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요찬 내각 수반의 사표는 천병규 재무장관의 동반 사퇴로 이어졌고, 유원식 장군의 입장도 점점 어려워졌다.
미국 대외원조기관인 유솜(USOM)의 킬렌 처장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압력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 장군은 또 조상호 중령을 대동하고 최고회의의 옆 건물(현 미 대사관 건물)로 킬렌 처장을 방문했다.
킬렌은 직설적이었다.
“한국의 가용 투자 재원 가운데 80%가 미국에서 제공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화조치에 대해서 한마디 협의도 없었습니다. 한국이 정책을 임의로 바꾼다면 미국은 원조를 재고할 수 있습니다.”
통역을 맡은 조 중령은 몹시 당황해 이 말이 질문인지, 협박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데도 유 장군은 태연하게 배짱을 부렸다.
“귀하의 말씀은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은 것이오, 아니면 버거 대사와 협의한 것이오, 그것도 아니라면 귀하의 사견이오? 통화조치가 잘못 되었으면 구체적인 조치 내용에 대하여 지적해야지 않소? 귀하는 절차상의 문제, 또는 조치를 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못마땅하여 나온 말씀 같은데 이런 문제는 나중에 토론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유 장군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전날 신문에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케네디 대통령을 면담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통화개혁이 단행되어도 미국의 원조나 기존 정책에 변동이 없다”고 역설하였기 때문이다.
유 장군은 킬렌의 사무실에서 나와 즉각 서울운동장의 3군 체육대회를 참관하고 있던 박정희 의장에게로 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유 장군은 감격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하여간 우리 오야붕이 최고야! 미국이 원조를 끊겠다고 한다고 보고했더니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끊을 테면 끊어보라지’ 하는 것 아닌가. 보통 배짱이 아니시거든…. 역시 최고야.”
한편 통화조치에 대하여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던 여론이 차츰 정리가 되면서 불평의 소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산업은행의 전 총재인 이필석이 만든‘시중 금융체제 개혁안’을 보냈다. 거기엔 ‘건의안을 검토할 때, 이주일 부의장과 김동하 재정위원장을 동석시킨 자리에서 신중하게 논의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는 메모도 끼어 있었다. 유 장군은 성격이 저돌적이라 “박 의장한테만 충성하면 됐지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 있나?”라며 주변을 개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후 통화개혁에 대한 미국의 압력은 한층 거세졌고, 박정희 의장은 유 장군을 통하지 않고 직접 실무를 담당한 김정렴 공사에게 “봉쇄계정으로 동결된 자금 가운데 1년 미만의 정기예금은 전부 풀어주라”고 지시했다.
통화개혁은 10환을 1원으로, 화폐단위를 바꾸는 의미밖에 없게 되었다. 정부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7월 초, 최고회의에서는 증권파동과 통화개혁 전반이 의제로 올랐다. 그 자리에서 유 장군은 이주일, 김동하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초조한 유 장군은 남산에 전화를 걸어봤으나 답전도 없었다.
7월 10일 오치성 운영위원장이 사무실에 들렀다. 유 장군은 저자세로 그를 맞았다.
“제가 내려가 뵈려고 했는데….”
오랜 밀담이 있은 후 오치성 위원장은 유 장군의 사표를 받아갔다.
며칠 후 의장 공관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유 장군은 흥분했다. 귀가하는 차중에서 유 장군은 말했다.
“세계 여러 나라를 순방하게 되었으니 여행 계획을 준비하도록 하게.”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까?” 나는 용기를 내어 물어봤다.
“민정이양 후 국회에 진출하라고 하더군. 내가 주저하니깐 비례대표제도 있을 터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거야. 그리고 나에 대한 국내여론이 좋지 않으니 천천히 세계 일주한 뒤 국내에 돌아와 새롭게 활동을 하라 하더군.”
유 장군은 비례대표제란 독일의 선거법에서 모방한 제도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며칠 후 최덕신 외무장관이 찾아왔다. 최 장관이 떠난 후 유 장군은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보고 일본 공사로 나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는군. 현재 대사가 있지만 실제로는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나간 최영택 참사관이 모든 일을 다해나가고 있다고 하면서 만약 내가 동의하면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겠다고 하더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일본 공사로 나가라고 한다는 것은 장군님에 대한 대접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사라면 몰라도….” 나는 즉각 반대의사를 말했다.
