 때 일을 이실직고했다. 아버님은 한순간 몹시 분개하더니 곧 평정을 되찾고 말씀하셨다.
“네가 받은 억울함을 안다. 우리는 이미 10년간을 그런 잘못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앞길을 피해간다면 되겠느냐? 바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일제잔재로부터 진정한 독립은 아직 안 끝났다. 앞으로 두고두고 할 일이지….”
나는 서울대학교 시험을 포기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로 작심했다.
얼마 후 아버님은 민영구 제독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아니 육사라는 데가 민족정기부터 바로잡아야 할 터인데 독립운동을 모욕했다니 말이 되오.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군대요.”
민 제독은 당장 진해 육군대학 총장으로 있는 이종찬 장군에게 항의를 했다. 이종찬 장군 또한 즉각 육군사관학교에 연락하고 상당히 나무랐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겪은 모욕감은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 개인에 대한 모욕이 아니기 때문이다.
▼ “고교생 싸움에 정치깡패가… 큰일났다” ▼
경기高 이종찬 - 서울高 이강석의 인연
서울고 학생들이 50명이나 몰려왔지만 이종찬은 이강석이 반가웠다.
“어떻게 육사를 가기로 결심했냐?”
이종찬이나 이강석이나 둘 다 체력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강석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원래 군인 되기를 희망했어….”
이종찬의 기억. “원래 경기고 교사(校舍)는 화동에 있었지만 내가 다닐 때는 지금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텐트를 치고 있었다. 자연히 (현재 경희궁터 자리에 있던) 서울고 학생들과 충돌이 잦았다. 어느 날 서울고에 다니던 최창학 씨의 손자가 우리 학교 학생들한테 얻어맞았는데 서울고 쪽에서 자유당 깡패로 유명한 이정재의 부하들을 동원한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큰일 났다 싶었다.”
최창학은 친일 광산사업가로, 백범 김구 선생에게 경교장을 내준 인물. 여하튼 자유당 깡패들이 나선 배후에 이강석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종찬을 비롯한 경기고 학생들은 이강석을 찾아갔고, 바로 화해했다.
“나는 지금도 이기붕 씨와 이강석 군에 대한 평가는 후세 역사가 다시 정리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지금은 마치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을 호가호위한 아첨꾼으로 매도하고 있을 뿐이지만 내가 아는 이기붕 씨는 국방부장관으로 있으면서 ‘국민방위군 사건’을 명쾌하게 처리했으며 당당하게 아들을 육사에 보낼 정도로 인격을 갖춘 분이었다. 강석이 면회를 올 때도 육사 간부들이 아무도 나오지 못하게 하고, 직접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국민방위군 사건. 창군(創軍) 이래 지금까지 이런 비극이 없었고, 이런 죄악이 없었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이 개입하자 이승만 정권은 17∼40세의 남자들로 국민방위군을 편성했다. 제2국민병이었다. 1·4 후퇴로 국군이 다시 패퇴하게 되자 국민방위군 역시 남쪽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동절기 군복은커녕 아무런 의복도 지급받지 못해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이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그 사이,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차떼기’로 예산을 빼돌렸고 고급요정에서 기생파티를 벌였다.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이승만의 사조직인 ‘대한청년단’ 단장 출신의 김윤근.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국방장관은 초대 대한청년단 단장을 지낸 신성모.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대통령이 명령만 내리시면 우리 국군은 사흘 만에 평양까지, 일주일 만에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 강물을 대통령께 바치겠다”고 하던 그 신성모였다.
이승만과 신성모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검찰이 수사를 벌였지만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얼마나 많은 청장년들이 죽은 줄 아느냐?” 이종찬의 작은 할아버지이자 초대 부통령인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1869∼1953)은 그렇게 항의하며 부통령 자리를 던졌다. 이승만은 그제야 신성모 대신 이기붕을 국방장관에 임명하고 수습에 나섰다.
이기붕은 즉각 재조사를 지시했고, 김윤근을 비롯한 국민방위군 간부 5명을 사형에 처했다. 이기붕은 이때부터 ‘스타 장관’이 됐고, 2인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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