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후 3시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서관 502호 법정. 1년 2개월 동안 8차례의 공판 준비기일과 37회 공판을 연 끝에 재판부가 “국가정보원 심리전단의 사이버활동은 국정원의 직무범위를 벗어난 정치관여 행위로 국정원법 위반이지만 불법 선거운동은 아니다”라고 결론 내렸다. 그 순간 법정 안은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의견을 달리하는 방청객이 서로 “유죄를 선고해야 한다” “조용히 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을 불과 8일 앞두고 불거진 국정원의 대선개입 의혹은 수사 단계부터 재판 선고까지 말 그대로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검찰총장 낙마와 지휘부 공백 상황에서 터진 윤석열 특별수사팀장의 항명 파동까지 이어진 논란이 1심 판결로 잠재워질지 주목된다.
○ “검찰, 정치행위→선거운동 전환 논리 자가당착”
재판부는 이날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선거 또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행위’와 ‘선거운동’을 엄격히 구분했다. 선거운동이 되려면 특정 후보를 낙선 또는 당선시키려는 능동적인 계획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가 “선거운동에 해당된다고 보기엔 검사의 입증이 부족하다”고 결론을 내린 건 불법 선거운동의 시점조차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검찰의 공소장 변경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검찰 수사 결과 국정원 심리전단은 원 전 원장 취임 3개월 뒤인 2009년 5월부터 댓글 활동을 해왔다. 검찰은 원 전 원장을 처음 기소했을 때 2012년 8월 29일부터 12월까지의 댓글 활동만 선거법 위반이라고 특정했다. 2012년 8월 말부터 각 정당의 대선후보가 결정돼 기존에 해왔던 댓글 활동은 그 시점부터 불법 선거운동이 된다는 논리였다. 검찰은 그 후 공소장을 바꾸면서 선거운동 시작 시점을 2012년 8월 말에서 1월로 앞당겼다. 대선후보 윤곽도 드러나지 않은 2012년 1월부터는 특정 후보 낙선을 위한 선거운동이 당연히 성립할 수 없는데도 공소장을 바꿔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다. 재판부는 “검찰은 국정원의 정치관여 활동이 선거 시기가 되면 당연히 선거운동으로 전환된다고 주장했지만 선거운동으로 보려면 계획적이고 능동적인 계기가 더 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검찰이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스스로 ‘전환 논리’를 깬 점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원 전 원장이 대선이 가까워진 2012년 8, 9월 부서장회의 때 “대선에 (국정원이) 휩싸여선 안 된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는 등 선거중립을 강조한 것도 검찰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었다. 2012년 10월부터는 오히려 트윗 건수가 감소하기도 했다.
○ 원세훈 “항소”… 검찰은 항소 포기할 수도
개인 비리로 수감됐다가 이틀 전 만기 출소한 원 전 원장은 재수감은 가까스로 피했지만 국정원법 위반이 인정돼 전직 정보수장으로는 치명상을 입었다. 재판부도 “국가기관이 자유로운 여론 형성에 개입한 행위는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걸로 죄책이 무겁다”고 밝혔다. 원 전 원장은 재판정을 나서며 “(유죄 판결을 받은) 국정원법 위반 혐의도 북한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한 것이다. 항소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검찰은 판결 결과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옛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선거를 앞두고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비방했던 교사 등 상당수에게 선거법 위반죄가 인정됐던 전례에 비춰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판결”이라며 “즉시 항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 검찰 지휘부의 입장은 달랐다. 검찰 고위 간부는 “공직선거법은 처음부터 적용이 어렵다고 판단했고, 1심에서 예상했던 대로 판결이 나왔다”고 했다. 검찰은 “판결문을 보고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내놨지만 항소를 포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 검찰 관계자는 “법무부 장관이 공직선거법을 적용하지 말라고 했는데 무죄가 났다. 또 지난해 서울고검 국감 때 윤석열 팀장의 항명 파동 발단이 된 추가 압수수색 때 나온 트윗 계정도 법원이 거의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법무부만 속으로 웃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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