“이승만 시절에 유태하 공사가 대일외교를 좌우했던 역할을 나보고 하라는 것이지? 이제 내가 그 짝이 됐군.”
결국 그는 공사 직을 고사했다. 하지만 세계일주 여행계획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권력이 떨어지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사람이 전화공이다. 경비전화를 떼어갔다. 그리고 문전성시를 이루던 내방객의 발길도 끊겼다.
그는 불같은 성질을 참지 못하고 매일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통화개혁 실패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제삿날을 같이하자던 김종필 부장은 연락조차 안 되었다.
▼ “윤보선 대통령이 5·16 거사 지지 표명”… 유원식, 상상력 동원해 박정희에 보고 ▼
윤보선 “올 것이 왔구나” 발언 의미는
“날이 밝았다. 아침 9시쯤 되었을까? 보고를 받고 급히 응접실로 내려가니 여러 사람이 모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이성호 해군제독, 김신 공군참모총장, 김성은 해병대사령관, 현석호 국방장관, 그리고 소장 계급장을 단 장군과 대령 계급장을 단 장교가 있었다.”
고(故) 윤보선 전 대통령은 회고록(1991년 발간)에서 5·16 군사정변이 있던 날 아침을 이렇게 기술(記述)하고 있다.
‘소장 계급장을 단 장군’은 박정희, 대령은 유원식이었다.
“그때 내 입에서 무심결에 새어나온 첫마디 말이 ‘온다던 것이 왔구나!’였다. 이 말은 후일에 자주 인용되고 오해의 불씨를 일으켜 내가 마치 군사 쿠데타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전해지기도 했으나 실은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온다던 것이 왔구나!”라는 말은 이후 “올 것이 왔구나!”라는 어록으로 회자되면서, 윤보선의 탄식 그대로 그가 내심 5·16을 환영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낳았다. 아니, 그게 정설이 돼버렸다.
거기엔 유원식의 입도 크게 작용했다.
유원식은 5·16 군사정변 모의에 가담하면서 부친인 단주(旦洲) 유림 선생의 항일투쟁 인연을 적극 활용했다. 1961년 정초, 청와대로 윤보선 대통령에게 세배를 하러 간 것도 그 일환이었다. 하지만 청와대 하례객은 1000여 명. 기억에 남는 하례객은 아니었다.
그런데 4월 1일 유림 선생이 타계하면서 유원식은 장례를 치르느라 한 달여 남은 거사계획에서 잠시 빠지게 된다. 그 바람에 박정희에게 넘겨줘야 할 남상옥 사장의 거사 자금도 제때 전달하지 못했다. 남상옥은 아버지의 아나키스트 동지이자, 훗날 타워호텔을 세운 사업가. 자금난에 봉착한 박정희는 직접 남상옥을 불렀고, 그로부터 “이미 유 장군에게 전달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여하튼 윤보선이 유원식을 두 번째로 만난 게 바로 유림의 삼우제 때였다. 서울 수유리에 있는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과 유석(維石) 조병옥 박사의 묘소를 둘러보러 들렀다가 소식을 듣고 참배하게 된 것. 윤보선은 회고록에서 “헌데 그 상주가 바로 문제의 유원식 대령이었던 모양이다”라고 쓰고 있다.
유원식은 이후 ‘윤보선 공략’에 부심했고, 박정희에게도 윤보선과의 네트워크를 자랑스럽게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이종찬은 그에 대해 “큰 판을 볼 줄 아는 분이었지만 과장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군 내부에서의 별명도 ‘유 대포’였다.
거사 직후 박정희는 윤보선 대통령의 계엄령 추인이 절박했다. 유원식이 청와대로 떠나는 박정희의 지프에 올라타게 된 것도 그런 상황 때문이었다.
이종찬은 이렇게 정리했다. “유 장군은 아마 자기 상상력까지 동원해 (박정희에게) 윤보선 대통령이 거사 지지를 표명했다고 얘기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유림 선생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하고 만났다가 흙탕물을 뒤집어쓴 것이고…. 역사는 가끔 똑 떨어지게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큰일이 벌어지곤 한다.”
댓글 0