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情에 울린 전화벨 “입안 혀처럼 놀던 자들이 반기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3일 03시 00분


[憧憬 이종찬 회고록]〈4〉통화개혁 中

1962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통화개혁 긴급조치’ 발표 직후 동아일보에 실린 유원식 최고회의 재정위원의 만평. 그해 1월 
발표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내자조달을 위해 통화개혁조치를 단행했고, 유원식이 그 총대를 멨다는 비유다. 작은 사진은 동아일보 
이규행 기자와 인터뷰 중인 유원식. 동아일보 DB
1962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통화개혁 긴급조치’ 발표 직후 동아일보에 실린 유원식 최고회의 재정위원의 만평. 그해 1월 발표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내자조달을 위해 통화개혁조치를 단행했고, 유원식이 그 총대를 멨다는 비유다. 작은 사진은 동아일보 이규행 기자와 인터뷰 중인 유원식. 동아일보 DB
국가재건최고회의 전체회의에서 ‘긴급통화조치법’을 의결한 다음 날부터 화폐를 교환하려는 사람들로 은행마다 장사진을 이루었다. 세상이 뒤집혀진 것 같았다. 최고회의 안에는 긴급통화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김동하 장군이 위원장이 됐다. 그러나 그는 계획단계부터 참여하지도 않았고 명색이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이었지만 사실 소외되어 있었다. 모든 일은 유원식 재정위원이 도맡아 처리했다. 물론 김 위원장에게 보고도 안 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긴급조치법을 시행하면서 사전에 미국 정부나 원조기구 등과 일언반구 협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당시 정부 예산구조를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자력으로 마련한 수입 대금은 국가 예산의 3분의 2도 안 됐고, 나머지는 미국의 원조로 나라살림을 겨우 꾸려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미국 원조는 한미 간에 설치한 합동경제위원회(CEB)에서 용도를 심의해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미국 측 대표인 킬렌은 즉각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에게는 원조중단이라는 잘 드는 칼이 있었다.

미국 측이 강하게 반발하자, 최고회의 내부에서도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김동하 재정경제위원장은 자기도 전혀 모르는 가운데 비상조치가 취해졌다는 사실에 격분했고, 최고회의 이주일 부의장도 회의석상에서 노골적으로 유 장군을 몰아세웠다.

“알라스카 놈들, 일제히 반격이 시작됐군.” 그는 공공연히 함경도 출신 장군들을 ‘알라스카 놈들’이라고 비난했다. 중앙정보부 김종필 부장이 유 장군에게 메모를 전해왔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유 장군의 노고에 위로를 보냅니다. 일단 출발한 이 계획이 차질 없이 추진되기 바라며 유 장군이 이를 잘 수습하리라 믿습니다. 누차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생일은 각각 다르다 하더라도 우리의 제삿날은 같다는 저의 결심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습니다….’ 나는 ‘제삿날은 같을 것’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종필은 훗날 월간조선 오효진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화폐개혁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고 발을 뺐다.

“내가 불려간 것은 주문한 화폐가 홍콩에 도착하고 난 다음입니다. 그 화폐가 곧 부산에 도착할 터이니 그때부터 보호하라는 지시를 받은 겁니다. 내가 여기서 확실히 얘기하지만 그 (통화개혁)계획을 우리가 세워서 추진한 것처럼 아는데 그건 잘못입니다.”

날이 갈수록 통화개혁 조치에 대한 내외의 반발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이규행 기자가 서울 삼선동 유 장군 집으로 아침 일찍 찾아왔다. 개별적으로 기자를 일절 만나지 않던 유 장군에게 그는 취재가 아니라 해명의 기회를 준다고 설득했다.

“긴급통화조치에 대해 미국과 일부 국민 간에 오해가 있습니다. 그 조치가 사회주의적인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현재 이 조치에 대하여 자본국유화라는 비난의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유 장군은 속으로 뜨끔한 모양이다. 그는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번 통화긴급조치의 발상은 내가 처음으로 제기하여 박정희 의장이 받아들인 것이다.”

“사회주의적 방식이란 말도 안 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내자동원의 한 방법으로 추진한 것뿐이다.”

“미국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것은 보안 때문이었지 절대 민족주의적 접근은 아니다.”

다음 날 동아일보에 대문짝만 한 기사가 났다. 해명을 해준 것이 아니라 유 장군이 마치 ‘내가 다 한 것이다’라고 원맨쇼를 한 것 같았다.

유 장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아니 이렇게 기사를 쓰다니…. 언제 내가 다 했다고 했나?” 그는 항상 박정희 의장보다 앞서 가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과도하게 신경을 써왔다. 그가 통화개혁의 아이디어도 자기가 제안했다는 말은 사실 ‘사회주의적 조치’라는 비난을 박 의장이 받을 것 같아서 방탄용으로 한 말이었는데 신문에는 마치 ‘박 의장은 결재도장만 찍었을 뿐 사실은 내가 주인공이다’라는 식으로 표현이 돼있었다.

최고회의 의장실에서는 미국 측을 설득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유 장군은 의장실 의전담당인 조상호 중령을 대동하고 현재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맞은편에 있는 주한 미대사관으로 갔다.

버거 대사와 면담 후 유 장군은 상황을 낙관했던 것 같다. 기자들이 몰려와 물었다. 유 장군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약간의 오해가 있었지만 곧 이해가 되었고요. 이번 통화조치에 대하여 적극 협조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미 대사관 측은 즉각 부인 성명을 냈다. “아무 것도 양해한 사실이 없다.”

그러던 차에 송요찬 내각 수반이 사의를 표했다. 송 수반은 증권파동 때부터 이미 정면으로 최고회의와 이견을 드러냈다. 그는 중앙정보부가 증권시장에 개입하고 금융통화위원회가 돈을 푼 것에 대하여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내각수반은 결국 바지저고리 아니냐?”고 불만을 토했다.

유 장군은 김종필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까지는 입안에 혀처럼 놀던 친구들이 오늘 모두 반기를 들고 있어요!”  

▼ 5·16과 아나키즘의 연결고리 ‘반공’ ▼

선데이서울 장태화-타워호텔 남상옥… 5·16을 도운 그들은 아나키스트였다


올 7월 18일자 조간신문엔 이런 부음 기사가 실렸다. ‘선데이서울 창간 장태화 전 서울신문 사장 별세, 향년 96세’

기사에는, 경북 칠곡 출생으로 일본 유학파인 고인(故人)이 해방 직후 육군본부 정보국장 고문을 지냈으며 5·16 군사정변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고 짤막하게 기술돼 있다. 그리고 김종필(JP) 초대 중앙정보부장의 정치고문을 맡은 뒤 1965∼1972년 서울신문 사장을 지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신문기사 어디에도 그가 해방전후에 아나키스트로 활동했다는 내용은 없다. 유원식의 아버지 단주 유림(旦洲 柳林) 선생이 귀국하기 직전인 1945년 9월 29일. 중국, 일본, 그리고 국내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자유사회건설자연맹(자련·自聯)’이라는 조직을 만든다. 그해 12월 유림이 귀국하자 ‘자련’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고, 이듬해 7월 아나키스트들을 주축으로 독립노농당이 탄생한다.

장태화는 바로 그 ‘자련’의 멤버였다. 1962년의 ‘6·10 통화개혁’ 와중에 유원식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장태화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장태화는 중앙정보부장 고문이었다.

이종찬의 기억. “당시 ‘나, 장입니다’라는 전화가 오면 무조건 유원식 장군에게 바꿔줘야 했습니다. 장태화 고문은 통화개혁을 둘러싼 여론동향과 대응전략을 세심하게 조언했습니다. 아버지(유림)는 아들을 외면했지만 아버지의 동지들은 유 장군을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 남산에 있던 옛 타워호텔 설립자인 남상옥도 그랬다. 남상옥은 청년시절 아나키스트 운동에 심취해 유림의 정치노선을 따르던 투사였다. 그러나 사업가로 변신해 성공했다. 그런 남상옥을 끌어들여 5·16 정변 당시 거사자금을 대도록 한 사람이 바로 유원식이었다. 남상옥은 5·16 이후 정부의 지원을 받아 6·25전쟁 참전 16개국을 상징하는 타워호텔을 건립했다. 다시 이종찬의 기억. “내가 유 장군을 모시고 있을 때 남상옥 사장은 거의 매일 유 장군 댁을 드나들었다.”

한때 아나키즘에 투신했던 인물들이 5·16에 참여한 배경은 뭘까? 단지 유림의 아들 유원식과의 인연 때문일까?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시스트의 관계를 흔히 ‘형제이자 적’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은 같지만,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의 ‘독재’를 끔찍하게도 싫어했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바쿠닌은 “나는 공산주의를 몹시 싫어한다. 그것은 자유의 부정이고, 나는 자유가 없는 인간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항일독립투쟁 시기 민족주의 그룹과 공산주의 그룹의 대립보다, 공산주의 그룹과 아나키스트 그룹의 대결이 더욱 치열했다는 게 그 방증이다.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38선을 베개 삼아 자결하겠다”며 평양으로 떠나는 백범 김구 선생에게 “가지 마시오. 그들의 속셈을 모르십니까?”라고 극력 만류했던 사람도 유림이었다.

그런 아나키스트들이었기에 반공(反共)을 내건 5·16 세력을 돕지 않았을까?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아나키스트#통화개혁#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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